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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2-04 22:13
좃족을 위한 '고구려가 우리 역사인 이유~!!!'
 글쓴이 : blackk
조회 : 648  

출처 : http://cafe.daum.net/alhc/51q2/5884

글쓴이 : 무케길잔

 

 

1.한국인의 혈통

 

한국인은 백제와 신라 외에도 많은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통일 신라 시기 9주 중 3주(오늘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가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됐고,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고구려 왕조의 지배를 받던 고구려인이었다. 고구려인의 인구가 적어도 통일 신라 인구의 1/3 즈음에 육박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로 경주를 지키던 9서당 중 3서당인 황금서당, 벽금서당, 적금서당이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이 수치는 오히려 백제인의 서당 부대였던 흑금 서당 개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통일 신라 인구 중 고구려인의 비율이 백제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고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서당의 숫자로 인구 비율을 추측하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을 분명한 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통일 신라 시기 고구려인들은 9주와 패강진을 제외한 통일 신라 남부 지역에도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익산(금마저), 경상남도 진주(강주의 중심지)에는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 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덕국왕이자 보장왕의 아들이었던 서자 고안승은 신라왕에게 김씨 성을 하사 받고 경주에 거주하였다. 이 사실은 오늘날 한국 성씨의 다수를 차지하는 김씨 성 중에도 상당수 고구려 유민 특히 고구려 왕족 안승의 후손도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발해 멸망 후에도 많은 고구려 혈통이 고려로 귀순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으며, 이후 고려, 조선조가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수복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다수의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우리 역사 무대에 다시 들어와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는 고구려인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가 여럿 있다. ㅡ 물론 조선조를 거치며 성씨가 많이 뒤바꼈기 때문에 성씨로 조상을 따진다는 것은 아주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ㅡ 오늘날 진주 강씨, 횡성 고씨, 봉성 온씨, 협계 태씨 등은 고구려인들을 시조로 모시는 성씨들이다. 이러한 혈연적은 계승은 한국인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2.한국어

 

한국어에는 많은 고구려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고구려어 수사가 현재 한국어 수사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 임병준이 제작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어 어휘 70여개 중 50개 내외의 단어가 현대 한국어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관련성은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한국어와 관련이 적다는 말은 기존의 일부의 주장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한국어는 분명 고구려어를 계승한 언어이다.

 

 

 

 

 

3.국호 Korea

 

세계에 고구려의 국호를 나라의 국호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Korea는 고려에서 나왔고, '고려'는 고구려 중엽 이후 고구려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의 국호였다. 오늘날 '고려'라 하면 왕건의 고려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구려라는 단어 대신 '고려'라는 말은 고구려라는 의미로 썼고, 오늘날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많은 지명들에서는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의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한국은 오늘까지도 고려(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나라이다.

 

 

 

 

 

4.계승 의식

 

고구려 멸망 후 통일 신라, 발해 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유지했고, 이는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계속 전승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고구려 유민들이 통일 신라 사회, 발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점이다. 발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통일 신라에서도 고구려 귀족은 백제 귀족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백제 귀족이 4, 5두품으로 몰락한 반면 고구려 귀족은 6두품 신분을 계속 유지했고, 고구려인의들의 탄탄한 세력은 이는 결과적으로 태조 왕건의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 건국의 주축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패서 출신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적어도 초기 고려의 귀족들은 상당수가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패서 지역은 고구려 시기 고구려 3경(평양, 국내, 한성) 중 한 곳이었던 한성(재령, 장수산성)이 있었던 곳이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매우 강했을 수도 평양과 강 하나를 두고 있는 지역인 만큼 순수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변방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적었던 거란, 말갈(여진)인들과는 달랐다. ㅡ 이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만주족들은 발해에 대한 계승 의식은 밝힐 지언정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ㅡ태조 시기 황해도 평산, 봉산 지역을 뿌리로 삼으며 등장하여 이후 고려의 귀족들이 된 성씨들의 경우 고구려인의 혈통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 귀족들에 합쳐지면서 이런 고구려의 계승 의식은 한층 강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4.평양이라는 도시

 

평양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전통을 지닌 도시이다. 고조선 시기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고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켰을 때 낙랑군의 중심지를 두어 한반도에서 가장 중시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평양은 동천왕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적도 있었고, 고국원왕 시기에도 잠시 수도로 삼은 적이 있었다. ㅡ 물론 고국왕왕 시기 평양 동황성을 오늘날 평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ㅡ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한 후 평양은 한국 역사상 최강국이던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고구려의 유명인들인 연개소문, 을지문덕, 온달, 영양왕, 보장왕, 연남생 등의 고구려인들은 평양을 무대로 활동했고, 고려 시대에는 평양을 수도 중 한 곳인 서경으로까지 삼아 매우 중시하게 됐다. 조선조에도 평안도 지역에서 오늘날로 치면 광역시, 거점 중심 도시일 '부'(평양부)의 자위를 받은 평안도 지역의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는 오늘날 한국인에게까지 고구려의 수도이자 북방 지역의 중심지 '평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분단된 북한 지역의 수도가 평양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이 한반도 북방의 중심지였던 것은 적어도 수천년 전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서경 시기와 그 연원이 닿아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평양은 분명 고구려가 한국에게 물려준 큰 고구려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5.거문고

 

한국 국악의 양대 현악기는 거문고와 가야금이다. 가야금이 남방의 가냘프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음률은 내는 악기라면, 거문고는 북방인의 단단하고 거칠고 투박한 음을 내는 악기이다. 왕산악이 만든 이 악기는 고구려의 소리를 전해주는 악기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은 거문고를 한국의 중심 전통 악기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고구려 멸망 후 거문고는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에게서 전수돼 온 한반도로 퍼져나가 계승됐다고 한다. ㅡ 출처 : 위키백과 ㅡ  옥보고는 고구려의 거문고에 많은 곡들을 붙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전체의 악기로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악기를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오직 한국뿐이다. 한국은 분명 고구려의 음악을 계승한 나라이다.

 

 

 

 

 

6.해서탈춤(복식)

 

한국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돼 오는 봉산 탈춤과 같은 춤들은 본래 해서 탈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봉산탈품은 약 200년 전 생겼지만 그 연원은 훨씬 오래 전인 고구려까지 추측해볼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춤사위는 무용총에 그려진 한삼을 손목에 잡고 춤을 추는 고구려인의 춤사위와 매우 닮아있다. 한국 춤에만 남아있는 한삼은 부드러운 선을 표현하는 춤 도구로서 한국 이외에는 없는 매우 독특한 춤 도구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인의 느린 3박자의 전통 춤사위는 고구려인의 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7.온돌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온돌은 본래 부여와 고구려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쓰이던 난방 장치였다.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됐다. 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 온돌은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 건물에 하룻밤을 묵던 미국인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난방을 하는 조선 건물의 온돌이라는 장치를 보고 오늘날 현대식 보일러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있다. 전 세계인이 지금은 향유하는 이 온돌은 중국, 일본에는 본래 없는 고구려인의 요소를 계승한 한국의 전통적인 난방 장치이다.

 

 

 

 

 

8.별주부전

별주부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서사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게 귀띔을 해준 고구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별주부전이 고구려에서(아마 신라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별주부전은 한국 서사 문학 작품으로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져왔다.

 

이밖에도 문학면에서 고구려는 한국 한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시 황조가, 여수장우중문 시 등 뛰어난 고구려의 한시 작품은 오늘날 한국 한시의 거의 시조격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한국인들의 고려, 조선 시대 시기 뛰어난 한문학 실력은 고구려인에게도 물려받은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인은 매우 문학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입으로 아님 글로 남긴 여러 서사 문학 작품들과, 벽화에 나타나는 별과 천체에 대한 고구려인의 상상력은 한국인의 우수한 언어 감각, 과학적 상상력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한국성의 '치'

조선조 까지 한국 성에는 ‘치’라는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치는 본래 고구려의 성에 있는 시설로 적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은 조선조 시기 지어진 수원 화성에도 잘 나타나는데, ‘치성’이라는 구조물로 남아있다. 한국 축성술에는 과거 우수했던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치’와 같은 축성법은 중국, 일본성과는 차별되는 한국의 전통 축성 기술이다. 이러한 축성술의 계승은 당연히 통일 신라, 고려 시대 고구려 축성술을 아는 고구려인들을 통해 전수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10.씨름, 태권도(수박도)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는 현재 한국의 전통 투기 종목인 씨름으로 보이는 힘겨루기 경기 장면이 나온다. 각저총에 나오는 자세로 겨루기를 하는 경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국의 씨름이 거의 유일하다. 세계에서 고구려의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요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전통 씨름은 본래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전통 투기 종목이었다. 한국의 전통 씨름은 분명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국기 태권도의 기원 역시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마치 오늘날 택껸을 하는듯한 자세로 손으로 무예를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수박도는 고려, 조선 시기에도 행해졌고, 오늘날 태권도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삼국, 삼한 -역사기록

중국, 일본의 어느 전통적인 사서도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기술한 역사서는 없다. 한국의 삼국사기,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 쓰여진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분명한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사서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서술한 것이야말로 고구려가 한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이며 20C 후반에 들어와 중국에 내새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꼬집는 증거이다. 이런 사서의 증거 때문에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가령 중국인들이 쓴 중국어판 위키백과를 보니 조선의 역사의 일부로 고구려를 분명히 기술해 놓았더라.

 

요새 들어 고구려와 동북공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소 시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한국은 고구려를 더 알고 한국이 계승해온 고구려적인 것들을 잘 계승하려고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고구려를 주제로 만들어지는 드라마가 많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일본과 중국 백과사전에 고구려를 주제로 한 드라마 ‘연개소문’, ‘태왕사신기’, ‘주몽’, ‘광개토태왕’ 등이 한국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상세히 실려있었다. 아마 중국인, 일본인들은 그것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나마 한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고구려를 주제로 한 문학, 영상 매체, 음악, 미술 등 문화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역사는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의 것이다.



그리고 이 밑에는,

x자 같은 조선족으로 추정되는 짱개가 고구려가 중국사라 우기다가,

어떤분께 발리게 되는 반박글임.

천남생이라는 똘추가 내가 자기 홍보인력꾼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대는걸 보고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뭐 이것도 홍보는 홍보다. 그런데 내가 이 놈 글을 소개하면 사람들이 천남생의 글에 동조하지는 않는다.

 

(천남생이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szasddse/60134036804

남생이... 내가 지 블로그 열나게 홍보해주는데 나한테 돈 줘야 하는거 아닌가? ㅋㅋㅋㅋㅋㅋ)

대부분의 사람은 미친놈 주장하며 천남생을 욕할 뿐이다. 이 놈은 자기 철학이 전파된다고 하는데 오히려 자기가 비웃음 당한다는 사실은 모르는걸까?

 

천남생을 보니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Q가 생각난다. 자기가 믿고 싶은걸 믿고 그걸 진리라 여기는 놈. 그런데 자기가 믿는 진리라는게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모르는 천남생은 그저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남생이는 내가 지 블로그 홍보인력꾼이라 하는데, 이 인간 x신 인증해서 오히려 내가 미안(?)할 지경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잡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과연 천남생이의 주장이 타당한지 기록들을 검토해보자.

 

내가 소개하는 자료는 『구당서』 「백제전」의 기록이다.

해동삼국은 나라를 연 지 오래되었고, 영토가 병렬해 있는데, 그 땅이 잇닿아 맞물려 있어 … 근대 이래로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드디어 삼한의 백성이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서로 다투어 싸움이 조석으로 이어졌다.

『구당서』 「백제전」

 

여기서 말하는 삼국에 대해 고구려사를 수십년간 연구하신 서울대 노태돈 교수님은 삼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를 뜻한다고 보고 있다. 이보다 앞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을 수행했던 우작이 지은 글을 보면 다음의 글귀가 보인다.

 

황제의 대군이 정벌하니 삼한이 숙청되고, 삼가 천벌을 행하니 밝고 빛나도다

『수서』 권76 「우작전」

 

여기서 삼한은 삼국을 의미하는 동시에 직접적으로 삼한의 일부인 고구려를 지칭하였다. 이 밖에도 수,당대인들이 삼국을 삼한으로 표현한 예는 많다. 이는 삼국을 동질적인 하나의 범주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천남생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중국사가 되려면 당나라는 분명 고구려를 자신들의 지방정권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당은 고구려를 삼한의 범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만약 천남생이 주장하는대로 고구려가 중국사에 귀속이 된다면 당연히 삼한의 범주에 포함된 신라 역시 중국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신라민족론, 신라정통론을 주장하는 그의 주장과 정면 배치된다. 한마디로 천남생은 지 스스로 자기 논리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더군다나 천남생식 논리에 따르면 당 고종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대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했으니 신라 역시 당의 지방정권이고, 신라역사는 중국사에 들어가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주장은 안하는지 본인으로서는 금시초문이다.

 

 

당나라 사람 안사고는 한서 고조기 4년 8월조의 北貊燕人 來到梟騎助漢 이란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남겼다.

 

貊은 동북방에 있다. 삼한의 무리들은 모두 맥족이다

 

이는 당나라 사람들이 삼국인을 맥족 즉 같은 족속으로 파악했다는 근거다.

안사고의 언급은 삼국인 모두가 맥족인지를 떠나 삼국이 같은 족속이었다는 중요한 문구다.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삼한이라 표현한 것은 삼국을 사회적, 문화적, 종족적으로 동질적인 국가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중국과 다르고 유목종족들과 다르며, 왜와 구별되는 동질적 족속으로 삼국인을 인식하였음을 말해준다.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예맥족을 중국의 古민족이라 규정짓는다. 천남생 역시 고구려 근간을 이룬 맥족(예맥족)을 발원지가 중국 북경 인근이라며 맥족을 중국계라 규정짓는다.

 

그런데 이 자는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에 출토된 '진솔선예백장인(晉率善濊伯長印)'이란 도장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도장의 발견은 예족 즉 예맥족이 만주지역에서부터 한반도 동해안 지역을 거쳐 경상북도 영일만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거주했음을 의미한다. 예족이 오늘날 중국 영역에 살았기 때문에 중국의 고민족이라는 논리에 따르면 우리민족이 중국인이란 건가?

 

근래 평양 낙랑 고분에서 기원전 45년인 초원 4년 낙랑군 각 현 호구에 관한 내용을 담은 목간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를 소개한 연구논문을 보면 이 지역 주민의 14%가 한족이고, 절대 다수인 86%가 토착민이라고 쓰여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 고구려가 중국인이라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천남생은 고구려 유민, 발해 유민 대다수가 당에 끌려갔든가, 발해 멸망 후 요, 금대에 중국방면으로 이주되든가 하여 다수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한족에 흡수, 동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인 다수, 발해인 대다수가 중국지역으로 끌려가 한족으로 흡수된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거란에 끌려간 발해인들 대부분은 전쟁포로, 강제로 끌려간 이들로 압도적 다수인 한족의 바다에 소리없이 흡수 동화되었다. 그런데 이를 가지고 고구려, 발해를 중국사라 규정짓는건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만약 고구려, 발해사가 중국사로 귀속이 되려면 중국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인들에 의해 고구려의 역사, 문화, 풍습이 이어져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것은 결국 이들에 의한 역사계승의식이 성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한반도로 넘어온 고구려인, 발해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인, 발해인이라는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조선이 단군과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 규정짓고, 고구려 시조 및 영양왕에게 제사를 지낸 점, 고구려를 선조 국가라 그들 관찬 사서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했다는 것은 이는 고구려 유민에 의해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렷이 강하게 나타나 이어졌다는 방증이다.

 

중국사서를 보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라 기술한 예는 없다. 만약 중국 사서 어디에 고구려사를 자국사라 기록한 사서가 있다면 모를까?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역사계승의식을 우리 한국인들이 강하게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포로들은 고구려의 문화,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한반도로 넘어온 고구려 유민,발해 유민들은 고구려 문화를 강하게 남겼다. 고구려 성의 방어구조 치, 온돌, 주심포 양식 등은 고구려가 우리에게 남긴 문화유산이다. 이런 고구려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이어졌다는 것은 중국은 이를 잇지 못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하나의 방증이다.

 

천남생은 치가 중국이 계승했다고 하는데 장안성, 낙양성을 빼고는 치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려, 조선시대의 성들에는 치의 흔적이 다수 보인다. 천남생 같은 꼴통은 일부를 가지고 마치 전체인양 호도를 하고 오류를 범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한반도에 산재된 고려, 조선시대 성들에는 치가 보이고, 중국에는 일부 10 손가락 안에도 못드는 성들에 치가 보인다. 그럼 치가 중국 그것도 10 손가락 안에 못드는 곳에서 발견되니 치가 중국의 문화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천남생 저 놈 대가리의 한계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이런 오류를 국어 시간에 의도 확대의 오류라며 배웠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치가 고구려의 독특한 성 구조이자 이것이 한국 성 고유의 특징이라 한다. 아니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학자, 교수는 다 거짓말쟁이고 대가리에 똥만 든 천남생 새끼가 진리라는건가? 이 놈이 역사학을 수십년 연구한 사학자, 교수들보다 낫다고 누가 장담하는가?

 

이건 마치 5살짜리 꼬마애가 대학생에게 내가 너보다 수학, 영어, 과학, 역사 더 잘알아 하는 것과 다를게 뭐란 말인가?

 

그리고 이 새끼 주장대로라면 아리랑을 자기네 문화로 등재시킨 중국이 우리민족이 된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이 새끼 논리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허접한 쓰레기 수준이다.

 

 

1980년대까지 중국인들 즉 한족들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기술한 예는 없다. 오히려 중국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후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새외지역, 변방지역이라며 중원과 구분지었다. 이는 중국의 역사계승의식, 영토의식이 만리장성 이남에 국한되었다는 증거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한 나라의 성격을 기술할 때는 그 나라가 존립할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논하여야 하는 것은 역사연구에서 기본적인 원칙이다. 중국이나 천남생이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이 놈들 논리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 사는 백인, 흑인들이 인디언을 영국사로 흑인사로 넣어도 된다는 논리와 다를바가 없다.

 

멸망 후 오랜 뒤의 어떤 결과를 가지고 소급하여 그 나라의 성격을 운위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삼한', ;해동삼국'등의 표현으로 수, 당대인들은 고구려를 백제와 신라와 함께 한 범주로 파악하였다.

 

천남생 논리대로 소아시아 반도 에게해 연안에 있었던 트로이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 이 지역이 터키공화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터키사에 속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역사학이 아니라 영토 주권을 내세우는 정치논리이다. 만약 터키가 이런 주장을 하면 세계 역사학계에서 터키의 주장을 인정할까? 아니다. 오히려 비웃음을 당할 뿐이다.

 

천남생과 중국학계가 하는 꼬라지가 바로 이와 같다.

 

그리고 천남생 이 놈은 발해 수십~수백만이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혈통적 계승이 강하다고 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수천 만에서 1억(송나라 때 중국인구는 1억을 넘었음)에 대한 수백만명의 비율과 210 만명(송사에 기록된 고려 인구)에 대한 10~수십만(일부에서는 수십만이라 봄)의 비율 중 어느게 혈통적 계승성이 높을까? 당연히 후자다.

 

오히려 한국은 고구려의 것을 많이 계승했다. 고구려의 악기 거문고, 고구려의 문학인 별주부전, 그리고 평양이라는 역사도시 등 말이다. 평양이 고려를 지나 조선때까지 제2의 수도로 중시된 것은 바로 강력한 고구려 계승의식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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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k 11-12-04 22:16
   
이것말고도 씨름, 산삼, 청국장, 너비아니(맥적), 모시옷, 상투, 옹기등등...

우리 한국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는, 나같은 일반인이 아는것만 수없이 많은데..

그에 반해서 좃족이랑 중국은?ㅋㅋㅋㅋㅋ
월하낭인 11-12-04 22:17
   
- 작성자 닉네임이 멋지군요.
달나라사과 11-12-04 22:19
   
ㅋㅋㅋ 반박글이 어떨지 궁금하다 ㅋ
MoraTorium 11-12-04 22:21
   
이렇게 길게 말해줘도 조선족들~
읽지도 않을게 뻔합니다.
아니... 읽어도 이해 못합니다. 이해 안할겁니다.
그게 중화사상입니다.ㅋㅋㅋ
안녕여러분 11-12-04 22:25
   
조선족 '넉자' 씨는 불리한 글에는 댓글조차 달지 않음 ㅋㅋㅋ
말하다 안되면 정신승리하고 끝임 ㅋ
헤밀 11-12-04 22:25
   
반박이라는 가치를 가질 필요도 없는 억지를 달죠.
호야 11-12-04 22:31
   
잘 읽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