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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25 20:10
임진왜란 이겨도 이긴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글쓴이 : 샌디프리즈
조회 : 1,059  

일단 조선땅에서 왜군과 치고 박고 싸우고
 
조선양민들이 왜군한테 많이 학살당하고
 
그냥 조선이 왜군을 조선땅에서 몰아낼수 뿐
 
조선땅만 황폐화 초토화 됐습니다.
 
 
그것도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일본에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의지가 없어서 철수를 한거뿐입니다. (왜군 보급이 이순신 장군 때문에
 차질 있었고 전쟁이 장기간 되면서 왜군들도 많이 죽었지만)
 
일본이 전쟁할 의지가 더 있었다면 왜군들 계속 보낼수도 있어겠죠
 
 
이순신 장군이 방어 하고  있는 해역을 피해서 다른 해역루트를 이용해서
 
보급과 왜군들을 추가적 계속 보낼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명나라가 진짜 수십만명 대규모 병사를 조선에 파병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명나라가 초기에 조선땅에 지원하게 고작 5천명 이였죠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그나마 왜군들 보급에 지장을 준것도 사실이지만
 
왜군들이 이순신과 대결 안하고 우회해서 조선의 다른 해역으로 가서 상륙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이순신을 잡으려다가 보니 피해가 좀 컸죠
 
 
우리조선이 진정 이긴거라 한다면  왜구땅으로 역공 해서  왜구땅을
 
반대로 초토화 시켜서야 했습니다.
 
 
단지 조선땅 방어에  성공했을뿐 입니다
 
그리고 명나라 개입도 왜군들 한테는 부담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명나라군 대표 와 왜군대표와 회담해서 종전 합의를 본것도  쓸슬 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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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gbearer 14-01-25 20:15
   
사실상 임진왜란 이후에 이미 세력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조선은 그 후로 계속 쇠퇴의 길을 걸었죠. 뭐 한때 영조 정조 때는 르네상스였다 막 띄워주고 그랬습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당파 싸움도 엄청나고 역모 사건도 많고 가뭄도 자주 들고 세종 때와는 비교불가입니다.
몽키헌터 14-01-25 20:19
   
일본이 전쟁할 의지가 더 있었다면 왜군들 계속 보낼수도 있어겠죠...

글쎄요.. 그 당시 토요토미가 병사하고 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가 남겨진 상황에선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려웠습니다.
관동지역에 세력을 온존하고 열도통일의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에야스의
뒷통수치기가 겁나는 상황이다 보니, 히데요시의 충복이자 심복인 미쓰나리 등의 왜장들은
명분만 주어지면 하루라도 빨리 철병하고 싶은 상황이었다는...
허각기동대 14-01-25 20:21
   
침공자의 개전의도가 돈좌되었으니 승리로 보는게 맞습니다. 조선의 항복을 받고 조선군을 흡수해서 대륙으로 뻗어보겠다던 야망이 이뤄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페르시아가 펠레폰네소스전쟁을 일으켰을때 서로 적대시 하던 도시국가 어디도 단독으로 방어할수 없었고 힘을 합쳐 다리우스를 막아냈지만 그렇다고 페르시아의 판도가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도시국가들의 승리라고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샌디프리즈 14-01-25 20:23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조선이 피해가 막대했다는 겁니다.

일본은 단지 왜군들만 죽은걸로 피해를 보고 

도자기 기술자 조선인 도공들을 납치하고

결국은 일본땅은 하나도 안 다치고 무사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실질적인 득과 실의 승리를 말한 겁니다
          
허각기동대 14-01-25 20:31
   
원래 방어전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터전이 전장으로 변하기 때문이죠.
피해로 치면야 연인원 천만이상 살육당하고 소련의 핵심 곡창지대가 완전 피폐해지는  대피해를 입었던 소련만한 나라도 없었찌만 미국의 막강한 원조와 사람밀어넣기로 결국 방어에 성공합니다.

물론 소련은 역으로 독일까지 들어가긴 합니다만 만약 일본도 섬이 아니라 연륙국가였다면 아마 당연히 전선을 돌파했을수도 있어요. 임란은 실제 전투기간은 짧고 대부분의 기간이 소강상태였던 전쟁입니다. 그 사이에 수군을 모아 왜를 쳐야한다는 공론도 적지않았지만 현실적 어려움때문에 포기하게 된거지요.  어쨌건 지도부가 건재하고 침공군이 완전히 물러난 시점에서 승리라고 보는게 온당합니다.
     
샌디프리즈 14-01-25 20:25
   
솔직히 임진왜란 종전도

풍신수길의 죽음과  명나라 개입이 더 컸습니다 .

물론  이순신장군과  그외에 조선의 민군과 병사 장성들의 활약도 컸지만

이게 종전으로 가는 결정인것은 아니였다고 생각합니다.

풍신수길죽음,명나라 개입 결정적으로 작용한듯 합니다
          
허각기동대 14-01-25 20:35
   
히데요시가 사망한 시점이 좋은 핑계거리가 된거지요. 여력이 남아있고 조선정복의 가능성이 높았다면 히데요시가 죽건말건 전쟁은 지속되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전쟁지속가능성은 낮아있었죠. 힘이 달려 도망친겁니다 결론적으로.

명나라의 원조는 당연한걸수도 있습니다. 명나라 또한 왜의 진격속도와 조선의 너무 급속한 도성함락으로 정명가도의 기치를 내세운 왜와 조선의 사이를 만력제조차 심각하게 의심할정도였으니까요. 명의 원조는 도움의 측면과 사실확인의 측면 감시의 측면도 있는 다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굿잡스 14-01-25 20:31
   
그리고 명나라 개입도 왜군들 한테는 부담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명나라군 대표 와 왜군대표와 회담해서 종전 합의를 본것도  쓸슬 합니다

>>>


도리어 명의 원군 요청이 임진왜란을 장기적으로 끌고간 주요인이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선의 제승방략체재는 초기 일시에 대규모 기습전에는 취약했지만 왜군이 한양을 함락하고 평양성

일대로 치고 올라갈때 점차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가동되기 시작.

다만 조선 선조가 너무 다급히 밀리다보니 명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이게 도리어 결과적으로

조선에게 독약으로 작용. 명과 왜간의 협상으로 고립된 왜군을 일시에 전멸시킬 기회를 놓치게 되면서

보급도 끊기고 고립된 왜군이 안전하게 남하할 수 있게 했고

나아가 명나라는 자체 식량을 가져오지 않아서 대규모로 모이기 시작한 조선군대를 도리어

해체시키고 당시 그래도 전라도 곡창지대는 평작을 해서 나온 쌀이 고스란히 명나라 군사들

배불리는데 사용. 그러나 명나라는 전혀 적극적 왜군 격퇴는 관심도 없었고 조선내에서

패악질에 도리어 이순신이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으로 왜성을 쌓고 수비하던 왜군을

일격에 밀어버리려는 양동작전에서 명나라는 내내 뇌물만 쳐먹고 시늉만내다 보니

이후 수비로 쳐박혀 있으면서 전쟁은 지루한 장기전화되어 버림.

만약 제승방략체재로 가동된 대규모 육진의 조선군과 수군의 이순신 함대의 연합으로 일거에 밀어

붙였으면 전황은 조선에게 매우 빠르고 유리하게 돌아가서 이겼을 것이나 이렇게 장기화됨으로써

수년간 농토를 개간하지 못하면서 생긴 토지상실 및 왜군이 현지에서 보급을 챙기기 위해

백성들을 노략질쳐하는 패악질등 피해가 극심해졌음.
모래곰 14-01-25 20:40
   
충무공을 잡으려고 고집한게 아니라 그 루트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나름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전 국토가 배를 만드려고 민둥산이 됐다죠.
상식적으로 그렇게 갑자기 군대를 동원했고 지속했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죠.
그리고 노동력의 극심한 부족이 겹쳐서 조선포로의 송환에 저항했었죠.
결국 도요토미 정권이 바뀌었고 이건 조선침략의 주체가 소멸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나라의 체제에 있습니다.
조선은 임금이 도성을 비워도 각지의 장군과 의병장들이 자발적으로 싸우는 반면에
일본은 히데요시가 빈틈을 보이면 바로 뒷통수를 칠 상황이였습니다.
이런 요소도 전력에 추가시켜야 좋을 항목이죠.
일본도 한계까지 덤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 편에 서서 도쿠가와와 싸운 사츠마는
강하기로 유명한데도 큰 활약이 없었는데 그 이유가 후퇴할 때 충무공에게
대파를 당해서 군대가 무너진게 이유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히데요시 생전에도 정적인 도쿠가와가 넘버 2로 굳건히 버티는 상황이였죠.
당시 조선출병을 했던 왜장들도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히데요시가 워낙 고집을 부리니
저항을 못했고 히데요시의 참모들과 서양 선교사들도 조선정벌을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이게 정권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이미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당시 수십만명을 동원할 힘도 없었죠.
얼마 후 누르하치 토벌에 동원된 병력이 7만입니다.
조선과 해서여진에게 원병을 요청해서 합 10만으로 싸웠죠.
이때 동원된 조선과 여진의 병력이 명나라 군대보다 훨씬 장비가 좋았답니다.
그런 시절인거죠.
     
aviation 14-01-25 23:29
   
누루하치애들이 장비가 좋았던건 아니었을꺼에욤 왜냐하면 명나라에서 토벌군이 올라갈때쯤이면 명나라꺼 장비등을 처묵처묵한게 많았거든요;

누루하치가 거병해서 명나라 처들어가니 아시겠지만 싸우지도 않고 무조건 항복했던 명나라 장군들이 초반에 쫌됬거든요;
 
누루하치의 군사적 재능은인정하지만 내정은쪽은 그짦은 시간에 전병력이 명나라보다 좋은 장비를 보급할수는 없다고 생각함요~
          
모래곰 14-01-26 01:04
   
제가 쓴 전투는 사르후 전투입니다.
이때 후금의 군사는 3만~5만으로 봅니다.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모조리 끌어 모은 숫자죠.
문제는 명나라 군대의 질이 그보다 형편없었다는 겁니다.
군량도 제대로 준비가 안됐고 갑옷의 질도 형편없고
웃긴건 화포도 제대로 준비가 안됐다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못한거죠.
오히려 조선군 1만 8천이 군비는 착실하게 준비된 군대였습니다.
조총병의 숫자도 많고 질도 훌륭하죠.
해서여진의 기병 1만도 당연히 질이 좋았겠고요.
명의 군대는 질도 나빴는데 지휘관들이 서로 사이가 안좋아서
협공이 아니라 서로 나대느라 각개격파를 당했답니다.
조선군은 명나라 지휘관들의 다툼에 후금에게 어이없게 당했고.
그리고 도자기 교역으로 일본이 이득을 봤지만 그게 근대화에 엄청난
도움을 준게 아닙니다.
물론 일본보다야 조선의 피해가 막대하지만 그게 훗날의 차이가 벌어진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viation 14-01-25 23:37
   
지도 샌디님이랑 생각이 비슷하네요;
일본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으로 부를정도로 도공납치했지욤
덕분에 일본서는 도자기기술의 발전>> 서구 열강과의 교역>> 근대화에 일조

일본도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만요
당시 울나라인구가 확줄었는걸루 알아욤
그에비해 일본은 사무라이나 군인들만 죽어나갔지욤

고로인해 전후복구시간조차도 차이가 많이나는 걸루다 알아욤
울나라 : 인구감소에 의한 세금저하, 노동력 부족등
일본 : 인구감소 미비 세금보존, 도자기발전, 인신매매에 의한 교역량 증가
거기다 기반시설차이까지 하면 이겨도 이긴게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케든 큐슈정도는 먹어줬어야 ㅠㅠ(지 갠적인 생각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