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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08 21:00
지방민들의 서울 상경의 역사 (출처-디시인사이드 이전 정치, 사회 갤러리)
 글쓴이 : 살사사라도
조회 : 556  

1. 625 전후의 이북 피난민.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민들이 내려왔는데 평안도민들이 부유한 자본가나 지식인들이었던 데 비해서 함경도민들은 좀 어려웠음.
그래서 평안도민들이 가지고 내려온 재산으로 순조롭게 안착한 반면 함경도민들은 억척스럽게 개고생 하면서
당시에는 변두리였던 마포, 보광동, 마장동 쪽에 자리를 잡았음. 

나중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무시를 당했지만 전쟁 직후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그런 처지였지. 서울에서 온갖 험한일은 다 했으니까. 
흥남부두에서 피난선을 타고 부산 및 경남 지역에 정착한 함경도 사람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였음. 부산 인구의 약 10%가 함경도 출신.


2. 서울 상경 1세대.

피난민과 다르게 일제시대부터 교육과 취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 온 남쪽지방 사람들인데 나중에 대규모로 올라올 2세대들에 비해서
비교적 여유가 있던 사람들이었음. 비평준화 시절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유지들의 자녀들이 많았고
하숙을 하거나 요즘 강남에서 교육을 목적으로 전세를 사는 것 처럼 가족들이 모두 올라 와서 생활하는 집들이 많았음.
날품팔이 노동자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역에서 가까운 염천교, 중림동 쪽에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고 나중에는 청계천으로 확대됐음.
한편 마포 지역은 예로부터 물류의 중심이라 지방민의 이주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지역인데다가
서울 4대문 안의 상업지구의 배후지역이자 전차의 종점으로 자연스럽게 슬럼이 형성되었음.

이때만 하더라도 경상도나 전라도나 충청도나 별 구분이 없었고 그냥 서울내기와 촌놈으로 나뉘던 시절이었음.


3. 서울 상경 2세대.

60-7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서 서울 변두리 곳곳에 공단이 세워지면서 지방민들 대거 상경.
전쟁 피해를 겪지 않아 산업기반이 비교적 온존했고 차후 공단 조성이 이루어 진 경상도 지역이 농촌을 떠난 노동력을 자체 흡수 한 반면.
자체 흡수할 공단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 지방의 이주자들은 소수가 경상도로 이주하고 대다수가 서울로 상경.
충북 단양, 전북 무주, 장수의 지역은 구미나 대구로, 강원 강릉, 삼척, 울진(한 때 강원도였음) 지역민은 포항, 울산으로 이주했음.
전남 지역민들은 경전선을 따라서 부산, 경남권으로 이동.

당시 서울 4대문 안에서 생산직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이주민들은 주로 한강 이북의 은평과 강북, 동대문, 용산, 마포에 거주했고
성수공단에 취업을 한 노동자들은 성동, 동대문에, 구로공단에 취업을 한 노동자들은 관악, 영등포, 구로에 거주했음. 

청량리역이 있는 동대문이 강원도와 경북 북부 출신의 이주민들의 비율이 비교적 높았던 반면
나머지 지역은 충청도와 전라도 이주민이 압도으로 많았음.

이 시기부터 지방색이 나타나고 호남향우회 같은 출신지별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함. 


4. 확산

서울 외곽의 인천, 부천, 성남, 안양, 의정부 등 위성도시가 발달하고 공단이 조성되면서 이주민들의 숫자도 늘어나고 확산되기 시작하는데.
다른 도시들이 기존의 전통 촌락을 기반으로 하여 확장된 데 비해 성남은 좀 독특한 케이스였음.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를 놓고 상가를 조성하면서 빈민들을 무작정 강제 이주시켜서 만든 도시인데 워낙 졸속으로 밀어부치다가 사건이 터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말 그대로 철거민들을 던져 놓은 수준으로 이주를 시켰고 폭동이 일어났음. 광주대단지사건으로 검색. (당시 광주군이었음)
당시 청계천은 서울의 슬럼 중에서도 최악의 슬럼이었고 여기에서 밀려나고 성남까지 가기를 거부한 빈민들은
상계동, 난곡, 봉천동, 월곡동, 시흥동 같은 산동네서부터 목동 같은 습지대로 이주하여 판자촌을 건설했음.
여기에 뒤늦게 상경한 후발자들이 이러한 판자촌으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서울의 대략적인 모습을 갖추게 됨.
한편 부천, 안양 등지에서도 공단 조성과 함께 인구 유입이 꾸준하게 이루어졌는데 역시 주축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이주민이었음.

인천의 경우는 좀 독특한데 625 이후 황해도와 개성 지역의 부유한 피난민들이 많았고 이들은 부촌인 숭의동이나 제물포에 자리를 잡음.
(인천 송도 고등학교는 개성에 있던 명문고였다가 인천에 와서 망한 케이스, 옹진반도 연대장이었던 평안도 출신 백인엽이 세운 선인학원)
신포만두, 세숫대야 냉면 등 평안도, 황해도의 서북지역 음식이 값싸게 대중화 된 것들임.
이들이 이주민 1세대이고 2세대는 충남 서산이나 당진에서 배를 타고 올라 온 이주민들이 있음. 이들은 인천 구시가 슬럼 지역에 자리 잡음.
나중에 부평 공단과 남동 공단이 개발 되고 서울을 배후로 하는 베드타운화 하면서 3세대로 전라도, 충청도 이주민들이 들어 옴.
그래서 인천 구시가와 부평, 남동 쪽은 성격이 많이 다름. 정치적 성향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선거 결과에서도 나타남. 
인천이 역대 선거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왔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임. 

당시만해도 강남은 과수원만 있던 허허벌판 동네. 서울에서 가장 뒤늦게 베드타운으로 계획 개발된 신도시라 중산층 주거지로 시작할 수 있었음.
서울 강남에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들 하는데 강남 개발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음. 
서울 4대문 안에 살던 여러 지역 출신의 중산층이 들어 왔고 강남의 경상도화가 되기 시작한 것이 대구 지역의 경제가 작살난 이후임.
당시 대구의 갑부들이 지역 경제가 파탄이 나자 자본을 서울로 올려 버렸고 주로 강남 부동산에 투자를 했음.
자녀 교육과 맞물려 이 시기에 상경을 한 사람들이 제법 많음. 하지만 그래도 강남의 주축은 서울 토박이들임.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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