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가 ‘일본군 전몰장병 충령탑’을 완공해 봉헌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1945년 6월 23일자 2면). 충령탑에는 조선군관구 전 사령관이었던 이타가키 세시로 장군의 휘호가 새겨졌다.
봉은사가 과거 ‘일본군 전몰장병 충령탑’을 설치하고 중일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법회를 여는 등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한 대표적 친일 공간(표 참조)이었던 것이였습니다.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킨 대표적 공간을 역명으로 확정=불교는 개신교나 천도교와 달리 일찍부터 식민지배 체제에 편입됐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불교계를 포섭·통제하기 위해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고 31개 본산을 중심으로 1500개 사찰, 7000여명의 승려를 통제했습니다. 봉은사 범어사 통도사 등 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부 총독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었으며, 본산이 지역 말사를 모두 관리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당시 불교는 자연스럽게 식민권력의 통제 아래 놓였었죠
봉은사는 서울과 경기도 광주·시흥·고양·여주·이천에 있는 82개 사찰과 암자를 말사로 관리해 31개 본산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찰로 손꼽혔습니다. 1912년부터 45년까지 봉은사 주지를 지낸 승려는 나청호 김상숙 강성인 홍태욱으로 이들 4명의 이름은 불교계에서 출간한 ‘친일승려 108인’(임혜봉)에 나올 정도로 대표적 친일인사였습니다. 특히 강성인과 홍태욱은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등재될 만큼 친일에 앞장섰던 승려이죠. 이들은 창씨개명도 했습니다.
1930년대부터 친일행사 본격적으로 개최, 일제의 민중 정신개조·전쟁승리 기원=봉은사에서 친일행사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일제가 무력통치를 강화한 30년대부터입니다. 1934∼1940년 봉은사 주지였던 강성인 승려는 우가키 조선총독부 총독이 주장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을 전 조선 불교도가 적극 협력하도록 1935년 7월 심전개발사업촉진발기대회를 개최했었죠. 이 운동은 ‘조선 민중을 일제 통치에 협력하도록 순화시킨다’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봉은사에선 중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2차례 개최했으며. 봉은사는 그해 8월 임시 본·말사 평의원회를 열고 일본군을 후원하는 방안을 토의했고, 봉은사 명의로 9월 국방헌금과 출정 장병 위문금을, 12월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금을 200원씩 냈습니다. 1938년에도 국방헌금과 위문금으로 총 1016원을 냈습니다. 당시 노동자 1년치 연봉은 130원가량 되고요. 1938년 7월에는 승려와 신도 100명을 모아 ‘지나사변 1주년 전몰장병 추도법요’를 열었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으로 부른죠. 39년에는 일왕 생일인 천장절(天長節)도 지켰습니다.
1940∼1945년 봉은사 주지였던 홍태욱 승려는 일제 강점기에 주지를 맡았던 4명의 승려 중 친일에 가장 앞장섰습니다. 그는 41년 봉은사에 소속된 신도 3만명과 ‘일본군 전몰장병 충혼위령제 및 수륙제’를 거행했고, ‘중일전쟁 4주년 기념법회’ 등도 개최했습니다. 본·말사를 동원해 일장기가 그려진 부채 2000개를 위문품으로 보내는 운동을 전개했고 일제 침략전쟁용 무기를 만들기 위해 철제류 수집·헌납도 결의했습니다. 봉은사는 43년 ‘일본군 전몰장병 충령탑’ 공사에 들어갔으며, 광복 2개월 전인 6월 제막식을 거행했으며. 이곳에선 전몰장병의 명복을 비는 천도제 등이 열었었죠.
나청호 김상숙 승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친일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나청호 승려는 1914년 일본 왕비인 쇼켄의 추모식을 개최했고. 1917년 일본 시찰 때 일왕을 요배했으며,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직접 찾아가 선물을 주는 등 친일행위를 했습니다. 데라우치는 제3대 조선통감으로 한일병합을 성사시킨 인물이죠. 김상숙 승려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주지가 된 인사로 데라우치 등 일제 핵심인사의 통역을 맡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