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보니 두서없게 내용이 깁니다. 전 무신론자임을 밝히고 들어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하느님 등의 명칭은 야훼로 통일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독교의 교리는 사랑이 포함된다 볼 수는 있습니다만
결국 그건 주요 교리인 믿음(즉 구원)을 포장하기 위한 부수적인 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단 십계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 열 가지 중에서
살인, 절도, 거짓 증언만이 타인에 대한 비윤리적 대우를 금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대부분은 안식일 준수, 우상숭배 금지,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하지 말 것 등과 같이 종교 의식과 믿음에 관한 방식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논리를 보면 재밌습니다.
기독교는 사회를 만성질병에 걸리게 하고 나서, 그것의 치유책으로 기독교를 제시하는 식입니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야훼와의 약속을 어기게 되어 (불복종)
그 자손에게까지 이어진 죄라는 원죄라는 틀을 씌웁니다.
그리고 그 원죄를 벗고 구원을 받으려면 기독교를 믿어야한다고 말합니다.
광고주들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기독교와 똑같은 심리 전술을 활용합니다.
(1) 당신에게는 문제가 있으므로
(2)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 상품이 필요하고
(3) 다른 경쟁 상품들은 당신을 실망시킬 뿐입니다.
당연히 기독교의 교리는 믿음이 주가 됩니다.
예수의 실재 존재 여부를 떠나 예수가 몇 구절 사랑을 설파하긴 했습니다만
후에 사도 바울이 유대교 율법을 거부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삼아 만든게 기독교의 시초입니다.
그런 바울의 일반적인 말은 '사죄'였습니다.
구원을 얻는건 야훼의 눈에 들어 죄가 사해지는 것이라며
그는 사죄는 결코 선한 행위에 의해서 획득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실로 자기들이 쌓은 선한 행위가 야훼의 애호를 받게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자들이며
그러한 자들은 자기들의 내적 본성의 타락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은총의 필요를 마음 깊이 느끼지 못할만큼 교만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죄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온다며
신앙이란 지성의 활동이라기 보다는 의지의 활동이요,
야훼의 성령의 힘과 인도를 주저없이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카톨릭에선 그래도 이성을 도구로 신학의 근거를 세우는 철학을 꾸준히 이어왔지만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더욱 믿음에 치우쳐집니다. (서양 사상사 대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루터와 그 이후 신교 지도자들의 견지에서 보면
이성을 신뢰함은 인간의 외람됨을 나타내는 증거라며 배척해왔으며,
원죄의 남은 흔적이라며 멸시하였습니다.
신교는 맹신주의로의 경향이 강해지고 이성을 멸시해왔는데
신교의 종교개혁은 여러가지 중요성을 가지지만 정상적인 운동은 아니었다고 평가됩니다.
그런 맹신주의로 인해 신교에서는 카톨릭에서 보여줬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다른 스콜라 철학자 수준의 신학자가 나온 일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에 가거나 TV를 보며 목사와 전도사 들을 한번 지켜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전지전능한 신께서 진짜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선택해서 대변인으로 삼았을까?"
바이블은 실제로 "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1서)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린도전서)고 말하고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희들의 주인인 나는 시기하는 하나님이다"(출애굽기)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는 수억명의 비기독교인들을 지옥에 빠뜨려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처녀는 너희들이 차지할 몫으로'살려두지만,
점령당한 약속의 땅에 있던 아무런 죄도 없는 남자들과 여인들과 사내아이들을
몰살하라(민수기)는 명령은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이블에서 사랑을 언급하는 챕터는 지극히 적습니다.
마태복음 몇줄, 고린도전서 몇줄, 요한 복음 몇줄 등등
다 합쳐야 그 두꺼운 바이블에서 몇페이지도 안됩니다.
하지만 협박 명령하며 저주와 살인으로 신앙을 강조하는 내용은 대부분을 이룹니다.
목사들이 교회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항상 거기서 거기인게
바이블에서 신도들에게 좋은 말로 포장해서 읽어줄만한 내용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전도서, 마태복음, 고린도전서, 잠언 ..
전도서와 잠언은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많이 언급합니다.
(확대해석, 유추해석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예로 자식을 죽일 의지를 가질만큼 믿음을 강조하고 싶을때 언급합니다.
기독교는 유일신교로 타 종교를 배척하는게 기본 교리입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주요, 사랑은 그 이후의 교리로 포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대로 교리를 왜곡하고 합리화하여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천박하고 모순된 교리에 대한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검증도 불가능한 원죄를 들어 지옥불 협박으로 시작한 종교기에
그 어떤 부수적인 교리로 포장하려 해봐야 그 천박함이 전부 가려지진 않습니다.
굳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세뇌당한 내용을 옳다고 말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의지 등을 합리화 수단으로 쓰는건 좋지 않습니다.
그냥 벗어버리는게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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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쓰자면 종교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과학처럼 여러사람에 의해 검증되는게 아닌 계시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오컴의 면도날' 원리를 들어보죠.
"검증할 수 없는 가설들을 경험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온갖 야훼에 대한 논증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있어보이지만
모두 다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우리는 세계를 관찰하지만 세계가 한 필연적 존재에 의존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는 없고,
혹은 세계가 한 필연적 존재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이 존재가 야훼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으며,
설사 이 존재가 야훼라 할지라도 그 신이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시에 의하여, 야훼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만 가지고 따진다면 야훼는 무관심할 수도 있고 적의를 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계시에 의하여, 야훼가 인간들에 대한 그의 은총의 통로로서 교회를 세웠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이성만 가지고 따진다면 야훼는 다른 구원의 기관을 세웠을 수도 있고,
또 전혀 그런 것을 세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계시에 의하여, 야훼가 인간 예수에게서 성육(成肉)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성만 가지고 따진다면 야훼는 당나귀나 돌에게 성육했을 수도 있고
전혀 성육한 일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이 몰락한 계기가 된 스코투스와 오컴의 논증입니다.
열성적인 카톨릭 성직자들에 의한 오래된 논증입니다.
계시는 이성의 짝이 될 수 없습니다. 계시는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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