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는 바로, 아무 대항없이 일본에게 나라를 준 사실이다.
국민들이 독립운동을 하기도 전에 미리 차단하거나, 강력하게 치밀하게 막고,
손쉽게 식민지로 만든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손쉽게 대항하지도 못하고 일본에게 내준 것을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국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만든 역사가 있는데, 그 역사를 주관하고 이끈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있었지만, 모두 중국이나 외부에서 계획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주최하고 계획하며 외부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하며, 일으킨 단체가 바로 기독교와 천도교 단체였다.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형성되자 이들은 불교와의 연합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24일 밤 최린이 한용운의 집으로 찾아가 즉석에서 동의를 받아냈다. 한용운은 시일이 촉박한 가운데 동래의 범어사로 내려가서 주지 오성월(吳惺月과) 이담해(李淡海)·오이산(吳梨山) 등과 3·1운동에 대하여 협의하는 등 영남과 호남의 여러 사찰에 긴급히 연락하여 동지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불교계에서는 한용운 자신과 백용성 두 사람만이 민족대표로 참여하는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