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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07년 7월19일 고종의 강제퇴위하고 순종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정미7늑약(한일신협약/제2차 을사늑약)의 불평등 늑약을 체결하였다.
고종은 단순하게 통감부와 친일내각이 강요해서 퇴위한것 뿐만이 아니었다.
동학지도부 이용구(李容九)가 이끄는 거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벌인 고종 퇴위 시위가 1907년 7월 광화문에서 수차례 있었다.
동학 실패이후에도 조직력은 거대했기에 일본도 자생풀뿌리 친일파 일진회에 대해 조사하고, 송병준,이용구등 면담하고 그들이 진정 합방을 추진하고 있음을 파악한 후, 적극적으로 이들을 손발로 삼고 합방이후에는 식민지 경영의 대리인으로 삼는다.
907년 8월1일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의병봉기 초기인 1907년 10월부터 일진회는 '각지방 폭도형탐진정 총대'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만들고 의병들에 대한 정찰,회유,정보 공작을 일선에 나서서 수행한다.
전국적으로 헌병대보조원으로 일본군,경찰 헌병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항일구국의 신념으로 자생적 봉기를 일으킨 의병은 구체적인 조직화가 불가피하였다.
경북 문경의 거유(巨儒) 이인영(李麟榮)이 총대장으로 하여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의 기치를 내세웠다.
일진회 초기에는 의병의 정확한 인원과 무장상태, 위치와 지리정보를 제공하고 실제 의병과 지원세력들을 일방적으로 토벌,학살한 전투에 참여한다.
의병을 죽인 공으로 상과 훈장을 받고 관직에 임명된다.
당연히 의병들이 악질 친일파 일진회원들을 공격하여 피해가 커지자,일진회는 본격적으로 무장을 한다.
통감부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에 준하는 수준의 우수한 장비와 훈련을 갖춘다.
그리고 1908년 11월부터는 '자위단원호회' 라는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의병토벌에 나선다.
1907년7월~1908년5월사이 의병에 의한 일진회원 사망자가 9,260명이다.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의병토벌이 일본에 의해서 보다 일진회 조선인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까지 많은 사상자를 내며 의병을 토벌한 진짜이유는 지켜야 할 기득권과 새로운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1905년 12월부터 관직에 임명된 일진회 회원들은 합방이후 조선 전국의 모든 관직을 독점하였다. 오히려 이완용이 거대해지는 일진회의 세력 팽창을 막기도 하였다.
이들은 토지와 재산을 형성하여 일제 식민지 기간동안 거대한 부와 친일 네트워크를 통한 사회지배세력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