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명의 학생들이 그 컴퓨터를 나눠서 써야 했음. 전산실에 학생 교수가 쓸 수 있는 IBM 29 라는 펀치카드 머신이 5-6대가 있는데 그걸 그 수천명이 공유해서 써야했음. 당연히 매일 장사진이고 코딩지에 꼼꼼하게 코딩해서 몇시간이고 기다려 자기 차례가 되면 독수리 타법으로 수백 수천장을 쳐서 (1장 = 프로그램 1라인) 과제를 해야 했음. 카드펀치 대기 큐가 도는데 오후 한나절. 내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은 전산실에서 펀치카드 뭉치를 끼고 펀치 큐에서 대기하면서 흘러감.
하루에 딱 1번 JOB 을 돌릴 수 있음. 만약 세미콜론이 빠져 신텍스 에러면 다음 날로... 하루에 한번 batch job으로 과제를 하고 수천 라인 짜리 학기과제를 해야 했음. 그것도 여러 과목을. 그러니 밤 늦게라도 전산실에 있어야 했지만 시절이 시절인 지라 "보안상의 이유로" 야간에 학생이 전산실이 위치한 본관 출입을 금지함. 다행히 교수님 의 일을 도와주며 교수님 계정(1일 2회 JOB 가능 ) 으로 남보다 더 많은 job 기회를 가져서 그나마 수월했음.
마이크로 프로세서 실습장비로는 SDK-80의 짝퉁 트레이닝 키트가 몇 대 있었음. 16키 헥사키보드에 6개의 LED 가 I/O의 전부 RAM 1KB 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짜서 돌릴 수 있었음. 하지만 1 KB의 프로그램을 짜려면 CPU 매뉴얼로 보며 핸드어셈블, 핵사코드 변환, 일일이 한 바이트 씩 입력 해야 해서 불과 500 바이트 정도의 프로그램 완성에도 2-3 주가 걸림.
그때 Apple II 가 있었지만 비싸서 일반인에겐 그림의 떡. 좀 잘나가는 교수 쯤 되어야 연구실에 한대 있는 정도. 다행히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쟈카드 머신(자수 또는 스웨트 뜨는 기계) 컨트롤 프로그램을 개발해주는 조건으로 Apple II 세트를 빌려와서 실습과 과제등에 활용할 수 있었음.
졸업반이 되니 학과에 PDP-11 이라는 미니컴퓨터가 들어왔음. 메인메모리 256 KB. RK05 이동 하드디스크 (5 MB) 에 Bell lab Unix 7 을 운영했음. VT-100 터미널이라는 신기한 물건이 4대가 들어와 다소 사정이 나아짐. 처음으로 터미널 작업이라는 걸 해봄. 물론 vi 같은 대화형 편집기는 없고 ed 라는 라인별 편집기. 물론 학과 정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긴 대기열은 마찬가지 였지만.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수천페이지의 Unix PWB 문서를 거의 다 읽을 수 있었음. 급하면 decwriter 라는 키보드 달린 도트매트릭스 프린터에서 작업을 하기도 함. 즉 종이 프린터에서 프로그램을 편집했음.
이게 그당시 한국 대학의 최고의 컴퓨팅 환경이라는 것임.
대학원을 가니 실험실에 IMSAI-8080 이라는 마이크로 컴퓨터가 있었음. 트레이닝 키트보다 조금더 나은 수준. 키보드도 없고 ASR-33 이라는 텔레타이프가 있었음. 종이테이프로 프로그램 입력/출력. 이미 프린트로 프로그램 편집에는 이골이 나서 문제 없음. 그리고 놀랍게도 8인치 플로피 디스크도 있었음. Cromemco 라는 S-100 버스 기반 8비트 Z80 컴퓨터가 있었는데 그래픽카드는 없어 터미널로 연결해 씀. 메모리가 64KB + 확장 메모리 64 KB. 워드스타라는 혁신적 문서편집기도 있어서 무려 데이지휠 프린터로 미려한 타이프 활자로 논문도 찍을 수 있었음. 이게 사실 가장 많이썼던 PC.
하지만 그떄 VAX-780 이라는 놀라운 미니컴퓨터가 대학원에 들어옴. 무려 속도가 1 MIPS, 1 초당 1백만개의 명령어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 이건 그당시에도 대기업이나 가야있는 최신 컴퓨터. OS BSD4.2 소위 버클리 유닉스. 여기에 Adm3+ 라는 vt100보다 원시적인(CPU없이 TTL만으로 구성, 텔레타이프용 20 mA 커런트 루프로 연결) 터미널이지만 각 대학원생 2-3인당 1대 정도로 터미널이 있음. 역시 한국최고의 부유한 대학원. 하지만 이것도 기말에 사용자가 몰리니 커서 한칸 이동에 10초나 걸리고 컴파일 한번하면 점심먹으러 갔다 와야함.
그때 제일 많이했던 건 rogue 라는 RPG 게임. 흔히 rogue-like 게임이라는 것의 원조가 된 게임. 사흘간의 사투 끝에 (rogue는 하드코어 모드) 처음으로 Amulet of Yonder 를 획득해 게임을 클리어한 감격은 지금도 잊지못함.
그때 한국 전자오락실에는 갤러거라는 게임이 대인기였음. 또 동키콩 이나 제비우스 또 너구리 같은 아케이드 게임이 대 인기였음. 오락실 테트리스나 신야구 코브라 등은 아직 등장 전임. 일본/미국에서는 임천당이라는 회사의 패미컴이라는 게임기가 인기라는 소식이 잡지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실물을 본적은 없음
그때 LG가 이탈리아 오리베티 M24 PC (8086 CPU + 5인치 FDD 2개 + HDD 없음) 를 들여와 연구실에 몇대 도입함. 또 국산 IBM 호환 PC 가 나오기 시작함. 삼보트라이젬88. 무려 20MB 하드디스크가 달린 비싼 물건.그래픽은 CGA. 원시적 PC 테트리스가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때.
또 이때가 막 국내에 PC가 회사 등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 물론 가격은 셀러리맨 봉급 몇달치. 하지만 PC 는 너무 비싸서 사무기로 주로 팔린게 아니고 바로 3270 터미널 대용으로 주로 팔림. IBM 3270터미널이 너무 비싸니 PC를 사서 IBM 메인컴퓨터에 터미널로 달아 씀.
연구실의 가장 비싼 PC 는 애플 맥킨토시의 선조인 Lisa (1 MB RAM) + Apple HD 5 MB HDD + Apple image writer 도트프린터. 3.5 인치 FDD는 400 KB 용량. 본체 가격만 1만달러로 그당시 중형차 (혼다 프렐류드) 가격. 포르쉐가 2만 달러 정도 였음. 즉 컴푸터 한세트 가격이 폴쉐 가격
그때 마우스와 윈도우라는 걸 처음 봄. 특히 Lisa Draw 라는 객체지향 그림 도구는 가히 혁신적으로 편리한 도구 . 물론 역시 논문쓰는 선배들이 우선권이니 오래 만져보긴 어려움. 무엇보다 놀라운건 그후에 들어온 레이저 프린터... 300 dpi의 활자인쇄에 가까운 출력을 낼 수 있는 프린터로 석사 논문과 그림을 출력할 수 있었음.
뒤이어 SUN 3 워크스테이션도 들어옴. 20인치 흑백 모니터가 무슨 태평양만하게 느껴찜. 이때 막 연구실에 이더넷 (10 Mbps) 가 깔리고 인터넷 (9600 bps) 로 미국과 이메일 전송이 가능해짐. 아직 World Wide Web(1990) 이 등장하기 이전. 몇년후 후배들이 그 머신에서 한국 최초의 MUD (바람의 나라/주라기 공원) 의 원형이 되는 DikuMUD (이브/나라이 머드) 를 돌렸다고 함.
이 때 쯤인가는 아마도 전두환 시대가 끝날 무렵이었을 것인데 PC 에도 EGA 카드가 나오고 윈도우가 나왔는데 Windows 2.0 SDK 으로 인공지능 프로그래을 짜서 석사논문으로 제출하고 학교내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함.
이정도가 아마 전두환 시대 한국에선 제일 부유한 학교의 부유한 연구실의 컴퓨팅 환경이라고 보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