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이전엔 1인 1상을 받는 것이 조선의 문화였다.
이는 수많은 사료에 그림과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고 아직 그걸 기억하는 어른들도 계신다.
위 그림의 여자들도 다 각자의 상을 받았다.
소풍갈 때처럼 상을 여럿 들고 갈 수 없을 때나 대충 겸상했을지 몰라도
일하는 밥 먹는 농부들의 그림을 보면 상도 없으면서도 각자 자기만의 그릇들을 놓고 따로 먹지
한 그릇의 반찬을 공유하면서 먹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평민들도 독상을 받은 것이 문화였다.
이 문화가 바뀐 것은 일제시대 말기부터이다.
밑에 첨부한 1936년도 동아일보 기사에서
외상을 폐지하고 한 상에서 같이 먹으라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공부 좀 한 애들은 알겠지만
이 시대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수탈이 가장 심하던 일제 말기이며
신문사라는 것은 일제의 앞잡이이자 일제의 국정홍보관이자 세뇌 미디어였다.
왜 일제는 외상을 폐지하고 겸상을 유도했을까? 무슨 꿍꿍이로?
일제의 앞잡이인 이 신문에선 남는 반찬 처치 등의 이유를 들고 있지만
과연 그 당시에 궁핍한 삶을 살았던 서민들이 반찬을 얼마나 버렸을까?
오히려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다.
당시에도 반찬을 남기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당시에 상하수도 시설도 현대처럼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반찬 많이 남기면 버리기도 곤란하고 식기 세척에도 불리하다.
옛날에 서민은 3첩 반상이 기본이며 좀 살면 5첩 반상을 받았다.
양반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데 9첩까지도 받았다.
상차림의 수고로움에서 특별히 외국의 식사와 차이나지 않는다.
양반들의 상은 노비를 부렸을테고..
3~5첩 반상은 사실 현재의 급식 등에서 실질적으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태 아닌가?
오히려 한국의 반찬이란 것은 식사 때마다 만들지 않고
한번 만들어두고 그냥 꺼내기만 해서 먹는 것들이 많으니 준비하기 더 편할 수도 있다.
일제 말기에는 온갖 자원을 수탈해가면서
민가의 놋그릇, 수저까지 다 뺏어가던 시절이었다.
민가의 온갖 물건들까지 다 빼앗아가는 바람에
필요한 식기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그를 위한 핑계이자 합리화가
독상 문화를 없애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식기가 냄비 등이 더 부족해고 나눠 담기도 민망한 양의 음식만이 있자
한국의 독상 문화는 사라지고
겸상과 한 식기의 반찬을 같이 먹는 풍습이 퍼지게 되었다.
p.s 고려시대에는 의자를 쓰고 테이블에서 같이 먹었지만
지금 일식당이나 푸드 코트 등에서 하듯이 쟁반에다 음식을 올려두고 먹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