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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30 20:20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일본인들은 수용소행이었습니다
 글쓴이 : 가나다라가
조회 : 2,441  

2차대전 중 미국의 일본인 수용소 스토리

"짐승처럼 끌려간 우리도 '아메리칸'이었다"(신동아 99.10월호)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지 수개월 후, 미국에 살던 일본계 주민들은 모두 수용소로 격리됐다. 남녀노소 구별도 없었고, 미국 시민이냐 아니냐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믿지 못할' 일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3년에 걸친 수용소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쟁에는 이성과 논리보다 감성과 이기심이 먼저 동원된다. ‘전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잔인한 방법들이 그 가능성을 시험받게 된다.

2차대전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사용한 전략은 원자폭탄 투하였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원폭에 노출된 사람들과 그들의 2세, 3세가 대를 이어 겪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원폭을 투하했던 미국 공군 또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실제로 미국인들 가운데는 2차대전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 원폭으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서야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 달가운 것일 수만은 없다. 그래서 원폭 투하의 당위성 여부는 언제나 미국 논객들의 토론 쟁점이 되어 왔고, 지난 몇 년 동안은 미국 언론들이 원폭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일제히 조명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런데 2차대전중 미국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부끄러운’ 전략을 사용했다. 훗날 백악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쟁 중 우리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Our worst wartime mistake)’로 발표되기도 한 이 전략은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사막지대에 세운 수용소로 모조리 격리시킨 일이었다.

얼마 전 국내에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비상계엄’(원제·The Siege)에서는 아랍인들의 테러가 잇따르자 미국 대통령이 뉴욕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키는데, 과대망상에 빠진 계엄사령관(브루스 윌리스)이 테러범 색출을 위해 뉴욕에 거주하는 모든 아랍계 남성들(미국 국적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을 체포해 임시수용소로 격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영화로 봐도 황당한 일이 2차대전 때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재미 일본인 겨냥한 징고이즘

당시에 나온 ‘민간인 격리 명령서’라는 공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모든 도시와 카운티, 캘리포니아…앞에 명시된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전원 1942년 4월7일 정오까지 추방될 것이다. 어떠한 일본인도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이 공문을 손에 쥔 캘리포니아 지역의 일본인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42년 봄부터 일제히 수용소로 격리됐다. 이에 대한 법적 강제권은 42년 2월19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한 ‘이그제큐티브 오더 9066(Executive Order 9066)’이었다. 존 드위트(John L. DeWitt) 장군이 총지휘권을 쥐고 실행한 이 법령의 골자는 ‘미국 시민권자, 영주권자를 막론하고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일본인은 모두 격리시킨다’는 것.

발단은 41년 12월7일의 진주만 공습이었다. 워싱턴에 이미 이를 예측한 보고가 들어왔는데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당한 진주만 공습은 미국을 패닉 상태로 빠뜨렸다. ‘니세이’(미국 이민 2세대 일본인들을 일컫는 말)들은 진주만 공습을 그들이 그후 3년 동안 겪은 수난의 시작으로 본다.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내의 반(反)일본 감정이 극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듬해 봄 격리되기 시작할 때까지 니세이들은 주유소에서 기름 한 방울도 살 수 없었을 만큼 철저하게 따돌렸다. 주유소와 상점마다 ‘일본인 출입금지(Japs are not wanted)’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잽스(Japs)’란 ‘칭크’ ‘조센징’ ‘깜둥이’ 같은 말들처럼 일본인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이다. 그것말고도 일본인들은 ‘미친 개들(Mad dogs)’, ‘황색 쓰레기(Yellow vermin)’ 등으로 불렸으며, 외국 여행도 전면 금지됐다.

신문들도 법석을 떨었다. 진주만 공습 바로 다음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캘리포니아를 ‘위험지역’이라고 경고하면서 “우리 주변에는 현재 수천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다. 그중 일부는 좋은 미국 시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중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고, 일본의 중요한 무기 역할을 하는 배반자가 있을 수도 있다”고 썼다.

이 신문이 41년 12월8일부터 이듬해 2월23일까지 특집으로 다룬 일본 관련 기사의 제목만 봐도 당시 재미 일본인들이 겪었을 위기감을 실감하게 된다. 즉 ‘잽스들의 배에서 메시지를 보내는 불빛이 보인다’ ‘베이 시티에서 카메라 들고 있는 잽스 검거’ ‘일본인들의 토마토밭, 토마토 꼭지가 우리 해군기지를 겨누고 있다’ ‘잽스, 오는 4월 미국 공격 준비’ 등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토마토밭까지 의심하고 그들을 스파이로 모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영향력 있는 우익 칼럼니스트였던 웨스트브룩 페글러는 신문 기고를 통해 ‘이열치열 작전’을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재미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한 뒤 이들 중 100명씩을 골라 총살하는 것으로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감정적인 애국주의, 이른바 징고이즘이 힘을 더해갔다.

백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만 예외

‘민간인 격리 명령서’를 받은 재미 일본인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싸야 했다. 우선 정해진 집결장소에 모였다 거기에서 다시 그룹으로 나뉘어 각 수용소로 이동됐는데, 이때 소지할 수 있게 한 물건은 침구류, 화장실 용품, 의류, 은그릇류와 귀중품들로 제한됐다. 그나마 ‘가져온 물건 모두 캠프로 함께 운송된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고 있었다. 가구나 자동차, 침대 같이 덩치가 큰 물건들은 정부 보관소에 맡겨졌으며, 분실이나 훼손의 책임은 전적으로 소유자가 진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다.

격리 방침이 정해진 지 4개월 만에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일본인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이들 가운데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은 유일한 부류는 미국인 백인 남자와 결혼한 일본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FBI로부터 수사를 받은 뒤에야 예외 적용을 받을 수 있었다. FBI는 수사관들이 가가호호 돌며 이들에게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는가?’ ‘미국을 위해 싸울 수 있는가’ ‘누군가로부터 미국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따위의 질문을 던진 뒤 만족한 답을 들어야 ‘면제권’을 줬다.

이렇게 해서 ‘특혜’를 받은 여성들을 빼고도 12만명에 이르는 수용소 인원 중 3분의 2 가량이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었다는 사실은 훗날 미국이 이 사건을 ‘최악의 실수’라고 인정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니세이’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2차 대전 중 역시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서 일본인들만 격리한 것을 두고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주장이 나올 법도 했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라고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앵글로색슨계 이민자들 외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민자들은 늘 가장 천하게 여겨지는 직업에 종사했고, 저임금과 비인도적 처사에 시달렸다. 기득권자들이 수시로 바꿔대는 법령에 따라 일자리를 잃거나, 징역을 살거나, 미국에서 쫓겨나곤 했다. 아시아계 이민으로 가장 먼저 미국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골드러시’를 좇아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철도 건설에 동원됐다. 그 후 이들의 노동력으로 철도가 웬만큼 건설되자 1882년,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이 금지되는 법령이 공포됐다.

1868년 하와이로 첫 이민을 간 일본인들이 미국 본토에 들어가기 시작한 1880년대에 이미 미국에는 중국인들을 상징으로 하는 아시아인 차별 분위기(Anti-Orientalism)가 팽배해 있었다.

같은 업무라 해도 백인 노동자들과의 임금 격차가 컸고, 백인 우월주의는 차츰 세를 더했다. 백인 거주 지역에 아시아인들이 이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대단히 노골적이어서, ‘잽스, 그냥 지나가라. 이곳은 백인 거주지역이다’라든가, ‘잽스 진입 금지. 우리는 잽스를 원하지 않는다’는 등의 슬로건들이 할리우드 지역 주택가에 빽빽이 붙어 있었다. 한 백인 여인이 슬로건을 가리키며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은 당시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형편에도 일본인들은 점차 세를 불려 2차대전이 발발할 당시까지 인구가 12만7000명까지 불어났다.

“일본인들은 죽도록 내버려두라”

전쟁이 터지자 잇세이와 니세이들 사이에 견해차가 생겼다. 이민 1세대로서 일본 신문밖에 볼 줄 모르던 대부분의 잇세이들은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된 반면, 니세이들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잇세이들이 본국의 승전을 기뻐하는 동안에 니세이들은 반일본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니세이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얼마나 우호적인 사람들인지를 증명하고자 잇세이를 배제한 조직인 JACL(Japanese American Citizens League)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니세이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 어부들이 캘리포니아의 미 해군기지에 독극물을 풀려 했다거나, 미국에 25만명의 일본 병력이 있다는 등의 루머가 수도 없이 흘러다녔다. 2차대전이 심화되면서 미국내 일본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41년 여름에는 잇세이들이 미국의 은행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됐다. 대출은 물론, 예금해뒀던 돈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니세이들도 미국 시민권자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을 제출해야 은행과 거래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니세이들은 자신들이 충성스러운 미국 시민임을 더 적극적으로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 JACL은 FBI 산하조직을 자청, 민간경찰 노릇을 하거나, 미국기를 흔들며 가두행진을 했고, 1940년에는 “나는 열렬하고 적극적으로, 어떠한 제한이 있더라도 미국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며, 위대한 미국의 더 나은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래도 미국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이질감도 크게 작용했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미국인들과 달리 속내를 표정에 잘 담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그런 이질감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일본인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 언론, 민간단체들을 가리지 않고 거칠게 쏟아졌다.

당시 미 서부 지역 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존 드위트 장군은 의회 청문회에 나가 “잽스는 잽스다.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충성심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미국에 살고 있다 해도 일본인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시민권’이라는 종잇조각을 줬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본질마저 바꿨다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역설했다.

서부지역의 언론인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인기 칼럼니스트였던 헨리 맥레모어는 “나는 서부지역에서의 일본인 격리를 적극 지지한다… 그들을 모조리 들어내 버리자. 그들이 꼬집히고, 상처받고, 굶주리게 하고,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자. 우리의 적대국 인간들과 그 혈통들의 몸에 더 이상 피가 흐르지 못하게 하자”고 선동했다. 한편 반일본인 감정이 반아시아인 감정으로 확산되는 것을 염려한 한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인과 다른 아시아인들을 혼동하지 말자.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은 일본을 우리보다 훨씬 더 싫어한다… 그들을 (일본인 대하듯)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간혹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정치가들이 나서기도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JACL이 ‘우리의 가장 위대한 친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시다’라는 내용의 연설문을 낭독한 1942년 2월19일에 루스벨트는 ‘이그제큐티브 오더 9066’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잇세이와 니세이들은 서둘러 짐을 싸야 했다.

28일 만에 10만명 이송

서둘러 캘리포니아를 떠나긴 했지만, 그들을 받아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캘리포니아주가 법령을 정해 일본인을 추방하기로 하자 캔자스 와이오밍 콜로라도 등 다른 주에서도 주지사 명의로 일본인들의 고속도로 진입을 금지했고 일본인이 이들 주로 들어오려면 무장한 군인을 동행하도록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에서도 살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인들의 캠프 이동과 거주는 ‘전쟁 재배치군(War Relocation Army)’이라는 이름의 특별 부대가 관장했다. 명령이 발효된 지 28일 만에 10만명이 이송됐으니 ‘재배치’의 신속함을 짐작할 만하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상점은 모두 폐쇄됐고, 문 앞에는 ‘이 상점은 미국 정부 통제하에 있으므로 어떠한 사람도 허가 없이 출입하는 것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일본인들은 무장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일단 임시 집결처에 모인 뒤 번호가 쓰인 흰색 천을 가슴에 붙인 채 기차에 실렸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 동부에 이르는 사막지대에 설치된 10곳의 포로수용소였다.

일본인들은 이송되는 과정에 별다른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훗날 ‘산세이’(일본인 이민 3세대)들이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기도 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일본인들의 전통의식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이 ‘조용한 이동’에 대해 미국 언론은 ‘잽스, 추방에 순응’이라는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진기자의 “스마일!”이라는 주문에 웃으면서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가슴속으로는 모두 울고 있었다는 한 니세이의 증언은 당시 기차에 오르던 일본인들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더러는 ‘소극적 저항’을 한 이들도 있었다. 1차대전 때 미군으로 참전했던 일본인들이 군복을 입고 나와 자신들도 미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며 침묵시위를 한 것이다. 참전용사였던 히데오 무라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히데오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호텔 방. 미리 숙박비를 치르고 방에 들어간 히데오는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xx했다. ‘종이’는 미국 정부가 준 것이었다. ‘훌륭한 시민 증명서… 국가에 봉사하는 귀하의 충성심을 기리며….’

이 수용소는 가시철망에 둘러싸여 무장군인들의 감시를 받았는데, 지난해 로스앤젤레스의 일본 타운에는 이 수용소 모형이 제작돼 전시되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먹고 잔 막사는 급조된 건물이어서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는 마구간이나 외양간으로 사용하던 곳에 바닥을 깔아 놓은 것이었다. 수용된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이겨내야 했던 것은 굴욕감이 아니라 짐승들의 냄새였다고 할 정도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막사도 좀 정리됐고, 소규모 마을처럼 자치생활의 틀도 잡혀갔다. 주민위원회가 만들어졌는가 하면 학교, 병원, 작은 규모의 공장도 지어졌다. 세대마다 한 달에 7달러 50센트의 생활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혜택’들이 ‘수감자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찾아 줄 수는 없었다.

3년에 걸친 수용소 생활은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이치하시 야마모토의 삶은 훗날 스탠퍼드대 역사학 교수인 고든 창(Gorden H. Chang)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비극이다.

우울증 만연, 가족 유대감 단절

야마모토는 1894년 미국에 건너온 수재였다.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도 잇세이는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없는 현실과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에 일본으로 귀국하려 했지만, 스탠퍼드대 총장의 만류로 미국에 남았다. 그는 1913년부터 스탠퍼드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과 일본 정부의 정치, 경제분야 조언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저술과 학회 활동도 왕성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수용소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수용소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수용소에서의 삶을 훗날 책으로 펴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동료교수들에게 보냈고, 대학 총장에게도 수용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수시로 적어 보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은 점점 힘이 빠지고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초기에는 수용된 청소년들의 교육문제가 시급히 해결돼야 한다며 자신이 이들을 가르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어느결에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고, 가족간의 유대관계가 깨지는 것을 보니 고통스럽다”는 내용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언젠가부터 소식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3년 후인 45년 4월, 그가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 사람들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돌변한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6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야마모토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지나 그의 아내마저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떴다는 사실이다. 아시아학 연구에 기여했던 그에게 수용소 생활이 가져다 준 변화와 아내의 비참한 죽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수용소 생활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고, 재판 한 번 받아보지 않은 12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우울증으로 몰아갔고 가족관도 무너뜨렸다. 이들은 처음에는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수용소 생활 이후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조차 끊긴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미국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전쟁으로 노동인구가 줄어들자 미국 정부가 수용소의 일본인들을 민간 경제활동에 투입했던 것. 정부는 수확기 인원 보강을 위해 일본인들을 농장에 동원했다. 42년 가을부터 오리건 유타 아이다호 와이오밍 몬태나 등지로 일을 나간 일본인들은 수확기의 노동인구 유입정책에 따라 미국에 들어온 멕시코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했다. 농장에서의 노동은 잠시나마 수용소에서 해방된다는 것과 푼돈이나마 손에 쥘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용소 청소년 중에는 중·동부 지역의 대학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FBI로부터 조사받은 뒤 수용소를 떠날 수 있었다. 전쟁 때문에 많은 학생들을 잃은 대학측으로선 일본인들의 입학을 부정적으로 볼 일도 아니었고, 중·동부 지역 백인들의 반일감정은 아무래도 서부 지역보다는 덜했다.

미군으로 참전 자원

일본인들의 수용소 생활 가운데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니세이들의 참전이었다. JACL은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국가에 충성해 미국 시민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을 전쟁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거듭 요청했다. 당시 JACL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마이크 나사오카는 “니세이들이 이 캠프 저 캠프에 흩어져 있으면 우리의 충성심을 증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니세이들로만 조직된 부대를 만들어 나가 싸움으로써 그 전적이 우리의 충성심을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회고했다.

43년 2월1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니세이들로만 조직된 군부대 창설을 발표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 “미국은 인종과 관계없이 하나의 가슴과 정신으로 이뤄진 나라이며… 혈통과 무관하게 누구라도 미국의 승리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종’과 ‘혈통’ 때문에 수용소에 감금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는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니세이들은 오로지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442연대 전투부대’에 소속됐고, 시원찮은 무기와 배급에 만족하면서 유럽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어 죽어갔다. 외모 때문에 적군으로 오인한 미군들의 총알 세례를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일본인 부대는 미군 전투부대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가장 많은 전공을 세운 부대로 평가됐다. 그야말로 미국을 위한 ‘가미카제’를 자처했던 것이다. 한편 수용소 생활을 다소 다른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무의 영혼(The Soul of a Tree)’의 저자이자 유명한 목공예술가인 조지 나카시마는 수용소에서의 삶을 자신의 예술성을 구현하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1905년 워싱턴에서 태어난 나카시마는 전형적인 니세이였다. 사무라이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가계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28년에 MIT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일본 프랑스 중국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 42년에 가족과 함께 아이다호주의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한 일본인 목공을 만나게 된다.
인도에서 살 때 인도철학에 매료됐던 그는 수용소 생활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고, 늘 그 목공을 따라다니며 막사도 고치고, 의자, 식탁 따위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43년 뉴욕의 한 건축회사에 스카우트돼 수용소를 떠난 그는, 서양식 건축기술에 일본의 목공예술을 접합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목공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뉴저지주 뉴홉에서 나카시마 스튜디오와 전시관을 운영하는 그의 딸 미라 나카시마(그녀도 첫 돌을 수용소에서 맞았다)는 “아버지 세대를 평생동안 괴롭혔던 정신적 고통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도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아버지셨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힌 수치심 때문에 갈등하셨던 것 같아요. 저희 같은 산세이들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자라면서 집안 어른들이 겪는 고통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다행히 목공기술을 배우고 일하느라 옛날 일을 다소나마 잊고 사셨지만, 친척 중에는 완전히 폐인이 된 분도 적지 않아요.”

마침내 햇빛 본 진실

잇세이와 니세이들은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해 그 동안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미국이 2차대전 때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의 하나가 오래도록 과거에 묻혀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언론통제도 한 몫 했다. 당시 신문들에 실린 수용소 사진에서 일본인들은 모두 밝게 웃음짓고 있었다. 제임스 에이지라는 사진작가가 수용소를 돌며 촬영한 사진 가운데 상당수가 불태워졌고, 이에 대한 저술이 출판 금지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수’는 그대로 묻혀지지 않았다. 인권 변호사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이 꾸준히 이 문제를 조명했고, 산세이들은 함구로 일관하던 잇세이들과 니세이들을 인터뷰해 기록을 남겼다. 최근 이 사건을 다룬 몇 권의 책이 나오게 된 것도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보상절차도 마련됐다. 1945년 법학자 유진 로스토 박사가 예일대 법학과 학술지에 이 문제에 대해 기고하면서 이슈로 떠오른 재미 일본인 인권유린 문제는 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처음으로 공식 인정됐고, 보상 문제는 88년에 의회에서 최종 통과됐다.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그 골격. 조지 부시 대통령은 90년부터 희생자들을 수소문해 사과문을 보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사과의 말씀으로도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귀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정의를 되돌려 줄 수 없다는 것도, 개인이 잃었던 권리를 되찾아 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제 우리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2차대전 동안 얼마나 불공정한 처우를 받았는지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지난 7월 말 현재까지 사과문과 함께 2만달러씩의 보상금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은 8만1800명에 달한다. 그런데 보상과정에 잇세이나 니세이보다 더 억울한 사람들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2200여명의 일본계 라티노가 그들인데, 이들은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아닌 남미 13개 국가에서 평화롭게 살던 일본인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일본인 격리정책을 펴면서 이들까지 강제로 이송해 수용소에 함께 배치한 것이다. 이들은 뉴멕시코 몬태나 아이다호 등지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전쟁 후 300명을 제외한 전원이 일본이나 남미로 추방됐다.

다섯 명의 일본계 라티노들이 미 정부를 상대로 벌인 기나긴 법정 투쟁 끝에 승소했지만, 수확은 대통령의 사과문과 5000달러의 보상금 전부였다. 그나마 일본계 미국인들이 보상을 다 받은 뒤에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2만달러를 받았든 5000달러를 받았든 지금에 와서 보상금의 액수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성싶다. 문제는 그런 일이 언제 어떻게든 재발될 수 있다는 것, 대중이 징고이즘으로 끓어오를 때 그들이 질러대는 비이성적인 굉음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닐까.
 
 
 
한일간에 전쟁나면 재일교포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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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노는님 14-01-30 20:25
   
그거아세요? 미국이 저때 태평양전쟁때 이기고나서 얼마나많은 부를 축적햇는지를요?
천군치우k 14-01-30 20:27
   
지금도 일본땅에서 재일교포나 우리나라 사람들 나가라고 자주 시위합니다
보도도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입니다
일본놈들,
노숙자라고 지들 국민하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야쿠자하고 연계해서  원전 폭발한데 복구 작업에 ,
제대로된 교육이나 보호구 없이 들여 보내는 놈들입니다(독일, 러시아기자(?)가 폭로)
인권에 대해 그런 수준이니, 수용소에 몰아 넣는건 있을수 없는것이구요
관동대지진때 처럼, 전쟁 일어난 책임도 전부 남한데 돌리는 놈들이라
그냥 보이는 대로 학살하고도 남을겁니다
(독일이나 미국은 수용소 만들어서 일단 격리시키겟지만)
현재도 보면 자기들의 말실수, 행동실수도 전부 다른 나라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좋은건 다 자기들이 먼저 햇다고 외곡하고, 나뿐건 다 다른 나라 탓이라고 돌리는 놈들입니다
     
가나다라가 14-01-30 20:31
   
미국은 상식이 살아있는 나라라서 그나마 저정도였죠.
독일이나 일본은 그냥 죽여나갔으니...
바랑기안 14-01-30 20:28
   
지구상에서 가장 정의롭다고 자처하는 미국도 1차대전 참전하고 군대와 사회에 헌신했어도 일본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격리했는데 다른국가들은 볼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분위기 안좋으면 무조건 귀국해야죠.
재일교포들도 머리가 있다면 양국분위기 심상치 않으면 한국으로 도망오겠죠, 정의로운 미국도 아무리 미국시민이고 참전용사라 할지라도 적국의 피가 흐른다면 잡아서 족쳐대는데 일본이야 말할필요 없습니다. 대학살 일어납니다. 쥐도새도 주변인들 모르게귀화하거나 한국으로 도망오거나
     
가나다라가 14-01-30 20:31
   
관동대지진 학살만 봐도 답이 나오죠.
만류귀종 14-01-30 20:29
   
원주민들은 멸종까지 시킨 인간들인데 수용소는 양호하네요.

집집마다 총 있을텐데 수용소 안갔으면 총맞아 죽었을듯..
     
가나다라가 14-01-30 20:32
   
인디언 학살하고는 시대가 좀 다르죠.
삼촌왔따 14-01-30 20:32
   
당시에 미국에있던 한국인들중 일본비자로 건너간사람들은 어찌되었나요??
     
가나다라가 14-01-30 20:34
   
당연히 포함이었죠. 하지만 이런 분도 있습니다.


 김영옥(86) 씨는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 등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불패의 신화를 쌓아 미국 은성, 동성 훈장을 받으며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이민 1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아시아인은 차별이 심해 미군에 입대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법이 바뀌어 군 입대가 허용됐다.

김 씨는 이듬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장교 후보생이 됐다.

그는 초급 장교가 됐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전투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지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자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소개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들 중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442연대 100대대를 창설한 것이다.

김 씨는 100대대 2중대에 배치됐다.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모아 김 씨는 실전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다른 부대원들이 기본 교육에 치중했던 것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며 훈련에 임했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1943년 김 씨가 이끄는 부대는 유럽에 투입됐고 이후 탁월한 작전능력을 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작전참모가 됐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입성을 앞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자원해 독일 진영에 침입 2명의 독일군을 납치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파악해 연합군은 손쉽게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속한 100연대가 독일 치하의 프랑스 브뤼에르나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한국 전쟁에서도 김 씨의 전공은 눈부셨다.

2차 대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그는 자신의 조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고 부분적으로 (전쟁에)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참전 후 김 씨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을 지원, 교착상태였던 전선을 돌파해 60㎞나 북진해 휴전선 형태가 북쪽으로 치솟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아시아계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공적에 마크 클락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김 씨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이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후원했고, 1963년에서 1965년까지 한국에서 미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