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는 근대의 준거로 긴요하게 쓰인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근대적 경험으로 내세우고 탈아론을 주장한다. 역사에서 근대가 중요한 준거로 쓰이는 것은 근대가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정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근대는 특정한 준거를 바탕으로 비교해 산출하는 것보다 역사 속에서 하나의 체제가 어떻게 변화했느냐를 놓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근대를 이해할 때 동원되는 역사가 왜곡됐을 경우다.
빛바랜 근대의 주역, 황제와 황후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근대는 일본 근대성의 강조 속에 왜곡된 측면이 있다. 먼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일본의 침략주의의 산물이다. 기쿠치 겐조는 황후 시해에 대한 국제적 변명으로 한국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군주의 무능으로 강조했다.
반면, 당시 왕과 왕비를 가까이에서 접한 미국인들의 기록은 사뭇 다르다. 1892년 1월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간행된
란 월간지 중 1896년 11월호에는 국상 중인 왕을 인터뷰한 “한국의 국왕 전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는 왕비에 대해 “타고난 능력과 강한 개성”의 소지자란 점, “좋은 교육을 받았고”, “한국 여성으로서는 한학(Chinese ideograph) 교육의 수준이 최고이며, 이 점은 아마도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국왕에 대해서는 “왕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항상 곁에 책을 함께 읽고 그는 자기 나라의 고금의 역사에 어느 누구보다 정통하며, 왕은 진보적이며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쉽게 보이는, 서양 사람이나 그들의 제도, 관습 등에 대한 편견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전한다.
왕비에 대해 다른 증언도 있다.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 애니 엘러스 벙커는 왕비의 侍醫가 돼 왕비가 시해당할 때까지 함께 한 사람이다. 벙커는 「閔妃와 西醫」라는 글에서 황후의 인품과 능력에 관하여 “명성황후께서는 남자를 능가하실 만큼 기개가 늠름하시어 그야말로 여걸이신 반면에 백장미 같으시며 고결하시고 아랫사람 대하시어는 부드럽기 끝이 없으시기 때문에 황송하나마 친어머니를 대하는 듯 친절한 태도로 모시게 되었다.”고 했다. 이 부분은 위
의 왕비에 관한 언급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시대의 왕정 기록인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정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군주이며 왕비가 개입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앞의
요즘 사학자들 대부분도 예전과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고 일제의 의해 시해되면서 민비라는 호칭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는데 민비라고 하던데 존나게 조롱을 해요
고종도 근대화를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쪽발이 새...끼들 자료만 믿고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 임금으로 욕하고 참...
이런 개돼지 소리를 듣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