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생 운동이 북파공작원에 의해 일어나거나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이고, 본인이 그 당시 현장에서 구호를 들어보니 김대중 지지 구호는 거의 없었다며 그 당시 가장 많이 불리우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것이었다면서 “광주 운동은 반공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무기징역형으로 20년 전에 난 상황이고 사면되었을 뿐 전두환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 범법자입니다. 님 위에 적은 내용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겠어요?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은 대검과 곤봉에 의해 시민이 죽어나가면서 이루어졌고 발포는 5월 21일입니다. 님 논리면 5.18이 아니라 5.21이겠죠? 그 3일간 많은 시민이 대검에 목숨을 잃었고 공수부대에 대한 시민저항이 시작됩니다. 시민의 무장과 공격도 공수부대가 시내 중심가에서 대검으로 사람을 찔러죽이고 곤봉으로 때려죽인게 원인입니다.
발포전에 대검과 곤봉에 찔려 죽고 맞아 죽은 사진이 수천장이 넘고 증인이 수천명이 넘으며, 법원에서도 내란수괴를 인정했는데 아직도 이런 소리를 하는군요. 참 딱하네요.
개엄령에서 뿜으면 되는건가요? ㅋㅋㅋㅋ
애초에 계엄령 자체가 내려질 명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
1980. 초반 신군부세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
해 군의 정치개입을 계획했다. 4. 14.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정부장 서리를 겸
직하면서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보안사에서는 국내 정세 불안을 해소한다며 5
월 초순경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중앙정보부는 5. 10.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5. 12.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신군부 세력은 5. 17.
정오에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골자로 하는 결의안
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저녁에 열린 국무회의는,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 노
태우 소장) 병력들이 총검으로 무장하고 국무회의가 열리는 장소에 이르기까
지 도열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특별한 토의 없이 ‘5․17 비상계엄 전
국확대 조치’를 통과시켰다.
5. 10. 당시 중앙정보부 2차장 김영선은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이 짙다는 ‘북
괴남침설’ 첩보를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하여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에게 보고했다. 이날 입수된 첩보는 다음과 같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80. 4.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김재규 처형시에는 항의데모
사태가 발생을 해서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하여 남침
시기를 4월 중순경으로 예상을 하였으나, 김재규의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서 이
를 연기하여 오던 중에 80. 5. 들어 학생과 근로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되자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 5. 15.부터 5. 20. 사이에 남
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5. 10.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는 ‘북한남침설’ 정보는 북한의 일반
적 남침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고, 이 같은 첩보가 가치 없다고 결론 내
렸다. 다음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5. 10. 작성한 북괴남침설 분석 이다
아무 근거없는 계엄령으로 사망자가 발생했고, 상급자의 발포명령 없이 군인들이 발포를 지시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리고 계엄령 자체에 타당성이 없었는데 무리하게 강압적으로 추진했다는게 밝혀진 지금 모든 책임은 전두환이 지는게 당연한거죠 ㅋㅋ
또, 5월 18일에 광주에서 극렬저항 없었습니다 ㅋㅋ
10분만 검색해봐도 사실관계 다 확인할수 있는 세상에 거짓말로 선동이나 하시고... 할일 드릅게 없으십니다 ㅋㅋ
물타기 하시려면 똑바로 하세요^^
내가 아는 중사하나는 트럭타고 시내 순찰하다가 4층 창문에 나타난 사람을 저격수 인줄 알고 쏘았는데
올라가보니 애기 업은 젊은 여자가 머리에 피흘리고 죽어있어 황당했다고 함.
애는 죽은 엄마등 업힌채 반쯤 깔려 자지러질듯 울고 있고....
(여자는 죽으면 대부분 하늘을 보고 누움)
그는 한국이 싫다고 외국으로 이민갔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