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혁명인 4.19 혁명, 6.29 선언의 성공사례와 이번 촛불시위의 실패요인을 비교해본다..
1. 4.19 혁명
4·19혁명 전 수주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화하였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이승만의 약점을 알아차린 이상 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광포해지기 시작하여 반공청년단과 자유당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면서 다녔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Macanarghy,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
2. 6.29 선언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와중에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정리)
* 4.19 혁명 - 몇주간 마산등 지방위주로 전개되던 시위가, 4월 중순 서울지역으로 퍼지며 4.15일을 기점으로 폭력화되었고,
4월 19일 드디어 경찰의 폴리스라인을 넘어 경무대 습격양상으로 변모했고, 폭력시위 11일만인 4.26 이승만 하야 선언..
* 6.29 선언 - 6.10일을 기점으로 불붙은 시위가 6월 중순부터 폭력화된지 근 2주만에 6.29로 전두환 항복
* 반면 금번 촛불시위의 실패 요인
- 비폭력 평화시위로 인하여 현 집권층에 전혀 위협을 주지 못함. 안심하고 시간끌기를 할 빌미를 제공.
- 시일을 질질 끌어, 시위 한달을 넘어가며 집권층도 시위대도 점점 시위에 만성화 면역화 되어 버림..
평화시위이니 전혀 위협이 안되어, 집권층도 점점 시위 하든지 말든지 냅두라라며 신경도 안쓰게 됨
대략 2주내에 승부를 봐야 함에도 속전 속결에 실패한게 주 실패 요인
심지어 시위 시작 1달이 된 현재까지 사태는 전혀 진전될 기미조차 보이지않는 산너머 산인 상태..실패로 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