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을 하자면, 아버지도 교통사고로 바로 눈 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트럭에 치여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미친듯이 인공호흡에, 심장 마사지를 해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죠.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벌어졌던 비극이었습니다.
사고를 낸 가해자 가족은 장례식장에 한번도 찾아오지도 않았고,
구속되자마자 ... 밤낮으로 전화를 해서 합의를 해달라고 괴롭혔지요.
이건 정말 ... 어처구니가 없어도 ...
약 8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첫 직장에 들어가서 ... 기획실로 발령을 받고 처음 한 일은 사망자 뒷처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났다가 현지 가이드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뱃전에 나갔다가, 튀는 배(일명 통통배 고속정) 밖으로 노인이 떨어져 사망을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30대 후반의 선임 기획실장님께서 처리를 나가기로 결정을 하고 나는 그분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멱살잡히고, 뺨맞고, 몇 대 맞는 것까지는 각오를 하고 갔습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꾹 참고 ... 오히려 찾아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군요. 우리는 구분하기 좋게 유니폼을 입고가서 뒷바라지며, 유족들이 할 일을 번갈아가며 몇 일을 했습니다. 1주일을 그렇게 하고 나서, 오히려 유족들에게 감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유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과 위로, 같이 슬퍼해주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건은 그 어느 것도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세월호에 탑승한 아이들의 죽음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그러한 깊은 나락 같은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패한 관리와 정치인들, 기업가들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이들을 죽게했으며 ... 그 뒷처리 조차도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정부로 치자면, 중국만도 못한 어이없는 국가에 살고 있구나라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정신을 차려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해야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