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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19 12:16
대만이 G랄인 이유
 글쓴이 : 보통이
조회 : 2,261  

음...오랜만에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올리는 거라 좀 얼척없는 내용이 있겠지만 이해해 주시기 바래요. ^^;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대만, 아니 중화민국, 아니 국민당 정부가 무엇을 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인 집단인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예요. 이 글은 일종의 혐오 내용이고 다른 말로 한반도 분단의 원인 중 하나를 비정하는 내용이예요. 특히 가생이에는 대만인이나 화교들이,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는 것보다 훨씬 더, 굉장히, 많이 상주하고 있어요. 댓글 중 이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자들을 보실 수도 있어요. 참고하시길 바래요. ^^;

대만 얘기를 하려면 가장 먼저 조선과 청의 관계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이 필요해요.
이건 우리 역사 교육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걸 지적하는 내용이 되겠네요. 역사 교육 체계에서 이 문제(한반도 분단의 원인이나 조선과 청의 관계 등 근현대사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제대로 다룬 교과서나 지도 방식은 철저히 배태되었어요. 맞아요. 이건 지난 역사 교과서 수정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입장을 가진 글이예요. 대한민국 역사학계에 침투한 친한족, 친중 세력들의 역사관이 우리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예요.

이걸 특정 정치 세력이 바꾸면 안된다고 정치판에서 투쟁하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도올 김용옥과 같은 자들이예요. 도올 김용옥이나 초대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같은 자들은 대만국립대 석사 과정 혹은 대만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심지어 대만 해군에서 4년 간 복무하던 사람들이예요. 실제 대한민국 임정 요인들 가운데 상당 수가 장개석의 지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독립 운동가라고 설치고 다니기도 해요. 실제로는 대만의 끄나풀로 친일파나 친미 매판자본가 못지 않게 명동 사채 시장에서 대한민국의 등골을 파 먹은 집단들이예요.

우리 근현대사 정치 세력 가운데 정작 정치 세력을 규합할 만한 민족 자본이 형성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어요. 노다지 자본가들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던 한계예요. 이 글은 정치적으로 보수 정당의 관점으로 쓴 글은 아니녜요. 다만 진보 정당들의 역사관이 대만계, 혹은 화교들이 바라는 관점에 치우쳐져 있다는 걸 비판하는 글이예요. 그런 면에서 역사 교과서의 수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예요.

자, 이제 본론을 시작할께요.
이 글은 정작 일제 패망 이후 한반도 분단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될 거예요. 그 과정에서 여러분은 작금의 `쯔위'사태를 통해 드러난 대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망동들이 바로 여러분들의 코앞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 목도하실 수 있을 거예요. 분단의 원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통일을 부르짖는 보수 정당이라고 깨끗한 척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긴 글이예요. 커피 한 잔 곁들이시면 좋겠네요.

여러분들은 인조반정에 대해선 익히 아실 거예요. 광해군의 균형 외교를 부정하고자 인조 등의 세력이 쿠데타를 벌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지요. 그 뒤로 인조의 독선적 배금 정책이 병자 호란을 불러 왔고 패한 조선은 이후 청에 의해 반식민지화되어 서구 산업화에 뒤쳐져 결국 일제에 의해 참담한 식민지 과정을 거쳤다는 맥락으로 기억하실 거예요. 아니 최소한 이런 내용조차도 제대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오히려 가르치지 않은 선생님들이 더 나은 선생님들이실 거예요.

삼전도비 비문에 관해 검색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실 거예요.
인조가 전쟁을 불러 왔다는 점에서 나쁜 군주인 건 변함이 없어요. 다만 인조가 청과 대등하게 쉽게 말해서 감히 후금, 청과 맞먹으려고 했다는 것은 좀 살펴 볼 가치가 있어요. 정묘호란(1627년 3월 1일, 홍타이지)이전 누르하치의 즉위식에 초대된 조선의 외교 사절이 청 황제에게 다른 모든 사절들이 삼전구배의 예를 올릴 때 혼자서 빳빳이 절을 하지 않고 서 있었다는 일화가 있어요.


조선은 청에 대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맞먹고 있었던 거예요. 문제는 청도 그런 조선의 행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이예요. 물론 청도 정묘호란 전부터 꾸준히 조선 침략을 꾸며 왔다는 게 드러나요. 하지만 침략 이전에 조선에 대해선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신중하게 대응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청에게 조선은 감히 중원의 패자로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보다 더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어떤 상대였던 거예요.

조선과 청의 관계가 일부 식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직적(병자호란 이후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는 식으로만 설명하며)이고,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굴욕을 당하였을 거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선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묘한 관계가 있었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요즘에도 그러는 지 모르겠는데요.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제2 롯데월드가 있는 석촌호수 옆에 삼전도비라는 게 하나 서 있습니다. 몇 년 전 이 비석을 철거하라고 누가 락카칠을 해서 여기로 옮긴 것인데요. 뭐...비문을 단 한글자도 해석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ㅡ.ㅡ;; 이 병자호란의 패전(조선 입장에서)을 기록했다고 알려진 바로 이 삼전도비에는 조선과 청이 혈연 관계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고 전쟁의 배경과 승리, 특히 화해의 과정을 적고 있을 뿐입니다. 
삼전도비 이전 안내문.jpg


그걸 민족의 수치(어느 민족의 수치?)라고 떠드는 자들이야 말로 조선과 청의 관계를, 관성적이고 낡은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의해, 아니 조선 민족의 직계 친척에 의해 지배당한 중국 한족의 관점에서 이간질하려고 하는 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일 겁니다. 조선과 청의 관계가 무엇이였는지 이글을 끝까지 읽어 보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다시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여기까지가 대만을 설명할 때 필요한 근대사 과정입니다. 이 조차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에 이토록이나 길게 설명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기초적으로 이런 배경을 알아야 현대 세계사적으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반도 분단과 냉전에 대해 옳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게 바로 이런 과정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데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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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현대사입니다. 흠...아주 긴 글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_-;;)

전후 처리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게 될 겁니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 혹은 계기, 그리고 시점을 관통하는 곳이 바로 포츠담인데요. 국내에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설명한 글이 독일 국제관계학 연구자가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루즈벨트 비서관의 수첩 메모를 통해서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대화록을 공개한 것으로 비정한 게 전부인데요. 

이후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수정주의(역사 수정주의 맞습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 관점입니다.) 학자들에 의해서 냉전 이념으로 왜곡, 확대 해석되면서 더더욱 한반도 분단의 원인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때문에 분단되었다고 보는 시각(외적 기원론)이 보편화되었어요.

대화록을 요약하자면, 뭐 이런 내용입니다. 

루즈벨트 왈 "한반도가 자립하려면 40 년 정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스탈린 왈 "나도 동의한다."
이 단 두 줄의 대화가 포츠담 선언에서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되었던 [...in due course...;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독립을 승인하겠다는] 명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 두 줄의 대화록이, 한반도 분단의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원인을 설명하는 모태가 되고 맙니다. ^^;

우선 포츠담 선언(1945.7.26)은 주지하시다시피 2차 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연합국들이 협의하고 추축국에 대한 전후 처리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 직전에 카이로 회담이란 게 있었는데요. 보통 한반도의 독립을 연합국이 최초로 합의한 회담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개석의 역할이 부각됩니다. 자, 과연 그랬을까요?
카이로 선언.JPG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C%B8%A0%EB%8B%B4_%EC%84%A0%EC%96%B8
Cairo_conference.jpg

여러분께서는 포츠담 선언에서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지정했다고 기억하시나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지켰을거라구요? 그 직전 카이로 회담의 결과를 따랐을 거라구요? 아닙니다.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독립을 명백히 부정한 선언이 포츠담 선언이고 그 회담이였습니다.
한반도는 1~2차 대전기 동안 일제의 식민지였습니다.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 역시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주인만 바뀐 채 식민지였던 지역입니다. 이 두 지역에 대해 전승 연합국들은 힘의 공백을 발견합니다. 누구든 차지하고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공백을 말이죠.

그것에 가장 먼저 종주권을 주장한 세력이 누구였을까요?
예,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제가 시모노세키 조약(청일 전쟁 종전 협약)이후 체결한 모든 대외 조약을 무효로 만든 장본인, 중화민국입니다. 물론 베트남...아니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종주권을 행사하려 듭니다. 나중에 한반도는 미소가 각각 나누어 신탁 통치를 하게 되지만, 인도차이나반도는 북부는 중화민국, 남부는 처음엔 영국이 맡다가 나중에 프랑스가 맡게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다구요?

^^; 이 지도를 한 번 보시지요. 이것은 현재 중화민국, 대만이 대만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회과부도에 그려진 자국의 영토입니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이 지도에 한반도(남북한)와 인도차이나 반도(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자국의 영토라고 가르쳤습니다만 지금은 몽골 정도만 자국의 영토라고 가르치고 있답니다. 기타 저 영토 분쟁 지역 색칠해 놓은 거 보세요. 훗...섬짱깨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이해하실 필요...느끼지 않으시나요? ^^
ROC_Administrative_and_Claims.png


포츠담 선언에 한반도 독립은 결국...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한다...(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자주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는 카이로 선언과 그 이행을 담보하는 포츠담 선언의 배경에 중화민국의 장개석 및 당시 중화 민국 300인의 군벌 집합체인 국민회의의 악행이 숨겨져 있습니다. 더이상 영토 확장은 하지 않겠으나 식민지를 독립시킨다는 내용은 없는...

다시 카이로 선언 즈음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중화민국의 장개석이 카이로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연합국 수뇌들에게 주장하였다는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장개석이 한반도를, 종전 이후 다시 굴기할 지도 모르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립시키려 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유명한 순망치한이라는 중국(중화민국 외)의 외교 독트린이 형성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에서 포츠담으로 넘어가는 기간 동안 중화민국 국민회의(300인의 중국 군벌) 내부에서 일본의 재기가 어려울 테니(일본 본토를 분할 점령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 아예 한반도를 복속하자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그리고 포츠담 선언에서 한반도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겁니다. 이것은 인도차이나 반도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결국 장개석은 승전국 협의에서 배제됩니다. 이게 포츠담 선언에 중화민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OP-몰락.jpg



다만 청일 전쟁 이후, 일제가 체결한 모든 국제조약을 무효화하는데는 성공하는데,
이미 중화민국은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를 모두 부정하겠다고 천명합니다.

잠시 시모노세키 조약을 되새겨 볼께요.
제1조.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 임을 인정할 것
제2조. 타이완을 일본 제국에 할양한다.
제3조. 청국은 일본 제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제4조. 청국의 사스(沙市) ·충칭(重慶)·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장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인도차이나와 관련된 텐진 조약의 내용은 위에 상기한 바와 비슷하니 관심있는 분은 따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청불 전쟁으로 맺어진 텐진조약입니다.

위 두 조약은 청이 개항 초기에 맺은 몇몇 불평등 조약 가운데 하나라고 그들, 섬짱깨는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개정 혹은 폐기를 2차 대전 승전을 통해 얻으려고 합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1차 대전 종전으로 그 이전의 국제 관계를 정리한 경험이 있던 프랑스 등은 이 포츠담 선언의 1차 대전 이전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에 대해 승복하지 않습니다. 

특히 인도차이나 반도에서...프랑스는 텐진 조약으로 얻은 인도차이나를 그대로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사이공 학살을 자행,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인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92년 이전까지도 프랑스는 한반도나 한국인에 대해 대단히 차별적인 정책을 유지합니다. 에어버스 기체 선정과 KTX 선정 이후에나 비로소 인정하기 시작한...

어쨋든,
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문자 그대로 부정(대우)해 보겠습니다.
1.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 임을 인정하지 말 것
2. 타이완을 청에 할양한다.
3. 일본 제국은 청에 배상금 2억 냥 + 전쟁 배상금 + a을 지불한다
4. 청의 사스(沙市) ·충칭(重慶)·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개항 폐쇄와 일본 선박의 장강 및 그 부속 하천의 통항 제한,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통제할 것

이러면 청은 조선의 종주국이 됩니다.
그럼 다시 삼전도비를 소개한 윗 글을 되짚어 보시게 될 겁니다. 청과 조선이 종주 관계였을까요? 청이 제국이라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을까요? 또한 중화민국은 신해혁명을 통해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세워 정권을 탈환했는데 청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지금 대만이 한반도, 한국에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아마 연합 뉴스 기사인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질 않네요. 한 번 검색해 보세요. ㅡ.ㅡ;;
일시: 2011/9/8 
출처: 대만 외교부 

중화민국 영토주권의 역사적, 국제법적 근거 재천명 
대만 외교부는 7일 “국내외 각계는 중화민국(대만)이 1945년 10월25일부터 실질적으로 대만에 대한 일체의 주권을 회복하고 행사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만 외교부는 또 “중화민국이 대만을 실효 통치한 것은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국제법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천명했다. 

대만 외교부의 이날 발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만과 그 부속도서의 지위를 규정한 포츠담 선언과 일본의 항복문서가 갖는 국제법적 효력에 대해 제기된 일각의 의문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외교부의 발표는 대만과 그 부속도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중화민국 영토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대만 외교부는 하루 전 발표한 성명에서도 대만과 중화민국의 역사적 지위에 대한 공식 해석을 재천명했다. 

성명은 청나라 정부가 18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에 의거해 대만 본도와 펑후(澎湖)열도를 일본에 할양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신해혁명을 통해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청나라의 법통과 국제적 법인격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대만과 펑후열도는 중화민국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중화민국은 청의 법통을 계승해 시모노세키 조약을 부정한 대로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갖는다고 2011년 9월 8일 대외에 천명했습니다.
대만, 중화민국(중국도?)은 한반도, 즉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체와 독립을 부정하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중화 민국의 영토는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포츠담 선언을 통해 더이상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되, 그 이전의 식민지를 독립시킬 의지가 없다고 해석한 곳(한반도-시모노세키 조약 파기, 인도차이나반도-텐진 조약 파기, 타이완 섬과 다오위다오 등 부속 도서-시모노세키 조약 파기, 고비 사막 너머 몇몇 작은 왕국들) 외의 지역만 따로 지정합니다. 

예, 바로 몽골입니다...현재 중화민국 헌법 산하 기관 중에 몽고 자치 위원회라는 게 있습니다. 몽골이 자기네 식민지라는 겁니다. 선전포고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을 자초하고 있는 건데요 더구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위에 제시한 고등학교 사회과부도를 보세요. 저게 중화민국, 대만의 강역이라고 대만의 젊은이들에게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대만의 강역 지도부터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저런 대만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렇듯, 1945년 7월의 포츠담에서도,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가 자신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에 의해, 두 지역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독립과 주권이 부정되고, 여타 승전국은 그런 중화민국의 말도 안되는 영유권/종주권 주장을 인정할 리 없어서 전후 처리에 합의하지 못한 결과 두 지역에 자치권이 결여된(승전국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비독립 지역으로 남게 된 겁니다. 국제법상. 무주공산...신탁통치의 빌미를 바로 저 대만 새끼들(특히 300인 국민회의)이 만든 겁니다.

그래서 광복 후에 한반도에는 자치 세력(여운형의 건준위), 독립 운동가(이승만과 김일성)와 중경의 임정(백범 등)이 있었음에도 소련과 미국에 의한 신탁 통치가 이루어 집니다.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하기 이전엔, 이 한반도에 국가라는 게 없었다고 인정한 게 바로 신탁입니다. 결국 북이 먼저 찬탁하게 되고 남쪽도 신탁에 동의하게 됩니다. 19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에 국가라는 게 없었다고 인정하게 만든 게 바로 저 대만이 모두 자기땅이라고 우긴 결과 연합국이 전후 처리를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몇몇 글자의 표기를 비꼰(...in due course...) 결과입니다.

서로가 다른 이념을 가진 승전국에 의해 분단되어 신탁 통치를 받고 내외적인 원인들이 다시 쌓이면서 그렇게 6.25가 발발합니다.

이런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 역시 베트남 북부에 중화민국 군대가 진주하게 되었고 남쪽엔 처음 영국군이 진주하였으나 곧 프랑스 군으로 대체됩니다. 그리고 사이공에서 프랑스 군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고 북베트남의 호치밍 등에 의해 독립 투쟁이 벌어지는 데 이게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입니다.

역시 인도차이나에서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군이 격멸되고 곧이어 미국이 반공을 기치로 남베트남을 지원하면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북부는 이미 국공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을 대신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자리잡고 있었고 역시 중공의 지원을 거부한 북베트남은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베트남전을 치뤄 내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도 다시 중공은 베트남을 침공했으며 그 침공까지 막아 내고 나서야 비로소 베트남은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전후 30년 한 세대 동안 내내 독립 전쟁을 치루게 된 이유가 결국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부정한 대만 개자식들의 영유권 주장 때문인 겁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보트피플들은 월남에 살던 화교들입니다. 그리고 이  동남아에 거주하게 된 화교들은 이후에도 열심히 각 지역에서 악행을 일삼은 결과 말레이 반도에서도 학살당하고 싱가폴이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되게 되고 최근 인도네시아에서도 학살당합니다. 고리대금업과 음식에다가 장난을 친 것이 발단이 되어서 말이지요.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원인을 이미 충분히 다양하게 해석되어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승전국들의 이해에 자기들의 숟가락을 얹고 싶어했던 중화민국, 대만, 섬짱깨의 아집이 2차 대전 후 가장 큰 두 전쟁의 원인인 걸 애써 무시하거나 경시하려는 시도들을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한낱 대만따위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서태평양 지역 가장 큰 2차례 전쟁을 주도할 수 있다는 거냐고 되묻고 싶다면 1971년까지 대만이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시길 바랍니다.

6.25가 발발하자 대만은 이를 두고 국공 내전의 연장이라며 맥아더에게 직접 "중국 본토로 상륙"하자고 제안합니다. 대만의 참전 병력은 당시 3만 5천명이 될 것이다라고 주일 미군에게 밝힙니다. 한반도가 자기의 영토, 영역이라는 인식이 없으면 이런 주장이 가당키나 합니까?

이와 똑같은 주장을 도올 김용옥이라는 동양 철학자가 조선의 독립 운동은 오로지 중국 본토 내에서만 벌어진 것이 독립 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6.25는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중국 내전의 연장, 즉 국공 내전의 연장이라며, 광주 MBC를 통해 대놓고 강의하는 걸 정상이라고 주장하고 그걸 전파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래 유툽에 동일한 영상이 얼마나 많이 올라와 있는지 그리고 120만 이상이 그걸 시청하고 추천하고 있는지 한 번 보세요. 그들은 똑같이 6.25의 원인으로 대만이 지목되는 것에 대단히 불편해 하더군요.

도올 김용옥씨가 2006년 광주 MBC에서 강의하는 내용입니다. 22분부터 차분히 보시면 됩니다. 저는 저 분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선 관심없습니다. 그러나 저런 분의 저런 주장이 진보나 좌파의 정치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면 그 정치 성향이야말로 반민족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정리 하겠습니다.
신해혁명을 통해 청의 법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은 자신들의 영유권을 넓히기 위해 1차 대전 이전,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개항기 청의 모든 대외 조약을 무효화했고 그러한 야욕이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은 미흡한 상태의 포츠담 선언을 낳게 되고, 결국 두 지역의 한민족과 베트남족은 승전국의 이념에 의한 분단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분단은 두 지역에서의 대전 이후 가장 큰 두 전쟁, 6.25와 베트남 전쟁을 야기했으며, 아직도 한반도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자신들의 영유권 확장을 노려 결국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독립을 부정하게 만든 중화민국, 특히 300인의 국민회의를 지목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한반도를 중화민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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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일제를 배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혐일을 강조하면서 그 뒤에 숨어 현재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주도한 대만이, 분단과 대일관계를 지들 이익에 따라 악화시키는 걸 내버려 두는 것도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마치 친중적인 것을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포장합니다. 이런 정치 정당이 우리나라 제1 야당입니다.

일제 시대,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 당한 후, 일제를 척결하기 위해 중화민국에 의탁해야 했던 상해 임정의  독립 운동가들의 역사를 부정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대한 민족의 독립에 있지, 친중사대에 있지 않았다는 정당한 균형감각을 갖지 못하며, 마치 친중을 민족주의라고 착각하는 도올 김용옥과 같은 인물들이 여론을 주도하게 된다면 구천을 맴돌고 계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께서 땅을 치며 억울해 하실 겁니다.

매국노와 반민족 세력은 친일파만 있지 않습니다. 중화민국, 대만, 섬짱깨야말로 우리가 더 경계해야할 반민족 세력이자 분단과 6.25의 원흉이라는 걸 기억해 주시면 좋겠네요.


아! 윗글에 조선과 청 황조의 묘한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걸 잊었군요.

뭐 아시다시피 조선의 시조 이성계도 여진족으로 귀화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재귀화한 사람이라서 굳이 만주어나 조선어, 혹은 여진족과 한민족을 따로 구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청 황조의 성씨가 바로 애신각라(愛新覺羅)...신라(新羅)를 사랑하고(愛) 깨우치는(覺) 자의 이름입니다. 청 황조가 바로 신라의 후예라고 확증하지는 못하지만 귀납적으로 증명할 수는 있습니다. 청 황족들이 만주국 몰락 후 성씨를 거의 모두 김(金)씨로 바꿨거든요. ^^;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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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16-01-19 16:01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게시판에 올려주시면 더 좋을 듯 합니다.
     
보통이 16-01-19 16:07
   
음...그렇겠네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