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고 구심점 역할이자 좌익세력을 대변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하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 참고로 김원봉은 여운형과 잘 아는 사이였다. 여운형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었으며, 김원봉은 해방 후 여운형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플래쉬로 돌아가는 사진 중에 오른쪽에서 두번째,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숙인 인물이 김원봉. 여운형이 자주 테러를 당하자 김원봉은 여운형의 신변 보호에 나서기도 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커다란 이유는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권세를 득세하는 잘못된 사회 흐름에 매우 크게 실망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노덕술에게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수 차례 고문을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으로 보인다. [11]
강준만에 의하면 김원봉은 일제시대 때의 경험을 통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제일 오래 살아남았다고.
1.5. 북한 정권 수립 참여, 실각과 최후[편집]
1948년 9월,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국가 검열상과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남침에 반대하고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고, 납북인사 상당수를 보호하는 등 김일성의 정책과는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다가 1956년에 터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가 숙청된 후 1958년에 전면적으로 실각했다. 그리고 실각 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xx설, 총살설 등이 나오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각 직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자세한 사망 시기,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실각 시기를 봐서는 정적을 솎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목으로 형무소로 끌려가 거기서 울분을 참지못해 청산가리를 입에 털고 xx했다고 알려져 있다.[12]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 혐의를 받은 이유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이 남의사의 지원을 받던 단체이라는게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적혀있는데 이게 맞다면 시대가 절망시킨 영웅이군요
일제도 하지 못한걸 남에선 친일파가 북에선 김일성이.
싸울꺼 없습니다
노덕술같은 악질 기회주의 친일파 개엑끼들 다 찾아내서 싸그리 정리해야죠.
그리고 박헌영 김일성 같은 민족의 반역자 빨갱이들 다 찾아내서 싸그리 정리해야죠.
그리고 김원봉선생님 같은 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조명해야합니다.
목숨걸고 청춘받쳐 얻은 조국의 독립에 노덕술 장택상 같은 개엑끼들이 밥숟갈 들고 싸대기 날리는 현실이 얼마나 힘드셨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