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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09 01:17
영화 사도 속 또다른 주인공 정조의 비극!
 글쓴이 : 5minutes
조회 : 1,307  

영화 사도 속 또다른 주인공 정조의 비극!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군주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는 당쟁의 폐해가 심각하고 여전히 국가는 가난하던 시기.
영화 사도에서도 나왔던 그 참혹할 수 밖에 없던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 세자간의
최악의 관계... 결국 죽음을 불러오는... 그리고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에게 물 한잔 줄 수 없었던 참혹함을 기억해야만 했으며
영조와 어머니 혜경 궁씨의 도움으로 겨우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왕이 된 후 초계문신제, 서얼 허통정책을 실시하고 자유로운 상품 경제의 기초를 놓고
민심을 반영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는 안타깝게도 비극적이었습니다.
그가 집권했던 1776~1800년도의 세계.
영국과 미국에서는 오늘날과 유사한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가 완성됩니다.
프랑스에서도 민본을 뛰어 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흐름과 유사하게 현명한 통치를 하던 정조였으나
그가 했던 노력은 큰 의미를 지녔으나 결국 소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가 죽은 후 조선은 붕괴되었고
정조의 죽음이 곧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는데요.
정조가 믿었던 두사람 심환지와 김조순.
정신왕후와 심환지가 문화통치를 박살내고
김조순에 의해 세도정치가 시작됩니다.

완벽히 배신을 때린 것이죠.
결국 세계와 조선간의 정치는 격차가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정조의 비극 영상 보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잘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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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게임 15-10-09 02:15
   
정조가 했던 문화 통치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죠.

문체 반정이란게 알고 보니 참신한 신문체를 왕명으로 금지하고 고문을 흉내내서 글짓기 하지 않으면 벌주겠다.
굿잡스 15-10-09 07:55
   
조선 후기는 당쟁의 폐해가 심각하고 여전히 국가는 가난 하던 시기.>??

안동 김씨의 특정 가문 편중의 세도정치 운운하면서

당쟁의 폐해 어쩌고 운운하시는지? 이건 쨉 식사관의

전형 시각과 다름 없군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견제하던 당파

를 단순히 이런 식으로 몰고 가는것 하며. 이것도 조선

임금이 왕권강화를 위해 또한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화 조율에 영,정조 탕평책은 못들어 보셨는지요?
굿잡스 15-10-09 08:02
   
그리고 조선이 여전히?? 못살았다??

영국 옥스포드대 역사학자인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연구 내용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사이

조선 숙련공의 하루 임금은 쌀 8.3킬로그램 이탈리아

밀라노 빵 6.3. 영국 8.13.

구한말 선교사들이 조선의 대식문화에 놀란게 그냥

나온줄 아시는지? 곡물 저장 수준도 인구대비 서토의

5배에 이를 정도의 탑레벨하며 면포생산력도 고려

시대보다 조선이 5배 높았고.  중계무역이나 오늘날

바이오 의약품같은 인삼재배 성공으로 동아시아에서

부르는게 금값.

영국 경제학자 앵거스의 보고서 내용을 보면

대한제국이 잽 보다 문호개방이 늦었지만

1900년 1인당 지디피를 보면 별 차이가 없었음.

대한제국(850불), 잽(1135불)
굿잡스 15-10-09 08:12
   
1740년(영조 16년)경 강계산 자연삼은 상등품 1

근당 은 100냥, 중등품은 80냥, 하등품 은 60냥이

었지만 1752년(영조 28년)에 이르러서는 상등품

1근에 은 200냥, 중등품 은 160냥, 하등품 은 100

냥으로 12년 사이에 가격이 2배로 치솟 았다. 이러

한 환경은 개성상인들의 자본 축적을 촉진시켰다.

이 시기 연행사(燕 行使)를 통해 중국에서 판매된

인삼의 가격은 은 350냥에서 700냥 사이에 거 래

되었는데, 조선에서 거래되는 가격의 최대 7배에

이르는 가격으로 매각.>

조선 후기의 조선이 다시 발명 재배에 성공한

인삼은 동북아 주변국 심지어 태국등

동남아에도 유명 거래될 정도의 당시

은보다 훨씬 고가의 오늘날로 치면 바이오 의학품

이자 국제적

상품화폐용으로 부르는게 금값이였군요. 그기에

엄연히 쌀,면포등도 왜에 주력 수출 상품.

그외 조선은 서토와 왜간의 중심지라 중계무역을

통한 이익도 상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서토 비단

을 왜에 더 비싸게 팔고 은은 서토에 더 고가로

쳐주어 상당한 중계 이익을 올린. 지금의 네덜란

드나 홍콩도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크게 얻고 있죠.


조선도 이미 17세기 대동법의 본격 시행부터

중엽부터 광산개발에 개인의 참여를 열면서 광업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군요. 설점수세제(設店 收



制)로 이런 상업에서 자본을 축적한 이들등에 의해 광



개발을 개인에게 허용하면서 세금을 걷으면서 이

미 전국적으로 70여개가 성행했군요.

이는 당시 조선이 중계무역등으로

은의 수요 또한 필요해지고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광업개발도 열지 않을 수 없던 시대 상황이였고

이게 성행하다 보니 통제가 안되는 잠채나 이쪽으

로 인력이 빠지면서 농업생산인력에 대한 우려도 있

었지만

하여튼 이로 인해 대자본 축적 상공인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는 이유이군요

그리고 조선의 송도사개치부법이라는 서구보다 2

00여년 앞선 세계 최초의 현대적 회계복식부기의 등

장과 근현대적 금융

거래장과 사용이 보편화.


조선의 근대적 자본주의 경영을 입증한 이런

자료들이 나온 시대 배경이군요.
굿잡스 15-10-09 08:21
   
그리고 영국이 청과 아편전쟁이 그냥 나온게 아니군요.

영국이 비록 산업혁명의 기계동력화나 무기의 발달이

앞서가고 있었지만 동북아에 제대로 팔 거리가 없었습니다.

비단등이나 유럽왕실등에서 환장하던 도자기등을

이미 가지고 있던 청에 영국같은 저가라도

싸구려 상품은 딱히 먹히지도 않았고 엄연히 당시는

지금의 미국 이전 서토 명,청이 단일 시장으로서는

세계 최대에 근거리에 가장 빈도수 높게 공무역과

중계무역을 통해 이득을 챙겨먹고 있던게 조선이였군요.

조선전기의 세종대왕이 위시해서 이록한 근세조선의

문화적 행정적 인프라는 세계적으로도 앞선 선진강대국에

정치도 동아시아에서 공론정치를 유일하게 제대로 편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