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제이.
오랑캐로 다른 오랑캐를 막는다.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냐 할 것 이다.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끊임 없이 자신들이 다스려야 하는 거대한 대중을 분열 시킨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90년대 민주노총이 발족하고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란 것의 단초가 던져 졌을 때,
그들은 '귀족 노조'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대중은 그에 혹해 서로 싸우기 바빴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겪으면서 점차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잡아가던 이들에게는
'386세대'라는 단어의 대대적인 보급을 통해 타세대와이 간극을 만들어 나갔다.
대중은 그저 'X세대'나 '보릿고개세대' 같은 단어의 의미로 받아 들였지만,
점차 그것은 세대 간의 갈등을 만들어 내는 단어가 되어 갔다.
응집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대중 만큼 의도한 대로 지배하기 쉬운 것은 없다.
힘들여 나서서 싸우지 않아도,
여건만 조성해 주면 서로 물어 뜯고 싸우며 본질을 잊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청년'으로 시작하는 문제들이 누적되어 폭발할 지경이 되고,
그런 세상에 대한 불만들이 세대를 불문하고 커져 가자 드디어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 너희들은 특별한 노력없이도 이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는데,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가?
이제 좀 내놔라. "
일견 겉으로 보기에는 타당해 보일 지 모른다.
'너희'라 지칭되는 세대들은 이미 기득권(?) 세대에 포함되어 있고,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너희'가 속한 세대가 '기득권'에 속해 있다라고 한다는 것이
'너희'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너희'의 다수는 여전히 기득권이 아니며,
그들이 별 노력 없이 누렸다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세대의 구분없이 누릴 것 이상을 누리고 또 누려 왔다.
여전히 '너희'나 '우리'의 대부분은 그들 소수가 아닌 다수일 뿐 이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기득권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 갔다고 기득권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다.
원래 기득권이었던 자들이 그대로 기득권이 되는 것 이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만이 기존 기득권에서 탈락한 이들의 빈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뿐 이다.
그 기득권에는 세대 구별이 없다.
단지 기득권이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존재할 뿐 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대중은 세대로 편을 갈라
나와 별다를 바 없는 이들과 서로 갈등을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나이만 다른 또 다른 우리가 아닌 언제나 처럼 그 자리에 있는 저들일 뿐 이다.
얼마 전 어떤 성우가 자기 고백적인 트윗을 날렸단다.
그러나 그 성우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 시절이 정말 그러 했던가?
불과 20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100만명 가까운 수험생 중에
이름 조차 들어본 적 없는 전문대까지 다 포함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인원은 물과 3-40%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당시는 대학생이란 사실 하나 만으로도 다른 이들의 남다른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시기였다.
그 시절이 취업이 더 쉬웠다는 것은 단순히 소위 '특별'했던 당시의 대학생과 '흔한' 지금의 대학생을
동일한 기준으로 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너희'들이 지금 소위 '기득권'이란 것을 누리고 있을까?
내 생각에는 별로 많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 이다.
" 지금 회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놈팽이들이 그런 기득권들이 아니요? "
그러나 묻고 싶다.
" 그렇다면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는 모두 회사에서 퇴출되고 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 이요? "
핵심은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이지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조작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조작된 허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소수의 그들은 즐겁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