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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28 21:48
기독교와 고대이방종교와의 차이점 - 3
 글쓴이 : 청춘별곡
조회 : 658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함).


 이슬람교 이전의 고대 이란 종교.

 고립된 지역과 특히 인도에서 번성했다. 인도에는 '파르시' 또는 '파르세'로 불리는 이란 조로아스터교도 이주자들의 후손이 남아 있다. BC 6세기에 이란의 예언자·종교개혁가인 자라투스트라(영어명:Zoroaster)가 창시했으며 다른 서양종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유일신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성격을 띤다.


 자라투스트라의 개혁은 그가 태어나고 교육받은 전통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그당시 사회는 족장과 사제계급, 전사계급 농부와 목축업자 계급 등 3계급으로 구분된 듯하다. 이 계급구조는 종교에도 반영되어 특정 신들, 즉 다이바(천상의 존재)들이 3계급과 각기 관련되었다. 예를 들면 미트라와 바루나를 위시한 아후라('主')들은 제1계급과 관련되었다.

 

자라투스트라는 한 아후라, 즉 아후라 마즈다('지혜의 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최초로 아후라 마즈다를 선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신은 다리우스 1세(BC 522~486 재위)의 위대한 신으로 등장하는데, 다리우스가 자라투스트라의 제자를 통해 이 신을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자라투스트라의 교리체계에서 악의 근원은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 아들이 영원한 경쟁관계에 들어선 태초의 창조 때 자유의지를 행사한 것으로 소급된다. 한 아들인 스펜타 마이뉴('자애로운 영')는 선을 선택하여 진리·정의·생명의 속성을 얻는다. 또 하나의 아들인 앙그라 마이뉴('파괴의 영')는 악을 선택하여 그에 수반되는 파괴·불의·죽음의 힘을 얻는다. 자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세계는 얼마 뒤 대화재로 소멸되고, 선의 추종자들만이 새 창조에 동참하기 위해 부활한다. 새 창조가 일어날 때까지 죽은 자의 영혼은 보응의 다리를 건너는데 선한 자는 천국으로 사악한 자는 지옥으로 가기 위해 기다린다.


후대의 조로아스터교 우주론은 세계의 역사를 각기 3,000년씩 4시기로 구분되는 광대한 드라마로 인식한다. 무한한 시간 안에서 빛에 거주하는 오르마즈드와 그의 아래 어둠에 거주하는 아흐리만은 무한한 시간 동안 서로 공존한다. 첫 3,000년이 끝날 때 아흐리만은 그들을 갈라놓았던 공허를 건너 오르마즈드를 공격했다. 오르마즈드는 투쟁기간을 줄이려는 아흐리만과 한시적으로 협정을 맺지 않으면 투쟁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았다. 오르마즈드는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가장 경건한 기도인 아후나 바이랴를 암송한다. 아흐리만은 혼비백산하여 심연으로 후퇴한 뒤, 다음 3,00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오르마즈드는 먼저 자애로운 불멸자를 비롯한 영적인 존재를 창조한 뒤, 그에 상응하는 물질인 하늘·물·땅·식물 및 최초의 황소와 최초의 인간(Gayōmart)을 창조한다. 그 다음 오르마즈드가 인간의 선재 영혼(fravashis)을 향해 초기 상태에 영원히 머물든가, 아흐리만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물질 세계로 화육(化肉)하든가 선택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들은 탄생과 전투를 선택한다. 한편 아흐리만은 여섯 마귀와 물질적인 창조를 했다.


2번째 3,000년이 끝날 때 아흐리만은 최초의 여자인 창녀의 유혹을 받아 하늘을 찢고 오르마즈드의 창조물을 타락시켰다. 아흐리만이 마가요마르트를 죽이자 그의 몸에서 인간과 광물이 나왔고, 황소를 죽이자 그 몸에서 동물과 식물이 나왔다. 3번째 기간에 아흐리만은 물질세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르마즈드가 만든 함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운명에 처했다. 마지막 3,000년이 시작되자 지상에 종교가 도래했다. 그것은 자라투스트라의 탄생이었다. 1,000년 주기가 끝날 때에는 자라투스트라의 계승자요, 사후에 낳은 아들인 새로운 구원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3번째로 등장한 마지막 구원자인 사오시안스는 마지막 심판을 행하고, 불멸의 음료수를 분배하며, 새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무한한 시간에서 비롯된 유한한 시간은 1만 2,000년이 지난 뒤 무한한 시간과 융합된다.


조로아스터교의 문서들은 2가지로 뚜렷이 구분된다. 본래의 경전인 〈아베스타 Avesta〉는 아베스타어로 불리는 고대 이란어로 기록되었고, 그보다 훨씬 후대의 본문은 중기 페르시아 방언인 팔래비어 또는 페르시아어로 씌어졌다. 자라투스트라가 죽은 뒤 그의 종교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남쪽으로 서서히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메대와 페르시아 영토로 전파되었다. 이렇게 전파되는 동안 조로아스터교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남신·여신을 숭배하던 고대종교와 혼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BC 599~330)에 진행된 듯한 이 혼합 과정은 〈아베스타〉 후반부에 반영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BC 330) 뒤 약 4세기가 지났을 때 이란은 다소 헬레니즘화되었고 토착종교는 무시되었다. 그결과 조로아스터교의 부흥은 아르사시드 제국, 즉 파르티아 제국(BC 247~AD 224) 말엽에 가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AD 224년 민족주체성을 확립한 새로운 페르시아 왕조인 사산 왕조가 출현하여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 왕조의 지배계급은 상당한 권력을 소유했고, 다른 종교들(그리스도교·마니교·불교)을 박해했다. 〈아베스타〉가 편찬되었고, 일상어인 팔래비어로 번역·주석되었다. 아케메네스 통치기간에 〈가타〉의 유일신론 체계는 점차 마즈다교의 이원론적 교리로 대체되어 마침내 정통 교리가 되었다. 이슬람의 지배 아래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설득과 강요를 받았지만, 조로아스터교는 어느 정도 관용의 대상이 되어 약 3세기 동안 그 핵심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8~10세기에 종교 박해가 일어나고 이슬람교 개종이 강요되자, 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이란을 떠나 인도로 가서 대부분 봄베이 지역에 정착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르시라고 불린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부·교육·자선으로 유명해졌다. 19세기 파르시들은 이란에 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가바르)과 새로이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 2개 집단과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들만이 오늘날까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조로아스터교 예배는 신전의 불을 돌보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미트라교(Mithraism)


조로아스터교 이전 이란의 태양·정의·계약·전쟁의 신인 미트라를 숭배하는 종교.


개요

2, 3세기 로마 제국에서 미트라스로 알려진 이 신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후원자로 존경받았다. 4세기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 미트라교는 급속히 쇠퇴했다(→ 페르시아).


역사

조로아스터 이전에(BC 6세기나 그 이전) 이란인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미트라는 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계약과 상호간의 의무의 신으로 히타이트인과 미탄니인 사이의 조약을 담고 있는 설형문자판에서 서약의 신으로 나타난다(→ 선서). 더욱이 인도의 몇몇 베다 문서에는 신 미트라(Mitra:미트라의 인도식 표기)가 '친구'와 '계약'으로 묘사된다. 미트라란 단어는 계약과 상호간의 의무가 친구를 만들기 때문에 양자 모두를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미트라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와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미트라는 중재자로 불렸다. 또한 미트라는 태양의 신이며 만물을 품은 빛나는 빛의 신이어서 맹세의 대상이었고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미트라를 태양신으로 간주했으며, 왕들의 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태양숭배). 왕과 왕의 전사 사이의 쌍무(雙務) 신이자 전쟁신이었으며, 왕이 보증하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정의와 계약을 준수할 때는 언제든지 미트라를 경배했다(→ 힌두교, 베다).


가장 중요한 미트라 의식은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희생제의). 이 의식의 기원이 조로아스터교 이전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나 조로아스터는 황소의 희생제물을 비난했기에 그 의식은 고대 이란의 우상숭배의 일부였던 것 같다. 이러한 추론은 미트라가 흰 황소나 달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소마라는 이름을 가진 신의 희생에 마지못해 참여하곤 했다는 내용의 인도 문서에 의해 확인되었다. 로마의 기념비들에 따르면, 미트라는 나중에 달로 변형되는 흰 황소를 마지못해 제물로 바친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이 유사한 점으로 볼 때 희생제물은 조로아스터교 이전에 행해졌음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조약은 공동 식사를 통해 승인되었기 때문에 계약과 제물이 연결된다(→ 소).


다리우스(BC 522~486)에서 시작되는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왕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그러나 다리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다수의 귀족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존중하는 옛 신앙을 근절시켜 정치적인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는 점차 오래된 다신론적인 예배 요소에 물들었다. 찬송가(Yasht)는 옛 신들을 기리며 작곡되었는데, 거기에는 만물을 주의깊게 보는 천상의 빛의 신, 서약을 보호하는 자, 이승과 저승에서 의로움을 수호하는 자, 무엇보다도 악과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는 자이며, 그래서 전쟁과 승리의 신으로 미트라를 찬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야슈츠,아베스타, 이원론). 그러나 후기 아케메네스 시대의 혼합종교에서는 분명히 조로아스터교의 양상이 이교도적인 양상을 지배하여, 모든 조로아스터교도가 거부했던 황소 희생제물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BC 330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을 때, 사회의 옛 구조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페르시아의 미트라 예배도 더이상 볼 수 없었다.


전기 페르시아 제국 서부의 지역 귀족들은 미트라 숭배를 존속시켰고 그리스 로마와 이란 세계 사이 경계지역의 왕과 귀족은 여전히 미트라를 예배했다. 아르메니아의 티리다테스가 로마 황제 네로를 자신의 최고 주인으로 승인했을 때 그는 계약과 우정의 신이 아르메니아와 강력한 로마 사이에 좋은 관계를 확립시켜 줄 것을 기원하면서 미트라 의식을 치렀다. 콤마게네(터키의 남동쪽)의 왕들은 미트라 의식을 거행했고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도 그 신의 숭배자였으며 동맹자인 실리시아의 해적들도 미트라 의식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BC 67). 반면 그리스 세계에서는 미트라 숭배가 전혀 인기가 없었는데 그리스인들은 미트라가 자신들의 적인 페르시아 신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헬레니즘 종교, 밀의종교).


2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 세계는 페르시아의 신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나 136년 이후로는 미트라에게 바쳐진 수백 개의 비문이 나타났다. 이러한 관심이 되살아난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없다. 가장 그럴듯한 가설에 따르면 100년경 생존했던 어떤 종교적 천재가 전통 페르시아 의식을 신(新)플라톤적으로 해석하여 미트라교가 로마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했기 때문에 로마의 미트라교는 실제로 새로 창조된 것이다(→ 로마 종교). 이란의 미트라교와 같이 로마의 미트라교도 왕에게 충성하는 종교였고 콤모두스(180~19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카라칼라(211~217) 같은 황제들에 의해서 권장되었다. 비문을 통해 알려진 미트라 신봉자들은 신이 자신들을 승진시켜 주리라 믿었던 하급 및 고급 군인, 황제에게 봉사하는 공직자, 제국의 노예와 자유인(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음)들이었다(→ 교회와 국가).


미트라에게 바쳐진 신전과 봉헌물은 로마와 오스티아에서, 군사적 변경을 따라서는 영국, 라인·도나우·유프라테스 강에 수없이 많이 있다. 평화로운 지역에서는 봉헌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봉헌자가 있다면 지방의 통치자나 제국의 공직자였다. 로마 세계는 몇 세대 안 가서 페르시아의 이 신에게 완전히 동화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의 도시와 종교를 부활시켜려고 했을 때 미트라를 잊지 않았다. 307년 카르눈툼(빈 근처의 도나우 강가에 있음)의 봉헌식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동료들은 제국의 보호자(fautori imperii sui)인 미트라에게 제단을 봉헌했다.


 그러나 312년 콘스탄티누스십자가를 기치로 밀비아교(橋) 전투에서 이겼다. 미트라 의식을 즉각 공식적으로 금지시키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곧 미트라에 대한 헌신을 그만두었고 제국이 미트라교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가 갑자기 쇠퇴했다. 미트라에 대한 헌신이 357년과 387년 사이에 다시 나타난 것은 사실이나 단지 로마에서뿐이었다. 로마 시의 오래된 이방인 귀족 출신의 봉헌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교 황제를 공공연히 반대했지만 미트라는 여러 이방신 중 하나로 격하되었고 그 신비의식은 점차로 사라졌다. 로마인 반대자들이 패배했을 때, 이방신의 예배도 모두 금지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화와 신학

세상의 창조는 미트라교의 중심이 되는 신화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이 자신의 사자(使者) 갈가마귀를 미트라에게 보내어 황소를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미트라는 마지못해 그 명령을 수행했는데 여러 부조에서 그는 슬픔에 잠겨 얼굴을 돌린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황소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커다란 기적이 일어나 그 흰 황소가 달로 변했고, 미트라의 외투가 빛나는 행성과 고정된 별이 있는 하늘의 둥근 천장으로 변했으며 황소의 꼬리와 그의 피에서 낟알의 첫 이삭과 포도가, 동물 생식기에서는 신성한 종자들이 나와 그것들을 뒤섞는 그릇에 받게 된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 신성한 종자들이 섞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미트라의 한 찬송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당신은 영원한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식물과 나무가 창조되었고 낮과 밤이 교차하고 달이 주기를 갖추었으며 계절이 한 해를 통해 둥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시간이 창조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빛으로 깨어난 어둠의 동물들이 땅에 나타났다. 뱀 한 마리가 황소의 피를 핥았고, 전갈 한 마리가 생식기에서 나온 신선한 종자를 빨아먹으려고 했다. 부조에서는 종종 사자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황소의 죽음과 세상의 창조로 선과 악의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인생의 상황이다. 갈가마귀는 공기를, 사자는 을, 뱀은 을, 뒤섞는 그릇은 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 4가지 요소가 존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황소를 희생시킨 뒤에, 미트라와 태양신은 함께 연회를 베풀어 고기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뒤 미트라는 태양신의 전차에 올라타 대양을 건너 공중에서 세상 끝까지 몰고갔다(→ 창조신화).


로마의 미트라교도들은 신화를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의 〈국가론 Republic〉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처럼 세상의 형상인 동굴 안에서 제물의 희생이 이루어졌다. 미트라는 〈대화 Timaeus〉의 조물주(데미우르고스)와 같게 되었고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데미우르고스와 만물의 아버지'로 불렸다. 4가지 요소들, 섞는 그릇, 시간의 창조, 새로 탄생한 피조물에 대한 흉악한 동물들의 공격은 〈대화〉의 유명한 특징이다. 미트라의 영혼에 대한 교리는 창조신화 및 플라톤 철학과 의도적으로 결합되었다. 〈대화〉에서처럼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면서 행성의 악(예를 들면 화성과 금성)을 타고 그 일곱 영역을 건너와 마침내 육체 속에 갇혔다. 인간의 과제는 그의 신격의 일부인 영혼을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일곱 영역을 통해 붙박힌 별들의 영원불변한 영역까지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이런 하늘로의 상승은 미트라가 태양신의 전차로 지구를 떠났을 때 미트라 자신이 예시한 것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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