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그런말이 있죠!
사랑이 없는 곳에 예수가 사랑을 설파하고, 자비가 없는 곳에 부처가 자비를 설파하고
예의가 없는 곳에 공자가 예를 설파했다고..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정작 가는 곳마다 분열과 분쟁, 전쟁과 싸움을 만들어냅니다.
종교를 빌미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죠.
종교를 이유로 학살한 사람의 수는 다른 종교를 압도하죠.
로마가 모든 종교에 관대했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를 규제하고 나섰습니다.
물론 종교가 아니라 그들의 전도 행위만을 규제한거긴 하지만요.
(군대와 같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전도 행위 같은 경우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전도 행위. 등등)
사랑을 강조했지만, 문제는 구조적으로 사랑의 실천이 불가능한 교리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여럿 있겠지만, 예수는 아가페적 사랑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를 금하는 십계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단지 믿음의 대상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종교가 어떤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종교가 그 사람을 규정해버리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종교 체인지는 그사람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엄청난 사건이겠죠.
그런데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와서 다른이에게 배교를 종용합니다.
(그냥 종용이라면 그나마 이해해줄수 있지만, 남의 종교를 비방하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헐뜯고 인격적 모욕도 서슴치 않으면서, 자신들은 사랑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요새, 자신들이 했던거처럼 남들에게 당하니 열받는거죠! 자기 자신을 몰라서 생기는 일입니다.)
물론 아무 종교도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종교는 조직력을 기반하게 됩니다.
조직력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죠.
바로 이 조직력으로 세력을 생성했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력은 돈에서 나옵니다.
(수입적 의미의 돈과, 세출을 억제하는 돈(세금 안내는..) 으로 조직력을 유지,발전 시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카톨릭처럼 전체 덩어리가 아니고 개별 사업자 구조입니다.
자신의 조직은 자신이 조직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조직을 생성, 유지, 발전시키려면 "사랑" 따위로는 먹히지가 않습니다.
결국 교모한 짜집기로 하늘에 내는 세금,
복을 얻고 해를 피하기 위한 굿판 비용,
있지도 않은 악을 만들어 놓고 선을 파는 행위,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한 충성의 대가
등과 같은 메뉴얼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메뉴얼들을 어린시절 부터 세뇌시킵니다.
이의 반발에 대한 처리 메뉴얼도 있습니다. (반발은 곧 불신앙)
(신학이란 바로 이런 메뉴얼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예수의 간판을 단 쓴 사적 조직체입니다.
바로 이 조직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조직의 간판을 통해 세를 과시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바로 그 조직이 비판받을때 반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우상"이라고 부르죠.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개신교의 소위 일부의 일탈은 이런 구조적 바탕위에서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입니다.
단지 일부의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개신교가 바뀌려면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구조를 바꾸는 순간 조직은 붕괴합니다.
앞이 막힌 수도관속에 갇힌 뱀처럼 천천히 말라죽는거죠.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독사와 같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걸 보면 어떨까 싶네요!
그리고 그 바리새인의 끝은 성전의 벽돌 한장까지도 남지 않는 철저한 파괴였습니다.
물론 개신교가 여전히 우리나라 민간복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문제가 있는 부분이 많음에도 여전히 봉사와 기부에 가장 열심인 조직인건 맞습니다.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대리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정부의 복지정책이 확대될수록 개신교의 역할은 없어지겠지만.)
이는 과거 고려시대 불교가 지방행정, 지방복지, 교육 등을 대행했던 것과 동일한 케이스입니다.
돈과 조직력이 있어 가능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