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을 참여해달라는 기독교와 천도교 연합이 와서 설득할때 그들의 말을 듣고 유일하게 승락해준 고마운 승려다.
백용성과 한용운 두분이 없었다면, 불교는 오늘날 더욱 욕 먹는 불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몹시 싫어하여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주최하고 있을때, 불교는 친일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당시 조선총독부는 친일 불교를 지지하였다. 불교 자체가 친일 세력이었고, 불교는 강력한 친일 세력으로 뭉쳐 있었다.
한용운은 그들을 설득했지만,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후
1919년 친일불교세력에 대항하여 한용운(韓龍雲)·박한영(朴漢泳) 등이 조선선종교당(朝鮮禪宗敎堂)에서 조직한 조선불교청년회가 모체이다. 1920년 6월 각황사(覺皇寺)에서 전국 31개 본산대표들과 도진호(都鎭浩) 등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들이 불교를 통한 민족의식 각성과 조국광복 실현이라는 한용운의 정신을 받들어 31명의 대표간사를 뽑은 뒤 1924년 1월 6일 감옥에서 출감한 한용운을 초대총재에 추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