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안병직 지난 1989년 및 1992년에 Jap 도요타 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식민지 연구를 수행<근대조선의 경제구조>(이하 1989년 연구)와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이하 1992년 연구)발행. '1차 공동연구'로 불리는 전자(前者)는 Jap 학자 7명과 한국 학자 6명의 공저, 후자(後者)는 양국 각각 2명 도합 4명의 공저다. 총14명이 이 작업에 참여.
이 책들은 오늘날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여기서 나카무라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핵심 인물, 외 한국 학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아성인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주요 멤버들.
1910~2005년 사이 실질임금, 농업인구와 제조업 취업자수, 도시화율 등의 통계를 함께 견줘 보면, 남한에서 루이스 전환점은 1960년대 중엽께 나타났다. 1차산업 비중의 감소를 경제발전 척도로 본 클라크의 산업구조, 중공업 비중으로 경제성장을 분석한 호프만의 공업구조, 엥겔계수 등의 지표들 역시 1960년대 앞뒤로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고 한다.
60년대 앞뒤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허 교수는 “해방과 함께 ‘식민지적 경제구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식민지적 경제구조란 소수의 일본인이 생산수단인 경지, 인적·물적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런 구조 아래에서 조선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점차 배제되어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전환됐고, 민족·학력 차별로 인한 식민지적 고용구조 탓에 임금노동자 가운데에서도 최저변을 형성하는데 그쳤다.>>
해방은 이런 구조를 뒤바꾼 획기적인 일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교육은 양적으로 폭발적으로 팽창했고, 농지개혁은 일제강점기 자본주의적 외형 아래에서 오히려 확대 강화된 전근대적 소작제도를 일소해 농업혁명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이런 획기적 변화는 그 뒤 공업혁명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뤄진 변화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으며, “조선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된 것이 모든 변화의 전제조건”이었다고 그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