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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04 23:28
조선이 속국이라는 결정적인 증거
 글쓴이 : 가게이
조회 : 2,105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정도전 저술 삼봉집 조선경국전 국호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3FbizName=MK%26seojiId=kc_mk_g004

해동(海東)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ㆍ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박씨(朴氏)ㆍ석씨(昔氏)ㆍ김씨(金氏)가 서로 이어 신라(新羅)라고 일컬었으며, 온조(溫祚)는 앞서 백제(百濟)라고 일컫고, 진훤(甄萱)은 뒤에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라고 일컫고, 궁예(弓裔)는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일컬었으며, 왕씨(王氏)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으니 비록 호칭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취할 게 있겠는가? 단 기자만은 주무왕(周武王)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天子 명태조(明太祖)를 가리킴)가,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
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條)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공자가,
라고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요약 : 중국 황제의 땅을 몰래 탈취해서 국호와 왕을 자칭한 과거의 오랑캐들과는 다르게 중국황제가 조선왕을 책봉하고 조선이란 국호를 하사해서 주나라 무왕이 책봉한 기자를 계승해서 자랑스럽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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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4-11-04 23:30
   
ㅋㅋㅋ 아구. 이건 뭔 전범잽 극우들 알량한 드립 패턴에 단골로 나오는 소스하군 ㅋ. 한심해서리. ㅋ
열하나 14-11-04 23:31
   
책봉관계가 속국이면 명나라에게 책봉받았던 무로마치 시기의 일본은요? 그건 차마 속국이라고 못하나요?
버킹검 14-11-04 23:36
   
과거의 속국의 개념을 모르네...공부 좀 더해라...짜샤...^^;;
굿잡스 14-11-04 23:36
   
참고로 기자 동래설에 관련한 청동문화는 요동이나 남북한 일대도 아니고

요서일대에서 발견되는 건 아심? ㅋ 아구 좋아라~ 울나라가 요서와 하북일대도 아우러고 있었던

겁니까? ㅋ
구경꾼 14-11-04 23:40
   
반만년 노예생활한 한족보다는
명목상 속국이래도 취할 이득 다 취하고 단물만 빼먹으며 멀쩡하게 왕조 잘 유지하고 버텨온 한국이 낫습니다.
개떡 14-11-04 23:45
   
그냥 이름만 속국일 뿐이죠.
조선은 자신의 의지대로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하고 대마도와 만주의 여진족을 토벌하려고 스스로 군대를 움직인 국가입니다.
오히려 조선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명나라가 쏟아부은 돈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면 속국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뱉지 못할텐데...
갑툭튀 14-11-04 23:47
   
고려 이성계가 요임금때 당시에 나라를 세운 단군의 땅인 요동을 정벌하는데에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 지키게 하였으므로 요동은 원래 우리땅! 이라는 명분세우기를
했죠. 이는 정도전과 그 말년에 요동정벌을 계속 꾀한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공-책봉 시스템=속국 이라는 대전제가 논란인거죠.
애초에 조공-책봉 시스템만으로 사대관계를 넘어 속국이며 자주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동북공정의 핵심논리가 한국인이 증거로 드리밀고있네요
mymiky 14-11-04 23:48
   
뭘 어쩌라는건지?-.-
조선 이름만 예쁘구만 ㅋㅋㅋ
일본은 백제꺼 그대로 뺏겨쓰는 주제에 말이 많네 ㅋㅋㅋ
유래인 14-11-04 23:49
   
형식만 속국으로 보일뿐인지 사실상 명이 조선의 내정을 직접적으로 간섭하지도 못했습니다.

사대외교는 국방, 경제적이익을 위한 쌍방전략적 외교방법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익은 조선이 더 컸습니다.

명은 조선에 조공받으면 그 몇배나 되는 금액으로 다시 하사를 했어요.

큰 나라가 작은나라에 베풀어야 한다는게 유교적 관념이이었으니까요.

일종에 돈주고 절받는거죠
nests 14-11-04 23:54
   
출처
:정도전 저술 삼봉집 조선경국전

오늘부터 정도전은 일본인취급당하나요...ㅋㅋㅋㅋㅋㅋ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더만 정도전을 모르는건가 출처를 못본건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2798
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mymiky 14-11-04 23:58
   
삼봉집이란건 알겠고,, 그렇더라도
백제를 나타내는 일본이란 국호를 낼름 표절해 쓰는 일본이 할말은 아니죠-.-
굿잡스 14-11-05 00:25
   
전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東胡;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후한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북위때(남북조)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 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됐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홍원탁 (서울대 교수)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 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 통치 체제의 장점을 살려,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1 모용 선비족은 탁발의 북위(386-534)조정 내에 주요 지배귀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변경지대의 한족들은 어느 때고 초원 혹은 삼림지대 출신의 이민족 부족 중 제일 강하다고 생각되는 편에 붙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2

부족 출신 군대 덕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히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3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하였다.

중국대륙 북부의 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당나라

수나라가 고구려에 대패하고 망하자 체력을 보존하고 있든 돌궐이 남하하여 휘젖자

당나라 이연과 이세민도 위수지맹으로 신하로 칭하면서 돌궐에 조공을 바쳤고

토번에게도 털리자 공주부터 공물을 갖다 바쳤다.




요나라때


거란(요나라)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공물을 바쳤다.



금나라

송은 금(金)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흠종,휘종 두군주가 만주로 압송되었다.

기어 내라가 세운 남송은 몽골제국(원元)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원나라때

몽고족은 제1신분으로서 통치하고 색목인(위구르인, 아랍인등)이 제 2신분이었고 다음은 서토에 살았던

거란, 선비족등은 3신분을 차지하고 끝까지 원의 지배에 항쟁했던 남송인이(한족) 4신분으로 특히 차별을 받

으며 노예 계층으로 분류했다.. 원은 몽골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했고, 과거제를 폐지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서토인의 정치진출을 막았으면 사고파는 물건과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때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팔기는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군대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때를 보인 것입니다』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임계순교수의 `淸史'

청나라는  만주족은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 시키기 위해 변발을 강요했고 이에 반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 정사의 실제 기록>

남북조시대의  기마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사기> <흉노전>에는

흉노를 호라 하고, 예맥 조선을 동호라 하였고,- 흉노가 동호를 하

북성으로 밀어내게 되는데 동호 ,예맥, 조선은 사기의 흉노열전,

조선열전, 소진열전에서 다르게 이칭 하지만 그 방향과 위치는 같

다. 즉 동호를 고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이후 후대

< 위지 동이전>에는 동호의(고조선) 후손이 선비, 오환이라 하고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고 하여  선비, 오환, 부여, 고구려 등을

다르지 않는 갈래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선비 부여 고구려등을 동이 열전에서 함께 분류하고 있다.
     
nests 14-11-05 08:33
   
진짜 혀는 더럽기 길어요.
쓰잘데 없이 복붙하지말고 니 의견좀 말하세요.
조공바친다고 다 속국이 아니다라고 계속헛소리중이신데
누가 조공 하나가지고 속국이라고 주장하던가요?
벽이네 벽이야...
          
굿잡스 14-11-05 12:01
   
ㅋㅋ 왜 속이 불편하심? ㅋ
거참 14-11-05 01:03
   
이상하게 일본을 빠는 인간들이 안 없어지네.

그것도 현실에선 틀림없이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것들이...참...
백미호 14-11-05 02:01
   
이런글에 대꾸해봤자 소용이나 있나요. 어차피 자기가 밀릴것같다 싶으면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또 다른 분탕글 파기 바쁜게 베짱이들이죠.
모니터회원 14-11-05 04:10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201&docId=174209903&qb=7KCV64+E7KCEIOyhsOyEoOq1re2Yu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aCA0dpySEdssvZ0oYlsssssssK-497929&sid=sby51wn9mrCbzwxRUFYsoA%3D%3D

왜곡도 적당히...

명태조에게 조선을 인정받기위해 슬쩍 띄워주는것뿐 어디에도 속국으로 자처하는 문자는 없습니다.

"명태조가 주나라 무왕처럼 덕이 있듯이 이성계가 기자처럼 덕이 있어 8조의교를 다시시행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덕치를 하겠다는 의지이지 속국을 표방한것은 아닙니다.
     
nests 14-11-05 08:36
   
본문에도 속국을 자처했다고 왜곡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허수아비치지마시구요...

저 본문내용만 놓고보면 딱 속국수준인데요.
물론 그걸 잘 포장해서 (조공이 아니라 무역이야 찌질찌질...) 앙 덕치를 하겠단 뜻입니다...라고 하는 아픈 마음이야 이해는 가지만 그런 내용이 아닌데요.
"명나라님 저희좀 인정해주세요 제발요...옛 기자처럼 님들께 인정받은 정통성있는 왕조가 되고시퍼요...제발요..." 이거죠.
Gemini 14-11-05 04:11
   
그러니까 약을 먹으라고
자폐증 14-11-05 07:33
   
재밌네요..
그럼 거란의 요가 강성했을때 왕자 공주 끌려가고 천도해서 도망가며 매해 거액을 바쳐가며
전쟁을 막고 있던 남송은 요에 "세폐" 를 주었다고 표현하니..
요가 수도를 함락시키고 돈받아가며 목숨만 붙여주고 있었어도 남송의 속국이네요?
흉노에 공주 바치면서 빌빌대던 시기 한도 역시 세폐를 내렸다 하니 흉노도 한의 속국이고..
야 재밌다..

보는 눈이 짧으면 입도 같이 짧으면 얼마나 좋아..
     
nests 14-11-05 08:37
   
이렇게 조선인은 허수아비를 치는데....

이러니 국뽕국뽕 그러지...

조공하나가지고 속국얘기하는게 아니잖아요
nests 14-11-05 08:38
   
논쟁 흘러가는 꼬라지를 보니 잘 알겠네요.
국뽕들이 나라사랑하는 마음만큼 통렬한 반박을 해주길 기대했는데
이건 뭐 허수아비나 치고 있고...에휴...
     
햄돌 14-11-05 16:33
   
아니라고 우기지만말고 근거를 내세우던가 해야지

끝까지 틀렸다고 발악하면 누가 알아주나?

하여간 정신수준은 byung신 같아갖고 니도 참 딱하다

그렇게 계속 정신승리나 해라
자폐증 14-11-05 09:12
   
같은 맥락임.
성리학에 찌든 조선의 신진사대부란 작자들이 중화의 도를 본받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건 말았건..
황제의 인정을 받은 나라를 칭한다 함은
중화에 기반을둔 국제 관계의 룰에 들어가겠다는 말일뿐 그걸두고 속국운운하는건 근거가 희박 그자체라는말임.
은 주 이래로 중국을 중심에 두고 동아시아에 편성된 국제 관계의 '형식상' 고착이
황제의 덕을 받잡고.. 조공을 바치고.. 세폐를 내려받는다는 이야기로 가는것뿐
그걸 임명을 받고 짜르고 나라를 세워주고 말고 하는 그런 관계로 인식한다는게
눈이 짧다는 말입니다.
자폐증 14-11-05 09:18
   
참고로 이성계가 쿠데타로 폐가입진을 한답시고 왕을끌어내리고 새왕을 세우고 절대권력을
쥐고도 만족못해서 역성까지 한마당이라
역적왕조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뭐든 끌어다 붙여서 나는 정통이다를 주장해야하던때 글임.
정통성을 세우려면 김일성이가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핏줄로 솔방울로 수류탄도 만드는 마당인데
형식상의 정통을 주장하기 위해서 황제의 인정을 받는게 대수겠소?
자폐증 14-11-05 09:41
   
조선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우리나라는 중국 천자의 분봉국(分封國)이 아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개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환단((원,환)壇)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이 전통에 따라 세종도 원년에 환단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에 신하를 보내 제사지냈다. 세종 7년 9월 25일, 평양에 들른 정척(鄭陟)은 단군조선이 기자조선보다 시기상 앞서는데도 불구하고 오가는 중국 사신들이 참배하는 기자사당 안의 단군신위가 곁방살이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문제 삼아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단군신위를 남향하게 하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대로 제사하게 하는 것이 왕조의 체통에 맞는 일”이라는 글을 올렸고 세종은 즉시 이를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0년 8월 9일에 임금은 승지 서형수(徐瀅修)에게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고 단군묘의 알뜰한 관리를 명했다. “신이 강동(江東)에서 벼슬할 때 고을 서쪽 300리쯤에 둘레가 4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는데 고을 노인들이 단군묘라 했고, 이는 유형원이 쓴 ‘여지지(輿地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중국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신령이 되었다는 황제(黃帝)가 교산(喬山)에 신발을 남겼고, 공동산(공동山)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믿고 이를 전하고 있는 터이니, 이렇게 전해지는 국조의 묘에 대한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흠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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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단군의 사당이 세워진 이래 중국 사신이 오면 항상 단군사당부터 들러서 기자사당으로 가게 했지요.
역적왕조가 인정받기위해 명에 딸랑거리다 안정되니 입싹닦은걸로 봐도 좋은데
적어도 조선내부의 인식은 중국의 인정을 받는걸 필요할때 하면 되는 일로 봤지 속국이라는 인식은 없었다는 말임.

내가 역사상 이완용이보다 싫어하는 이씨놈들 셋이 이성계, 이자겸, 이승만인데..
이성계 그작자가 딸랑거린거랑 조선이 속국이라는거랑은 다른 문제란 말이오.
초대 대통령 해먹으려고 이승만이가 부족한 입지때문에 미국에 딸랑거렸다고 우리나라가 미국의 속국이 아닌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