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이슈 게시판
 
작성일 : 14-11-03 18:59
사실 말이 나온김에, 조선말의 나라 기울어가는 상황은.
 글쓴이 : 야스나가
조회 : 610  

솔직히,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말보다도 훨씬 심하지 않아요?
일제가 안건드렸으면, 우리끼리 자립해서 발전했을거라는 가정은...

통인신라를 꺾은 당시의 역적인 왕건이나, 고려를 꺾은 당시의 역적인 이성계에게도
해당하는 거 아닙니까?

특히나, 고려말엔 공민왕이 원에게 지배다아 쇠약해진 나라를 많은 부분 개혁을 단행해
점차 회생시켜가고 있는 무렵이었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사견이지만,
이성계가 명분이야 백성을 위한다지. 제가 보기엔 자기 사리사욕으로
역적질을 한 거 아닙니까?

아니 그 반증으로, 조선시대가 되서도 백성들이 나아진게 있느냔 말이죠.
중국의 속국 노릇이나 하고, 민생은 고달프며 왜란,호란의 고통에다가
그럼에도 정신못차리고,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들이 백성들 고혈을 빨고
수탈하다가, 나라는 더더욱 기울어만 가고.

결국엔 일본에 먹힌거 아니에요?

아니, 뭐 우리역사에 훌륭하달 사람이 없어서, 
고종까지 치켜올려줘야 하나?

참나... 씁쓸하구만?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야스나가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행운과일 14-11-03 19:06
   
조옷까는 소리하지말고 디비자라!!!!!
투기꾼 14-11-03 19:10
   
1번. 여말선초에 관한 시대적 상황, 의식적인 문제는 '건국의 정치'라는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함.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나오지만 조선이 건국된건 단순히 힘에 의한 무력찬탈보다는 고려말개혁노선과 당대의 시대적 문제가 합쳐져서임. 힘이 있다고 정이대장군이 되어서 자국왕을 무시하면서 정치를 펼치는 것과 달리 그만큼 조선은 명분이 중요했다라는 말. 이성계는 그 때에 전쟁잘하는 마스코트에 불과했고 조선을 세운건 정도전과 혁명노선임. 조선은 전무후무하게 혁명적 계기로 건국을 한 특이한 케이스임. 사람들이 조선에 대해서 폄하하는것에는 이런 조선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임.


2번. 아무리 우겨도 통일신라보다는 고려, 고려보다는 조선기에 삶의 질이 더 좋았음. 농업생산성의 증가가 소득수준의 향상이기 때문임. 그 증거가 조선말기의 인구증가현상임. 왕건은 신라를 찬탈한게 아니라 신라로부터 국가를 물려받았음.

3번. 일제가 안 건드렸으면 우리끼리 잘 먹고 살았을것이라는 회의감에는 지독한 식민사관이 지배함. 마치 조선인들은 스스로 할 능력이 없으니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식.

4번. 중국의 속국이 된 적은 없음. 명과 조공무역, 청에 항복을 했으며 이 청은 중국을 직할령으로 삼은 국가.

5번. 에도말기의 일본의 농민반란빈도를 보면 일본역시도 살만한 나라가 아니었다는거.
이후 14-11-03 19:15
   
나 눈팅만하다가 방금 가입했는데 너 일본놈이냐?

한국에서 일본한테 먹혀서 반일감정가지고있는사람 사실없다는거 아냐?

일본이 조선먹은걸 조선잘못도 있는거 아니냐 양비론만들고 그다음 일제식민지 정당화하기위해서
 
식근론같은걸 내세우니깐 한국사람들이 일본싫어한다고생각안하냐?

구한말 조선근대화 하고있지 않았냐? 일본우익과 일뽕들이 이용하는 이사벨라 버드도 서울이 몇년만에 도쿄보다 더발전한다고 말했거든

1900년 gdp 봐도 조선왕조가 착취했다는거 모르겠던데?

조선욕은 조선놈이 하는거지 너희 일제식민지 정당화하기 위해서 조선욕을 해야되는 이유를 말해봐라

 일본놈들 식근론에 이 뿌리를 내가 알것 같거든?

일본은 메이지하기이전까지 한국에 혜택만 봤지? 그래서 그열등감으로 식근론 만드거 아니냐?

한국놈이 사실일본 실어하는 거는 일제감정기보단 너희들의 그더럽고 역겨운 행태 때문이라는건 생각안해봤지?
     
야스나가 14-11-03 19:18
   
내가 일본놈이면 당신은 전주이씨요?
          
이후 14-11-03 19:19
   
와 대단하네 나 전주이씬거 어케알어?

근대 나 고종이랑 다르게생긴놈이거든 ?
머리 갈색계통금발에 안와융기에 똥송하게안생긴놈이거든?
나 족보세탁한놈인거 같거든?
그리고 너 일본놈아니냐?
띠로리 14-11-03 19:18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엔 한족 출신 반군 중 하나인 홍건적에게 수도까지 털렸으나, 조선 건국 후엔 신흥강국 명나라의 심기까지 건드릴 정도로 순식간에 국력이 급성장함.

구한 말엔 자체적으로 정치 시스템도 바꾸고, 여러 차례 개혁과 신식 문물 도입으로 자체적으로 변혁을 이끌어 가려고 하였으나 일본이 군사력을 앞세워 먹어버림.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를 통틀어 조선이 최초로 전차를 도입하고, 가로등을 까는 등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이를 타 왕조의 몰락과 동일시 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안목이 없거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리 생각하는 것.

다른 왕조들을 보면 개혁도 제대로 안하고 망하거나, 개혁을 시도하더라도 이를 지속시킬 힘이 없어서 흐지부지된 반면, 조선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며 성과를 내고 있다가 외세에 의해 망한 케이스.

결론은 일본 개객끼
     
끠떡갈비 14-11-03 19:54
   
누가보면 고려가 조선보다 허약한 줄 알겠네요.
조선중기때 변방 사령관인 이괄 1만군세에 수도까지 내팽개친 역사가 있을텐데..
고려시대때는 그나마 대패한 경험은 없었지 않았나 싶은데요..
쌍령전투,용인전투.. 둘다 한줌도 안되는 적들한테 처절할 정도로 발린 전투들이죠.
수만대 천육백or수백명..
고려때는 그런 전투가 있었나요??
국력을 볼 때에는 당시의 국제질서속에서 그 나라가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를 봐야합니다.
고려시대때 거란,여진,중국한테 굴복하고 조공바쳤나요?? 원나라한테 나라전체가 아예 합병당했나요??
조선은 그랬습니다. 사실상 세계역사학자들도 불과 몇십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이란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몇몇 나라에선 그런 시선으로 조선을 평가하고 있구요.
colony of china 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도 아니거니와 조선이 은자의 나라라는 말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죠.

그리고 조선시대에 전차없었습니다. 일본,중국보다 개화도 훨씬 늦었던 나라고
가로등따위가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했던건 해방직후죠.
그전에는 일제가 보여주기용으로 도심에 몇몇 깐게 다임.
          
끠떡갈비 14-11-03 20:18
   
추가로.. 조선이 개혁을 시행했다고 말하시는데..
사실 말이 붕당이지.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선시대 정치의 현실을 냉혹하게 보면
밥그릇 싸움.
딱 이 한 문단으로 압축이 가능합니다.

애시당초 정도전이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서민적인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과전법?? 전시과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결국 그마저도 조선조내내 역적낙인 찍힌 인물로 취급됬습니다.
조선은 '역적' 정도전이 생각했던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걸어갑니다.
그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이었을까요??

다들 하시는 말씀들이.. 조선 후기 영,정조때에 이르러선 조선의 르네상스시기였고
충분히 자립적으로 서구화할 수 있는 틀을 갖췄다고들 말하시는데..
글쎄요..
영조의 탕평은 말기에 이르러 노론의 천하로 변질되고 심지어 국가이념과 반대되는 척신정치까지 단행합니다. 
그 뒤를 이어받은 정조의 탕평은 집권내내 노론견제하다가 독먹고 왕이 팽당하고요.
이런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일까요??
정약용아실겁니다.  목민심서아시죠?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저술했던 훌륭한 위인이죠
십몇년동안 유배당하다가 이빨 다빠지고 난뒤에 미신좀 볼 줄안다고 채용된게 답니다.

순조이래로는 제대로 된 정치형태가 나오지 않습니다.
노론천하도 아니고 그냥 안동김씨,풍양조씨같은 척신들 천하였죠.
그 이후론 말안해도 다 아시겠지만 흥선대원군이 척신정리하고 다시 왕권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고종이라는 사람자체가 왕의 자리에 있기엔 능력이 너무나 부족해서
민비의 치마폭에 휩싸여 또 다시 민씨일가라는 척신들을 양성하고 말죠.
그 후엔 민씨의 세상이었다가 군인들이 반란일으켜서(임오군란)
흥선대원군이 다시 일어서려다가 민비한테 견제당하고 청나라로 끌려갑니다.
국왕의 아버지가 말이죠.
그 후에 또다시 전횡을 반복하다가 민비는 일본낭인한테 칼맞고 죽고
고종은 이토히로부미 협박에 못이겨서
'나라가 어떻게되든 나랑은 상관없다!"
선언해버리고
이완용한테 을사늑약 전권을 맡기죠.


조선? 개혁?? 이게 답니다.
          
띠로리 14-11-03 20:36
   
공녀란 것이 고려조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조선으로 넘어와 관습처럼 유지되었고, 조공 문제는 조공무역과 관련하면 이 가생이 내에서도 엄청 많은 내용이 검색되니 간단히 요약하고 갑니다. 명나라에서는 3년 1조공 하라고 했지만, 조선은 1년 3조공 한다고 했습니다. 왜? 돈이 되니까. 조공을 바쳤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게 문제가 되겠지만, 조공무역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하등 문제될 게 없습니다. 되려 공녀 문제가 더 큰 문제이지요.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왕이 어려서부터 원나라로 보내져서 원나라 신부를 왕비로 맞아야만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조선이 싫다고 연경에 거주하며 연경에서 고려로 사신을 파견하며 국정을 돌본 왕도 있었죠.

조선에 그런 왕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중국의 식민지라고요? 이것에 대해서는 새로 글을 파죠.

조선시대 전차가 없었다고요? 네이버에서 '조선시대 전차'로 검색해보세요. 관련 글들 주루룩 뜰 겁니다.
글 하나만 가져오면

전차는 1898년 5월에 처음 개통되었다. '서대문-종로-홍릉'을 오가는 전차였다. 고종은 이 전차를 타고 일본 자객에게 시해 당해 홍릉에 묻힌 명성 황후를 찾아가곤 했다. 1899년에는 '용산-남대문-종로'노선이 개통되고, 1900년에는 '남대문-서대문'노선이 개통되었다.

라고 나오는군요.
가로등도 전국적으로 깔린 건 훨씬 후대의 일이지만, 4대문 안쪽에서 처음 시현을 한 건 전차와 비슷한 시기입니다.
               
야스나가 14-11-03 20:41
   
사실 민바를 죽인 무뢰배들을 자객이라고 하눈것도 웃기는 일임. 아니 세상천지에 자객들이 우르르 시끄럽게 몰려가서 대문열고 들어가는 자객이 어딨담. 당시 상황이 그랬으니 그또한 시사하는바가 많다 할것이지.
명성황후, 고종 등에 대해서
               
끠떡갈비 14-11-03 20:46
   
공녀는 고려조에 시작했지만 고려말기에 원나라에 바치는 것에 기원된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내내그랬죠.
명나라,청나라한테도 공녀바쳤습니다.(검색하면 다 나옴)
게다가 저는 조공의 문제에 대해 말했지.
공녀를 언급해가며 예시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공녀로 태클받을 이유가 없는 듯 싶은데요?

글파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게.. 100년전 조선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에
중국의 속국으로 보였다는 겁니다.
제가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요.

조선시대 전차없었습니다.
님이 말하시는 전차가 제가 말하시는 그 戰車(탱크)가 맞다면 말이겠죠.
설마 그 전차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교통수단으로서의 전차인줄은 몰랐네요..
제가 동음이라 착각을 했습니다.
일부로 자료까지 찾아보시는 수고를 하게 해드려서 죄송..
                    
띠로리 14-11-03 21:02
   
고려시대때 거란,여진,중국한테 굴복하고 조공바쳤나요??

->조공보다 더 한 공녀를 보낸 거지요. 심지어 조공은 조공무역이라고 반론할 수 있지만, 공녀는 쉴드 칠 건덕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정치 시스템도 다른 서양의 시각이 그리 중요합니까? 동양의 정치 시스템 상 조공국은 식민지가 아니었는데요. 서양의 시각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관계가 중요한 겁니다.
                         
끠떡갈비 14-11-03 21:20
   
->조공보다 더 한 공녀를 보낸 거지요. 심지어 조공은 조공무역이라고 반론할 수 있지만, 공녀는 쉴드 칠 건덕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 이건 원나라에 한정되서 보낸거구요.
그 당시 고려는 원간섭기라 해가지고 현재 일제강점기급 취급을 역사학계에서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조선의 조공역사(공녀를 포함한)에 대해서는 실리적 외교라면서
추켜세워주기 급급하죠.
고려는 부마국이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조선은 엄연히 군신관계의 나라였습니다.
                    
띠로리 14-11-03 21:04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건 20세기에야 통용되던 야사고요. 최근엔 정조가 노론의 거두 심환지에게 보낸 밀서가 발견되면서 독살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가 되버렸습니다.
 
밀서를 보면 내가 이런 주장을 펼테니, 그대는 이렇게 반박하며 여론을 조성하라..는 등의 지령들이 나와있죠. 즉, 정조와 척을 두었다고 생각했던 노론 벽파가 사실은 한통속으로 정치쑈를 하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정조는 향년 49세로 운명하셨는데, 조선왕들의 평균 수명은 47세입니다. 평균보다 더 오래 산 거고, 조선왕들의 평균수명이 짧은 건 과도한 업무 때문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보편적인 의견입니다.
 
정조 이후 순조 대에서부터 나라가 꼬인 건 나이 어린 왕이 집권하면서 외척세력이 득세해서 나라가 망조가 든 것은 공통된 생각이니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세도정치가 끝나고 흥선대원군의 10년 통치 기간동안 나라가 어느 정도 기틀을 바로 잡기 시작했지만, 최익현이 고종이 나이가 찼으므로 친정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내려오게 된 겁니다. 게다가 민씨 일가라는 것 자체도 허상이었고, 우리가 명성황후민자영의 오라버니였다고 생각하는 민승호, 민겸호는 민자영과 친남매가 아니라 민자영의 아버지인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선 인물들로, 본디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와 친남매 관계입니다.
 즉, 민비가 집권하면서 민승호, 민겸호가 권력을 지 멋대로 휘두른 게 아니라 흥선대원군을 등에 업고 전횡을 부른 겁니다. 실상 민자영은 권력 기반 자체가 없던 인물로 현재 과대평가되고 있고요.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이 우두머리로 거론된 것은 얼척 없는 이야기로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을 주동한 사람이 아니라 주동세력에 의해 옹립된 겁니다. 흥선대원군 스스로가 권력을 잡기 위해 사람들을 모은 게 아니란 겁니다.
 
그리고 을사늑약에 관해서는 고종은 끝까지 나라를 내줄 수 없다고 했고, 국새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담장을 일본군으로 둘러싼 뒤 이틀 동안 반감금하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죠. 그래서 을사늑약에 조인된 도장은 국새가 아니라 일반 직인이 찍혀있습니다. 이걸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에 못이긴 거라고요?
                         
끠떡갈비 14-11-03 21:13
   
음.. 정조 독살건은 새로운 재발견이 있었다니.. 확실히 제가 썼던 내용이
허구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이건 뭐 제가 잘못알고 있었던 것이니 틀린것은 맞지만서도
그 뒤
민비가 척신세력을 양성하지 않았다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애시당초 민씨가 인맥이 전무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왕비감으로 차출한 것이라는
카더라도 있으니만큼 원래의 인척관계는 전무했지만 그 후에 양녀로 들이면서
서로간에 의기가 투합된 것일수도 있지요.
이 부분은 결정적인 정황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없으니, 쉽게 판단하기는 금물이라고 봅니다.
민비가 집권하면서 민씨척족이 권세를 잡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그 뒷 배경에 황후로 있는 민비의 영향력이 전무하다고 속단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여흥민씨가 민비의 영향이 아니더래도 그네들끼리 영합해서 권세를 휘두를 수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쥘 수 있을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이죠.
왕족과 아무 관계도 없고 더군다나 세도를 그렇게 견제하는 흥선대원군과 한 배를 타고 있었다기엔
무리가 있는 설정으로 보입니다.

갑신정변때만해도 민씨일파부터 죽이는 것이 거사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과대평가라는 것은 외세에 대한 외교면에서 과대평가가 된 것이고요.
흥선대원군을 쳐낸 것만하더라도 확실히 정략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입니다.

최익현 하나가 상소를 올렸다고 십몇년간 옆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던 아버지를 팽할 수 있을까요??
그 의지력 부족한 고종이?? 아니죠.
흥선대원군을 대체할만한 대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내쫓은 것입니다.

을사늑약에 대해서 찾아보시면 다 나옵니다.
고종이 결정권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은 끝까지 확답을 주지 않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후에 민족주의 사관에 힘입어 고종이 끝까지 결사반대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엄연히 미화에 불과한 것일뿐입니다.
실세역사와 혼동하는 것은 무리가 있죠.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고는 하지만 진짜 을사조약을 반대하려고 했다면
체결된지 1년이 훨씬 지나서 그럴게 아니라 조약 당시에 회의에 나가 한차례 위엄을 떨치어
조약 문서를 다 찢어버리고 결사반대를 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고종이 괜히 지레짐작 겁먹어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게 을사조약체결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끠떡갈비 14-11-03 21:31
   
추가로 저는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야기하고 준동을 도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정권을 잡으려고 했었다라는 식으로 언급했죠.
                         
띠로리 14-11-03 21:35
   
민승호, 민겸호가 정계에 진출한 건 고종이 즉위하고부터입니다.
민승호는 고종 즉위 1년에 정계에 등용되었고, 민겸호는 고종 즉위 3년에 정계에 등용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종 즉위 후 10년까지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입니다.
민자영이 왕비로 책봉된 건 2년 후인 1866년이니 민승호, 민겸호가 민자영의 후광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았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등용 시기 뿐만 아니라 요직에 들어서는 시기도 흥선대원군 집권기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1873년)하기 훨씬 이전에 형조판서,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정도 되는 자리지요.

민비가 집권하며 민씨일가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건 여기서부터 말이 안됩니다. 다만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중심에서 내려오면서 민승호, 민겸호가 민자영 쪽으로 붙어먹었다면 모르지만, 민비 덕분에 민씨 일가가 권력을 잡았다는 건 시기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민비가 되려 민승호와 민겸호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고 생각됩니다. 흥선대원군이란 뒷배를 잃은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에게 붙으며 새로운 버팀목으로 마련하면서 두 세력의 이익이 맞아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갑신정변 때 민씨 일파가 타깃이 된 것은 민비 때문에 아니라 지극히 그들의 횡포가 문제였다고도 볼 수 있지요. 여기에 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명확한 답변이 나온 게 아니어서 제가 단정지어 말할 수가 없군요.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게 된 것은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은 명분의 나라였고, 흥선대원군이 권좌에 오른 것도 나이 어린 임금의 아버지란 명분 때문이었고요. 그리고 최익현은 이후에도 자주 등장하는 요주의 인물로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한 세력의 대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안그래도 흥선대원군이 양반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 중신들이 명분을 내세워 하야를 주도한 것이라는 게 최익현의 친정 상소의 배경이고요.

그리고 고종이 의지가 약한 건 사실입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될 당시에도 궁 안에서 벌벌 떨며 세자만 끌어안고 있었으니까요. 허나 정작 중요한 국새를 내주지 않은 것이 을사늑약을 방관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최종 결정권자가 도장을 안내주고 있다는 건 방관이 아니라 명확한 거부의사라고 봐야하지요. 실제로 의지가 약한 고종이란 것을 감안하면 국새를 안내주고 뻐티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결단이라고 봐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시해당하는데도 일본 군사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위인이 국새 안내놓으면 가만히 안두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는 건 그 나름대로의 결단으로 봐야지요.
                         
끠떡갈비 14-11-03 21:55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하면서 척신세력을 뿌리채 뽑았는데.
그 흥선대원군이 다시 척신들이 권세를 잡도록 수수방관했을까요?
말하신대로 흥선대원군과 민비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보신했고 민비가 대원군을 팽한
이후로는 민비쪽에 붙었다가 맞습니다.
아무래도 민비가 그들의 친혈족이 아니니만큼 이해타산에 맞게 서로 손잡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겠죠.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시기의 민씨들은 어디까지나 흥선대원군의 들러리역할에 불과할 뿐이지만,
대원군이 물러난 이후부터는 권력의 중심에 서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갑신정변 때 민씨 일파가 타깃이 된 것처럼 그네들은 흥선대원군의 하야, 그로 인한
고종의 친정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민비가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다면 나라의 국고를 사사로이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기록으로 민씨의 사치가 도를 넘었다고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죠.

앞서 말씀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왜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대리자역할명분에 태클을 걸었냐 이겁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죠.
고종이 실제로 대원군과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있었을까요??
민비라면 몰라도 고종은 없었습니다.
최익현은 고종을 뒤에서 조종하고 정국을 장악하려는 민비의 의도를 읽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역사서에는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이전의 최익현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원군을 반대하면서 정책에 제동을 걸 세력은 없었죠.
고종(민비)의 의도가 아니었더라면 최익현은 오히려 죽었을 겁니다.
양반층의 반대원군성향은 그 전부터 꾸준히 있었습니다.
서원철폐이후로 더더욱 심해졌지만 대원군을 탄핵했던 주체를
여느 신하들의 세력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을사늑약에 대해선 여지없이 고종의 성격을 이해해주기전에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을사늑약,한일합방이후 고종이하 조선왕족은 일본왕족으로 편입됬고 매년 막대한 녹봉을 받으며
호화롭게 호의호식했습니다.
이완용이 단독으로 결정했고, 이토의 강요로 이뤄진 것?
이완용은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로 합방이후에도 꾸준히 안부를 물었던 인물입니다.
또한, 이완용 스스로가 추가적인 조항들을 여러 덧붙여 고종의 후사를 보장했었습니다.
(왕실의 보전에 대한 다짐등)
고종은 그에대해 암묵적인 동의까지는 아니더래도 적극적인 저항의사를 밝히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국새가 없었으니 무효라는 말은 사실상 소리없는 아우성에 불과할 뿐이죠.
                         
띠로리 14-11-03 22:06
   
정치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관계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권력의 기반은?
명성황후, 혹은 민비로 불리는 민자영의 권력 기반은?
고종의 권력 기반은?

이걸 생각하면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최익현 관련 문제는 명분으로 돌아가변 됩니다. 흥선대원군에게 번번히 당하기만 했던 양반 세력들이 역공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고종이 약관에 접어드는 그 시기였거든요.

전 내일도 칸타빌레 보러 이만 들어가봅니다.

좋은 밤 되세요.
                         
끠떡갈비 14-11-03 22:09
   
정치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관계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권력의 기반은?  => 아들
명성황후, 혹은 민비로 불리는 민자영의 권력 기반은? =>남편
고종의 권력 기반은? =>왕이라는 직위
이걸 생각하면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모든 주체를 고종이라고 말하시고 싶은 건가요?
대원군은 아들을 왕으로 올려놓고 말하신대로 명분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민비는 남편을 현혹해서 명분으로 권력을 잡았구요.
고종의 권력기반?? 그런 가정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왕이 아니라면 그냥 폄범한 범인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고종이 자립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민씨일파가 민비를 믿고서 득세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대원군시기의 정치에 대해서 역행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면 역행한다는 것은 바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길밖에 없었으니까요.
민비와 민씨일파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그들이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지,
고종이 세도를 크게 벌여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야사의 묘사나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그냥 어느 면모로 봐도 휘둘린 것에 불과합니다.
                         
띠로리 14-11-04 00:47
   
글 쓰다가 다 날라가서 요점만 간단히 씁니다.

왕이란 게 권력 기반이 될 순 없습니다.
왕=권력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상 권력 없는 허수아비 왕들도 많았거든요.
실제로 세도정치 기간의 세 명의 왕들은 허수아비 of 허수아비였죠. 그 뒤를 이은 고종이 단지 왕이라는 이유로 권력 기반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더더군다나 철종 사후에 왕의 기질을 가진 왕족들은 안동 김씨 일파에 의해 숙청되고, 세력이 가장 비리비리해서 적당히 허수아비로 쓰기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추대한 게 고종이니 더더욱 그렇죠.

고종의 왕위는 권력의 기반은 못되고 단지 권력의 전제조건 정도가 정확합니다.

권력 기반이란 건 실권을 부여잡을 수 있는 배경을 말하고자 한 겁니다.
안동 김씨 세력이 득세하고 있던 마당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어떻게 숙청 당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는지(실제로 숙청당할 위기도 있었습니다.), 고종, 혹은 명성황후 민자영은 쟁쟁한 시아버지를 몰아내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죠.

그리고 고종이 일본 황실에 포함되어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삼국지의 유선이 생각나는 일화입니다. 촉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유선은 바보처럼 행동했다고 하죠. 고향 생각이 나지 않느냐는 질문에, 여기 생활이 더 편하다며 헤헤 거렸다고 합니다. 이걸 본 사마사인가 사마소인가가 '이래가지곤 제갈량이 살아돌아온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겠구나...' 하고 비웃었다고 하지요.

고종도 매한가지라고 봅니다. 재경소인가 뭔가 만들어서 왕실 비자금 관리하고 거기서 나온 돈으로 군자금 마련, 의병장에게 밀서를 뵤내며 의병 지원, 헤이그 특사 파견까지 암약했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 이후로 왕위에서도 강제 퇴위 당하고, 군대도 해산당하고, 자신도 24시간 감시를 당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잃었을 때, 일신이나마 보존코자 유선처럼 행동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그리 돌변할 순 없는 거죠.
     
고양양이 14-11-03 19:56
   
도대체가 근거가 근거같아야지...

참..


근거도 근거같지 않고,

그 근거에 기초해서 반박하는 사람은 역사에 안목이 없다니,

코미디 하쇼?
초딩이요?
          
띠로리 14-11-03 21:04
   
제게 단 댓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