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세계 100강 (41) 롱아일랜드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64826&page=1&p_no=74
“즉문즉설이라는 것은 자기가 고뇌하는 것을 주제로 해서 조금 더 행복한 길을 찾아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기 좋을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남을 해치거나, 손해끼치거나, 괴롭히거나, 속이거나 하는 4가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자기가 자기를 손해끼치는 행위가 있는데 이것은 나쁜 짓이라고 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것은 깨우쳐야 합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살려고 먹었는데 결과적으로 죽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할려고 했는데 더 불행해지는 경우가 가끔 있지요. 그처럼 행복할려고 결혼했는데 불행해지고, 더 행복할려고 자식을 낳아 키웠는데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할 정도로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망해서 괴로워합니다. 이와 같이 의도와 결과가 바뀌는 것은 자신이 그 결과를 잘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모든 괴로움은 무지로부터 생깁니다. 자기가 무지해서 생긴 괴로움인 줄 모르기 때문에 남 탓을 합니다. 남탓, 아내탓, 세상탓, 더 나아가 전생탓, 사주팔자탓, 하나님탓을 하게 됩니다. 자 누구든지 질문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직장은 맨하튼이고 일주일 한번 정토불교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시어머님이 기독교인이고, 남편은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기독교인이고, 저는 오랫동안 불교신자이고 지금도 불교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시댁에서 교회에 나가라고 압력이 들어오는데 부담스럽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갈 자신도 없고 또 믿음이 안생겨서 가짜로 다니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어머님이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시아버님과의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고 미움을 내려놓지 못하시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미운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는데 두 분이 갈등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시어머님 말하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하나 의문도 듭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징벌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자기를 죽인 사람도 용서해 주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만 구원받는다’거나 ‘안 믿으면 벌 준다’ 하는 것은 다 구약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하나님을 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날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 때와 이리 때를 나누듯이 둘로 나누고 한편에 앉은 자들에게 ‘너희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리라’ 하니, ‘주여, 왜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까?’ 하니까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주여,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하니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만 한다면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고, 어느 교파에 다니느냐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 이 작은 자 하나에게 너가 어떻게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구원의 기준입니다. 내가 지금 교회에 갈 것이냐, 개종을 할 것이냐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내가 이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해야 될 것이냐를 늘 새겨야 크리스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가 종교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미국 기독교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가는 예수님 유형과 하나님을 얘기하면서도 예수님의 삶을 외면하는 바리새형 두 가지 중 비중이 예수님 유형이 1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교도 똑같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기독교 믿는 시어머니 보고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했는데 용서도 안 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럼 불교를 믿는 시어머니를 만나면 살아갈까요? 매일 선방에 가서 참선하면서 절에서 살다시피하는 시어머니가 집에서 며느리한테 하는 행동은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불교 교리는 무아를 가르치는데 시어머니는 아집 덩어리란 말이에요.
시어머니의 행동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어머니가 싫으니까 시어머니가 믿는 종교도 싫다는 감정이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독교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 아니듯이, 오늘날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90% 이상이 힌두교적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힌두교의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진리의 가르침을 펼쳤지만 오늘날 불교는 다 힌두교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듯이 기독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가 문제이고 불교가 문제다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현실에는 불교 문화가 있고 기독교 문화가 있는데, 불교 문화는 강요가 좀 적고 기독교 문화는 강요가 좀 많으니, 나는 불교 문화가 좋다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나쁜 것이다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얘기라는 점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중시하는 바리새형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르지만, 진리라는 측면에서 들어가 보면 서로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구원의 기준이라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과보를 뜻합니다. 너가 어떤 인연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그 과보를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불교 신자들도 늘 인연과보를 주장하지만 인연과보를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인연과보라는 것은 인연을 지어야 과보가 생긴다는 것인데, 대부분 절에 가서 복은 안 지어 놓고 복 달라고 하잖아요. 또 죄는 지어놓고 죄를 사해 달라 하잖아요. 이것은 인연과보에 맞지 않습니다. 인연과보의 가르침은 복을 안 지었으면 복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복을 받고 싶으면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황되게 사는 사람을 정신 똑바로 차리게 해주는 것이 깨달음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기준도 결국 너가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지옥과 천당으로 가는 것을 결정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어서 소통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믿음의 형태에서는 문화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신앙 모습을 보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쪽으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시어머니가 성격이 그런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중에도 스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고, 스님들 중에도 신부님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고, 신부님 중에도 목사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고 이렇게 사람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헌법에는 개인의 신앙은 자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시어머니라고 하더라도 종교를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질문자는 아무리 시어머니가 강요를 해도 “알았습니다. 어머니” 하고 그냥 불교 믿으면 됩니다. 너무 개의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시어머니를 이해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의 문화가 권사나 집사를 하기 위해서 가족들을 교화하지 못하면 체면이 안섭니다. 그래서 지금 질문자 때문에 시어머니가 교회에서 승진에 한계가 생겼단 말입니다.(웃음)
또 시어머니는 ‘기독교를 믿어야 천당을 간다’는 믿음이 강하니까 며느리를 지옥 보내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좋은 의미로 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권유하면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하고 시어머니의 마음을 항상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습니다. “어머니 알겠어요. 네네” 이렇게 얘기하되 가끔 “어머니, 신앙은 자유니까요.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이렇게 부드럽게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 권유, 감사합니다” 이렇게도 말해주고, 또 가끔씩 시어머니와 남편의 체면을 차려야 하는 자리가 있을 때는 교회에 같이 좀 가주세요.
질문자는 지금 개종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양단 간에 결정을 하려고 하니까 심리가 불안한 것입니다. 한번 가면 영원히 가야된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1년에 몇 차례는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 봉사도 해주고 도와주세요. 거기 가서 “왜 교회 안나와요?” 물으면 “네, 제가 바빠서요” 그냥 이렇게 말해야지 “저는 불교신자예요” 이렇게 말하면 밉상이 됩니다. 일부러 거짓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얘기하세요. 그렇다고 양심을 속이고 살 필요는 없어요. 자기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하되 다만 예의에 어긋나게만 행동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 입장은 조금 세워주는 게 낫습니다. 단, 시어머니의 입장을 세워준다고 자기의 신앙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가 기독교가 좋아서 가는 것은 괜찮아요. 불교 믿다가 기독교 믿으면 벌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쪼잔한 분이 아닙니다. 요즘은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죠. 또 옛날에는 결혼 한 번 밖에 못했지만 요즘은 남편이 죽거나 이혼을 하면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할 수 있죠.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불교 믿다가 기독교 믿고, 기독교 믿다가 불교 믿고 하는 게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미국인이지만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부르죠? 그러니 자기는 교회에 다니면서 불교를 공부하는 “크리스챤 부디스트”가 되거나 불교신자이면서 기독교를 공부하는 “부디스트 크리스챤”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청중들 박수)
아직은 좀 어려운 일이지만 앞으로 100년만 지나면 이런 문제는 보편화됩니다. 100년 전에는 한국 사람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했잖아요. 100년 전에는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게 불가능했죠. 그러나 지금은 다 보편화되고 있어요. 전에는 종교나 민족이나 자기들끼리만 폐쇄된 세상에 사는 사회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지금은 섞여서 사는 열린 사회입니다. 그래서 조금 혼란스럽지만, 섞여 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배타성 때문에 서로 갈등이 많죠. 한 100년만 지나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됩니다.
제가 작년에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모임에 참여했더니, 참가한 사람 중에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쳔인데 마음공부는 불교로 하는 “크리스챤 부디스트”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신학도 생길 겁니다. 미래는 이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때문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첫째, 자기가 좋을 대로 하면 됩니다. 부모나 형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은 자유이기 때문에. 둘째, 가족의 화합을 위해서는 유연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양다리를 걸쳐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교는 “해탈과 열반” 이라고 해서 자유를 가르치고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해서 역시 자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넓어져야 합니다. 너무 배타적이면 고립되고, 너무 주체성이 없으면 해체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기 정체성도 갖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교 신자이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열려 있거나,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불교에 열려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질문자도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도 모두들 스님께서 하신 “크리스쳔 부디스트”란 표현에 다들 명쾌해짐을 느끼며 즐거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