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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10 15:24
불교란 무엇인가? : 신념과 믿음과 맹신
 글쓴이 : 격운
조회 : 757  

알기 쉬운 담마(붓다의 가르침; 佛法, 佛敎) 이야기
신념과 믿음과 맹신,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
 
 
“와서 보라”는 것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태도입니다.
이 말은, “인간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에 대한 나의 가르침은 이러저러하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깨달음, 해탈(열반) 자체란 말로 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궁극에는 스스로 보고 깨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는 깨달은 자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가르침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언제나 비판과 검증의 대상으로 남겨두셨고, 입적하시는 순간까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셨습니다.
깨달음, 해탈(열반) 자체를 말(언어)로 전하기에 한계가 있는 이유는,
언어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후의 경험을 기호화한 것인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 해탈(열반) 이후의 경험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그리하셨듯이 해탈(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
(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단 붓다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붓다의 가르침[안내판]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안내판(혹은 안내판의 detail)에 집착(혹은 절대화/목적화)해서
목적지(깨달음, 해탈,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깨달음(해탈, 열반)의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함)은
 붓다의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 각자의 경험인 바, 깨달음(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과정)의 인과연기적인 구체적 경험은 누구나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으나 어쨋든 붓다의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마다
다른 각자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붓다(佛)의 가르침(담마[法], 敎)에서 말하는 믿음은 일반적인 종교의 믿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지혜(경험적-합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지혜(경험적-합리적 이해) 없이
단순히 믿는 것은 맹목(盲目; 눈 먼, 보지 못함)적인 믿음, 맹신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佛法, 佛敎)에서 말하는 믿음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가르침을 실천(수행)하여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바른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붓다께서 인도북부의 한 조그만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붓다께 물었습니다.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소문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에 씌어 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이익(진정한 행복, 탐진치의 소멸, 둑카[근원적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이 됨을 경험적-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알게 되면 그 때에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붓다의 가르침(담마[法], 敎)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종교(宗敎)[註]요 철학 또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합니다. 그러나 심오하기는
하기만 여느 현학적이고 난해한 철학이나 사상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은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 둑카'
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경지(완전한 깨달음, 해탈, 열반)에
도달하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존재(생명)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붓다께서는 '개와 사자의 비유’를 들어 설하셨습니다.
개는 돌을 던지는 사람은 제쳐두고 자신에게 날아온 돌을 물고 공격합니다.
그 개에게 괴로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움 자체를 없애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방법입니다.
사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총알이나 화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움 자체를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근본원인을 없애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상(괴로움 자체)에 끄달리지 않고 그 근본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존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고성제)과 그 근본원인(집성제)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며, 또한 그 근본원인을 소멸(멸성제)시키고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큰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깨달음, 해탈, 열반)에 도달(도성제)하는 바른 ‘길, 방법, 실천법(수행법)'인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 가르침은 현세에 유익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와서 보라고 할 만하고
실생활에 적용되고
슬기로운 사람 각자에게 경험된다." -중 아함경.

註] 종교(宗敎) : '(산)마루 또는 근본 종(宗) + 가르칠 교(敎)'의 합성어인 종교(宗敎)의 뜻은 '산 정상(마루, 宗)에서 바라보듯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근본(宗)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敎)'이라는 의미입니다.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5세기경에 중국에서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동양문화권에서는 신(神)과는 무관하게 '훌륭한 가르침'이란 의미로 쓰여져 왔습니다.
19세기 말 서양 종교학(Religious studies or Science of Religion)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Religion'을 번역할 때, 같은 의미의 동양문화권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지칭하던 용어인 종교(宗敎)를 Religion으로 번역한 것이 처음입니다. Religion의 어원은 ‘re(다시)+lig(신과 잇는, 결합하는)+ion(것)’입니다. 이 Religion(신과 재결합 하는 것)을 종교(宗敎; 마루/정상/근본의 가르침)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의 오류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붓다의 가르침(담마; 法)은 법교(法敎; 法/자연의 법칙에 대한 가르침)'로, 'Religion은 신교(神敎; 神/절대자의 가르침)'로 한역(漢譯)하면 지금과 같은 혼동과 오해의 소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국어사전에는 ‘신(神)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그런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불교(佛敎, 붓다의 가르침[담마/다르마]; 우주자연의 법칙[法] 또는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법칙]에 대한 가르침)는 종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붓다의 가르침(담마)을 따라
진정(眞正)으로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분별 집착 없는 큰사랑으로 늘 행복하기를...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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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지 14-10-10 17:39
   
올라오는 화를 지켜보고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진작 알았으면 혈압약 먹지 않았을텐데....
먹물새우깡 14-10-11 09:55
   
저 글 쓴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땡중일 듯...

교리 심오하다 심오하다 하지만 심오한 것은 하나도 없는 듯..

그저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얼렁뚱땅 불교는 좋은거다 이것만 써놓은 듯..

읽고난 소감은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구? 뭐 어쩌라구..일뿐....


요새 종교는 다 그 맥이 끊어졌나, 어째서 저런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설명만 있는지 답답함..

진리의 깨달음. 열반은 불립문자요 언어도단이라 설명도 못하고 뭔지 말도 못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가르침을 실천(수행)하여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이라는데  믿지를 않는데 누가 수행부터 할 것이며,

믿는 것은 지가 경험해보고 믿으라니...그리고 믿을 때는 의심해보고 믿으라니...

믿기 전에는 수행을 할 리 없거나 수행을 해도 의심의 과정에서 믿음없는 수행을 할테니 열반을 무슨 수로 경험할 수 있겠음?
 
참 이런 진지한 헛소리 처음 들어봄..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라고 했는데 선후가 뭔지도 모르는 함량미달 땡중이 쓴 듯...

불교가 사이비인게 해탈과 열반을 말하지만 열반은 불립문자요 언어도단이라는 것임..

믿어라..그런데 뭘 믿어야 하는지는 말로 설명못하고, 언어로 설며할 길이 없다...

뭐 어쩌라는거임? 참 좋은데 거 참 말로 설명을 못하겠네..무슨 정력제 선전도 아니고...

이건 그냥 헛소리라고 하는 것임..

그러니 석가 이후 3,000년동안 오직 석가만 있음..

석가 외에는 아무도 그 경지에 간 사람이 없는 것임........

하긴 저런 교리로 그 경지에 가면 그 넘이 이상한 넘이지...
     
격운 14-10-11 17:17
   
생각이 참 많습니다.
한때의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
가난한 사람이 열심히 복을 심으면 다음 생에 잘산다느니!
태어날 때 부자는 다 전생의 그만한 공덕이 있어서 그렇게 부자 집에 태어난다니
온갖 생각들로 자기의 불교학식을 넓히려고 우리는 쓸데없는 논쟁을 많이 하지요.
정작 오늘 밤을 넘기고 나면 내일 아침에 눈을 뜰 수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내가 눈을 뜨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이런 말장난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증명을 하며, 누가 알아줄까요?
다 부질없는 질문들이 아닌지요?
이런 질문들 보단 차라리 나는 누구인가?
누구 이길래 이렇게 생각도 하고, 이렇게 언쟁도 하며, 어디서 와서 앞으로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이런 것을 찾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고요히 앉아서 생각을 내려놓고 가만히 내면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 보세요.
흙탕물이 고요히 있으면 가라앉아서 맑은 물이 되듯이 내면의 세계가 점점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어느 날 문득 눈이 트이면서 삼계가 다 내 집인 것을 봅니다.
우주천지 모든 만물이 다 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깨닫고 나면 삼계가 다 내 것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이지만, 정작 깨닫기 전에는 송곳이라도 있어서 송곳을 꽃을 내 땅을 찾아 다녔지만, 이제는 특이하게도 송곳마저 잃어버린 천하의 거지가 되었습니다.
정말 가난한 거지가 되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요.
우주 모든 만물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어느 김삿갓의 시처럼 맑은 죽에 비치는 멀건 죽을 받아놓고 하는 말이 주인장 미안해 하지마소,
나는 원래 거꾸로 비친 허공을 좋아한다오.
그러면서도 달을 보면 달빛이 온 천하에 가득합니다.
빈 거울에 천하가 다 들어와서 비치고 있습니다.
짜증나고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만나는 만사가 다 즐겁고 좋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과 함께 있노라면, 어제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저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날들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삼계가 다 나의 인식에 불과합니다.
이 인식이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을 해 볼까요?
어릴 적 고향의 냇가 웅덩이에서 재미있게 놀고, 마을 어귀 바위 밑에서 숨바꼭질 하고,
들에 나가 어머니 일을 도와주고, 오솔길과 징검다리를 건너 학교를 다니던 모습
세월이 흘러서 30년 만에 나의 고향을 찾아갔더니, 고향의 옛 모습은 하나도 없고, 새로운 건물들과 정리된 개울가 사라진 웅덩이 어머니와 일하던 들판...
머리로 인식이 되어있는 지난날 들은 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지금 찾아보니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내가 놀던 그 지역을 찾아 왔는데, 내 머릿속에 생생한 기억이 또렷한 그것들을 찾아 왔는데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가고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삼계도 다 이와 같이 하나의 나의 인식에 불과합니다.
내가 없으면 삼계는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삼계가 다 사라지고, 눈을 뜨면 삼계가 다 내 인식에 나타납니다.
세상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가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욕심이 자꾸 사라집니다.
초라하고 가난한 거지처럼 정말 세상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밤이면 달빛이 나와 함께하고, 시냇가에 앉으면 물소리와 함께 합니다.
옛날에 스님들 말씀이 깨달으면 천하가 다 너의 것이라고 했는데, 그 소리에 속아서 이제 돌아보니 천하가 다 내 것이 아니오, 빈손 중에도 정말 빈손이 되어 버린 거지가 되어 있습니다.
주위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다 불평을 늘어놓으며 세상을 원망하지만, 정작 내겐 그런 의미가 없습니다.
밥만 먹어도 그저 고맙고 감사합니다.
숨만 쉬어도 그저 감사합니다.
이제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 그런 것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밤이 되어 누우면 만사의 걱정이 없어 코만 드르릉 거립니다.
내일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체는 다 나의 유심이라.
이제는 불교가 무엇인지 그것도 잊어 버렸습니다.
어떤 종교를 갖고 있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때로는 사이비라 했다, 나쁜 길이라 했다 말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이비도 없고, 나쁜 길도 원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든 짐을 내려놓기 위해 이런 말을 저런 말을 그들의 집 앞에 걸어들 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쉬운 자 있다면 걸어놓은 것들 걷어서 자기에게 유용하게 쓰겠지요.
그들이 쓰지 않아도 탓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걸어놓는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도 걸어놓고 갑니다.

PS 어제 한전에서 일하던 저의 좌형이 고압전선에서 작업하다 돌아가셧습니다.
    어제 장례식장 가면서 삶의 허무를 또 다시 보았습니다.
    오늘도 모르는 삶을 살면서 참 어리석게 사는게 인간인거 같습니다.
    다 꿈속에 삽니다.
    부디 좋은꿈 꾸십시오.
도도인 14-10-11 11:34
   
좋은말 써놨는데 다들 왜이러시나ㅎㅎ
해탈의 경지까지 못가더라도 조금이나마 다가 갈려고 생각한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좋은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