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담마(붓다의 가르침; 佛法, 佛敎) 이야기
신념과 믿음과 맹신,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
“와서 보라”는 것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태도입니다.
이 말은, “인간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에 대한 나의 가르침은 이러저러하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깨달음, 해탈(열반) 자체란 말로 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궁극에는 스스로 보고 깨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는 깨달은 자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가르침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언제나 비판과 검증의 대상으로 남겨두셨고, 입적하시는 순간까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셨습니다.
깨달음, 해탈(열반) 자체를 말(언어)로 전하기에 한계가 있는 이유는,
언어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후의 경험을 기호화한 것인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 해탈(열반) 이후의 경험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그리하셨듯이 해탈(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
(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단 붓다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붓다의 가르침[안내판]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안내판(혹은 안내판의 detail)에 집착(혹은 절대화/목적화)해서
목적지(깨달음, 해탈,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깨달음(해탈, 열반)의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함)은
붓다의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 각자의 경험인 바, 깨달음(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과정)의 인과연기적인 구체적 경험은 누구나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으나 어쨋든 붓다의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마다
다른 각자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붓다(佛)의 가르침(담마[法], 敎)에서 말하는 믿음은 일반적인 종교의 믿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지혜(경험적-합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지혜(경험적-합리적 이해) 없이
단순히 믿는 것은 맹목(盲目; 눈 먼, 보지 못함)적인 믿음, 맹신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佛法, 佛敎)에서 말하는 믿음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가르침을 실천(수행)하여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바른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붓다께서 인도북부의 한 조그만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붓다께 물었습니다.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소문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에 씌어 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이익(진정한 행복, 탐진치의 소멸, 둑카[근원적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이 됨을 경험적-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알게 되면 그 때에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붓다의 가르침(담마[法], 敎)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종교(宗敎)[註]요 철학 또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합니다. 그러나 심오하기는
하기만 여느 현학적이고 난해한 철학이나 사상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은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 둑카'
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경지(완전한 깨달음, 해탈, 열반)에
도달하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존재(생명)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붓다께서는 '개와 사자의 비유’를 들어 설하셨습니다.
개는 돌을 던지는 사람은 제쳐두고 자신에게 날아온 돌을 물고 공격합니다.
그 개에게 괴로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움 자체를 없애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방법입니다.
사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총알이나 화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움 자체를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근본원인을 없애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상(괴로움 자체)에 끄달리지 않고 그 근본원인을 파악하여 해결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존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고성제)과 그 근본원인(집성제)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며, 또한 그 근본원인을 소멸(멸성제)시키고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큰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깨달음, 해탈, 열반)에 도달(도성제)하는 바른 ‘길, 방법, 실천법(수행법)'인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 가르침은 현세에 유익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와서 보라고 할 만하고
실생활에 적용되고
슬기로운 사람 각자에게 경험된다." -중 아함경.
註] 종교(宗敎) : '(산)마루 또는 근본 종(宗) + 가르칠 교(敎)'의 합성어인 종교(宗敎)의 뜻은 '산 정상(마루, 宗)에서 바라보듯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근본(宗)이 되는 훌륭한 가르침(敎)'이라는 의미입니다.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5세기경에 중국에서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동양문화권에서는 신(神)과는 무관하게 '훌륭한 가르침'이란 의미로 쓰여져 왔습니다.
19세기 말 서양 종교학(Religious studies or Science of Religion)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Religion'을 번역할 때, 같은 의미의 동양문화권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지칭하던 용어인 종교(宗敎)를 Religion으로 번역한 것이 처음입니다. Religion의 어원은 ‘re(다시)+lig(신과 잇는, 결합하는)+ion(것)’입니다. 이 Religion(신과 재결합 하는 것)을 종교(宗敎; 마루/정상/근본의 가르침)라고 번역한 것은 번역의 오류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붓다의 가르침(담마; 法)은 법교(法敎; 法/자연의 법칙에 대한 가르침)'로, 'Religion은 신교(神敎; 神/절대자의 가르침)'로 한역(漢譯)하면 지금과 같은 혼동과 오해의 소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국어사전에는 ‘신(神)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그런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불교(佛敎, 붓다의 가르침[담마/다르마]; 우주자연의 법칙[法] 또는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법칙]에 대한 가르침)는 종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붓다의 가르침(담마)을 따라
진정(眞正)으로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분별 집착 없는 큰사랑으로 늘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