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에 발족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뿌리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파견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장로교 선교를 시작했고,
1893년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여 장로교단의 모체로 삼았다. 1901년에 이 장로회선교공의회에 한국인이 참여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시켰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7명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배출한
190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로 불렸다. 독로회 체제는 5년 동안 지속되다가
1912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발전했다. 제1,2,3회 총회장은 외국인 선교사가 맡았으며,
1915년 김필수가 제4회 총회장에 선임되어 한국인이 총회장을 맡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제27차 총회(1938년)가 공적으로 신사참배(우상숭배)를 가결하고 시행함으로써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일본 장로교 산하로 통합되었고,
1945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통합 기독교 교단에 흡수되었다. 일제 패망 후 재건되어
1947년 총회가 복구되고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했다.
[1]
1930년대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린 일본 제국에서는 한국의 교단들을 통폐합하고 일본과 조선의 소위 미션스쿨과 개신교 교회들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이때 조선 개신교는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였다: 적극 참여파 / 무관심한 소극파 / 적극 반대파.
주기철,
최상림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이유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사람들과,
양주삼처럼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면서 찬성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당시 대다수의 장로교, 감리교는 이에 찬성하여 신사참배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친일활동을 한 개신교 목사들이 교회에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총회장이나 노회장 등의 교단지도자를 역임했기 때문에, 교회사학자들은
친일파 청산을 한국 개신교가 사실상 하지 못했다고 비평한다. 이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고신(고려)파가 분리되었다.
[21] 그러나 최근들어 민족적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적이고 민족적인 회개운동이 전개 되어,
장로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는등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大韓예수敎長老會(高神)/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PCK:Kosin))은
고려파 교단으로
1952년 한상동, 주남선목사 등 일제강점기시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됐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장로교 교단이다.
원래 고신 교단을 세우려고 하진 않았으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고신측을 거부하고 총회로부터 축출하였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소재지는 서울시 서초구 이며 설립목적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유지,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 이고 주요활동은 복음 전파, 해외 선교이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Towards The High Place ]
조선 독립운동에 참여한 주기철은 안갑수와 결혼 후 초량교회에 부임해서 열정적으로 목회에 임했다. 그때 일본이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기독교는 큰 충격을 받는다. 주기철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듣게 되고, 그와 그의 동료 목사들은 일제에 맞서 싸우기로 한다. 그러나 예배당 신축과 함께 헌당식을 앞두고 구속되며 신사참배의 안건은 가결되고 만다. 마침내 주기철은 파면당하고 그는 이 때문에 1938년부터 5년 4개월간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끝에 심한 안질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언제나 감사하고 평안한 마음을 지켰다. 1944년 4월 20일 밤, 49세의 나이로 순교하면서 그는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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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인가 그때 교회에서 본기억이나는영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으로 신영균씨가 나오신..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결국은 순교하신 분이시죠..
근데..복권이 최근에야 이루어지셨다니...참 씁쓸합니다...
영화나온게 77년입니다...
영화나온지 20년만에..복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