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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09 02:57
이게 폭군이라불리는왕에업적입니다
 글쓴이 : 백전백패
조회 : 2,280  

이렇게 좋은 업적을 남기고도 폭군이라니..
특히 그가 남겨준 업적중에는 오늘날 우리도 이용하고있습니다..
민족문화 복원 사업,수차를시험적으로 실행하여 후일 대동법의 절정기에 씨앗을 남겨준것..농사에관한 서적집필,,산부인과의서에관한 집필..호적개정,,명나라로부터 염직을 배운것 ...영안도를 함경도개칭..
 
또한 조선시대 내에서도  그는 폐위되었지만 그가 남긴 정책들은 고스란히 써먹었습니다
종묘를 제정하였고,경상도 지도제작을 하여  전쟁때 요긴하게 써먹엇으며..
윤대 제도를 확충하여 왕,신하 모두가 편하게 정사를 논의할수있도록하였으며..
속국조보감을 편찬하여 후대 세자,세손 들이 시강원에서 이것을 제왕에도리로 배우는 학문으로 배우게하였으며..진제청,상평창을 설치하여 백성의 빈민,구휼을 조선이끝날때까지 다써먹었습니다..
 
허나  연산군때 이렇게 관리 감독이 잘되었던 국방강화정책,병사관리,무기관리 부분은 그가 폐위되고
방만하게 운영되어 그 결과로 삼포왜란,임진왜란 전쟁을 겪는 미숙함을 보였습니다..
 
 
연산군의 주요업적들...
 
1494년즉위초12월 선왕(성종)수륙제를명함(원상들과 삼사연합의반대로무산)
1495년전국에 암행어사파견..관리들기강을바로잡음..별시문과를시행 33인급제..국경지역의국방강화
..1495년9월3일 대소신료들의 고충 및 간언을 경청할수있는 기회제공 5일마다 한번식 윤대를할수있도록 윤대제도확충..
1496년1월종묘제도 제정 1496년9월4일사가독서제도 부활..학문을권장하고 신진인력을 양성
1497년 조선의왕들중에 최초로 한해에 150여차례이상으로 경연을 열어서 정사를돌봄
1497년6월 문신의 사가독서제도 시행
1497년11월공안개정을정지함(궁궐과사가에 과다하게경비가들어가자 정지시킴)
1497년11월 왕명으로 (경상우도지도)제작
1498년2월 세조이래 편찬중단된 국조보감 편찬(세조이하 덕종<의경세자>예종,성종 조의내용을편집하여 편찬,,후대제왕들에게 도움을줄만한것을 기록,,상평창을 설치하여 빈민해결,물가를안정시킴)
1498년4월영안도를 함경도로 개칭
1498년5월 호적신년을 개정(백성의불편을해소),,명나라의 음악을 배척하고 민족문화 복원의 사업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음악을 다시 정비함
1499년1월 성종실록완성
1499년10월 동국여지승람 수정,구급이해방언해,동국명가집 간행
1500년 비융사설치(갑옷,투구,병장기를 관리및제작 국방력 강화),,남해안에 쪽바리들의 발호로 인해 쪽바리들을 척결함..
1500년7월역대명가집 편찬(중궁전 및국왕의 후궁들에귀감이되는책)
1500년9월 속국조보감 편찬
1500년11월 과부의재가금함..농서언해 잠서언해를 간행(농사에관한책),목우자수심결언해 간행
1502년1월 명나라로부터 염직을 전수받음..
1502년3월 수차를 경기도 충청도 지역에 시험적으로 설치
1502년6월 양계업거인의 내지인과의 결혼을 금함
1502년 함경도에사창을 설치함(빈민문제구휼)
1502년8월 상평창을 경외에 설치함(물가안정및빈민문제구휼)
1503년5월 임신최요방을 간행 (산부인과전문의서)
1503년11월 경복궁 창덕궁의 돌담을 높이쌓아서 담밑주거민을 댓가를주고 이주시킴
1504년 진제청 설치(빈민문제구휼)
1506년 백성의세금을 최소화로 감면하고 양반들에게 세금을 더걷을것을 알차게추진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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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마늘님 14-04-09 02:59
   
고우영작가님 만화보면 완젼 .....섹.....마스터......
허각기동대 14-04-09 03:03
   
구휼은 어느 왕이나 조선시대엔 반드시 해야 했던 우리로 치면 국방의무같은 통치행위였어요. 안하면 왕이라도 큰일나는 일이었죠. 다만 왕의 치적에 그 행위가 들어갈수 있을진 몰라도 정작 그게 현장으로 나가면 오히려 지방수령들의 치부책으로 옮겨가는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변질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기록과 현실은 차이가 날수 밖에 없다는거 현재를 사는 우리가 더 잘알지 않나요.
     
백전백패 14-04-09 03:09
   
네..님말이 맞습니다만..연산군 이전에도 분명잇었지만
이전보다 더 빡씨게 강화했던게 연산군이였습니다..
          
허각기동대 14-04-09 03:14
   
통치행위란 도장을 찍는 작업이죠. 어떤 폭군도 정책방향이 나빴던 적은 없어요. 밑의 신하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요. 일은 결국 의정부 육조가 하는거 아니었겠습니까. 결국 실제 행위가 어땠느냐에 촛점을 맞출수 밖에 없죠. 한양에서 제물포까지 가도에 금도를 설치하여 왕의 사냥터로 만들고 범금의 죄를 저지르면 평민의 경우 엑 소리도 못내고 죽음을 당해야 했던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수 없는 근친간의 간음혐의만으로도 이미 리더십을 상실한 대단히 위태로운 권력자였지요.  할머니의 대단찮은 위세에 발길질로 대응했던 패륜적 행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권지향국가였던 조선에서 신언패를 목에 걸게하고 아닥하게 만들었던건 지금 소주한잔 먹는 자리에서 히히덕 대며 짚어보는 역사가 아니라면 오래 못갈만한 군주였습니다.
               
백전백패 14-04-09 03:24
   
님이 말씀하신 그 중종반정 자들의 명분이 바로 어거지로만들어진 명분이라고 보고있는사람입니다..그이유 첫번째가..연산군일기의 집필 총책임자가 바로 반정공신 성희안이였으며 결코 공정하게 쓰지않았으리라 보고잇으며.. 둘째..서오릉 ..왜 서오릉이냐고요?이곳에 인수대비의 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내에서 이장기록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더군다나 보수했던 기록도 없구요 그리 미운 할머니에 묘를 할아버지 의경세자의 묘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줄리가 만무하지요..
                    
허각기동대 14-04-09 03:31
   
묘가 화려할수록 그 자식의 불효함을 생각해 볼일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 묘가 열다섯평 짜리 부지에 신라왕릉처럼 커서 지금도 벌초하는데 애

먹거든요. 연산군도 아마 고의는 아니었을겁니다. 할머니를 골로 보낸게.
                         
백전백패 14-04-09 03:52
   
역사 학계에서조차도 월산대군부인 강간사건,할머니 머리로 받아 죽게 했다는건 날조로 만들어진 명분이라 말하고있죠..

님말씀대로 묘에 웅장함으로 불효를 판단할수도 있지만
아버지 후궁들 죽은 시신들 처리 하는걸 봐선
막장드라마 제대로라면은  할머니 시신도 그리 편하게 해주진않았겠죠??
                         
허각기동대 14-04-09 03:53
   
날조라는 확실한 증좌가 있다면 저도 언급을 철회할 생각은 있습니다. ㅋㅋ 누가알겠어요. 그때 그 자리에 있어보질 않았는데. 있는걸로 얘기하는거죠. 어쩔수 없이.
                         
백전백패 14-04-09 04:01
   
그분들이 그리말할 정도면은 기록된사초와 당시의 모든 증황 당시의 사회 풍습에서 안맞는다는게 많겠죠..
                         
허각기동대 14-04-09 04:24
   
학자라는 이름으로 헛소리 하는 사람도 많이 봐왔고 그걸 떠나서 그 분들의 연구노력을 백퍼센트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기록보다 우선하는 학문적 유도리는 나도 그정도 소설을 써낼수 있기에.. 오피셜을 기준으로 가는게 옳습니다. 워낙 사극 스크립트를 제 꼴린대로 이야기를 풀어서 많은사람들이 이면의 뭔가에 대해 의심하는 세태가 되긴 했지만.
                         
얼렁뚱땅 14-04-09 09:53
   
몇백년전 일인데 날조라는 확실한 증좌가 있기는 힘들죠. 정황상 악의를 가진 사람이 썼다는건 그대로 다 믿으면 안된다는 근거는 되지요.
               
백전백패 14-04-09 03:30
   
그리고 도장을 찍는다고 하셨습니까?연산군은 초기부터 무척이나 신하들하고 의견차이를 많이 겪었던 임금입니다..그만큼 정책적인 문제로 의견차이를 보였다면은
단순히 도장만찍고 하지는않았단겁니다..자신이 생각하고있던것도 서슴없이 정사에
반영할것을 자문을 구하고 주장을 할줄도 알았던 왕이란겁니다.
                    
허각기동대 14-04-09 03:32
   
그런 왕들은 많았습니다. 신하의 의견에 조율할줄 모르는 왕은 정조 이후에 출몰하죠.
                         
백전백패 14-04-09 03:42
   
정조 이전에도 있죠..전 지금도 그분들이 왜 조를 받았는지 납득이 안되요..
                         
허각기동대 14-04-09 03:49
   
그전엔 그래도 대충 밥값은 했죠. 강원도에 태풍오면 명란젓 대신 도루묵 염젓을 먹으며 짠내로 살폈고 전라도가 가물면 짠 조깃국으로 시름을 얹고..
기본적으로 착했던거 같애요. 다른 바바리안들 수괴들과 대면 비교도 안되는..
                         
백전백패 14-04-09 04:07
   
세조,영조,정조를 제외한  조를 받은 자들에 대한 공적을 한번 읖어주실래요?
                         
허각기동대 14-04-09 04:26
   
싫습니다. 아는바도 별로없고 조금 기분도 상한데다 잠도 와서요. 게다가 도르트문트가 두골이나 넣고 있습니다. 공적같은건 저보다 님같은 청춘이 검색 타자는 훨 잘치실거라 믿고 이만 실례할게요
mymiky 14-04-09 03:33
   
연산군 초기정치는 제법 잘했다고 들었음.. 후기엔 막장드라마 찍었지만--;;
퍼랭이 14-04-09 08:26
   
연산군이 사림에 의해 악의적으로 표현된 게 많다고 봅니다 연산군 때 백성들의 고초가 심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인조가 더 백성을 괴롭게 했다네요
     
나와나 14-04-09 22:08
   
연산군 다음에는 중종인데요;;
          
퍼랭이 14-04-10 10:38
   
아;; 저는 조선 왕조 전체에서 말한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