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요
님이 생각하는거만큼 백인에 적대감이나 저항이 크지 않았어요
그 증거가 2차대전 발발했을때
영연방 국가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엄청 많이 참전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님 논리대로면 참전은 개뿔.. 봉기 안일어나면 다행이죠
이때를 노려서 일본이 추축국 동맹 맺고 쳐들어간건데
동남아도 저항 심했습니다 워낙 상황이 안좋아서 밀린거죠
그리고 대만하고 동남아하고 동일선상에서 말하기 때문에, 즉
다르다는걸 인정안하시니까 방대해지는거에요
동남아에 어떤 편견도 없구요
오히려 님이 편견이 있는거 같아요
너무 우리 생각대로 동남아를 평가하는거죠
우리도 식민지 거부감 있으니
동남아도 있었겠지? 라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좀더 잘 알려진 유럽으로 예를들면 아시겠지만
몰타는 식민지인들이 그냥 방어해냈자나요. 당시 독일화력아시죠?
그리고 아프리카 전선도 정말 중요했는데 이때 식민지 사람들 활약이 정말 컸습니다
결국엔 같은일이 벌어진겁니다. 유럽이나 아시아가...
그리고 영국같은 경우는 재정적인 문제가 컸지만 2차대전이후 식민지 포기한거보면
아실거에요
근데 그런와중에도 다들 자발적으로 영연방으로 남았습니다
영연방이란 영국여왕을 모시는거죠. 거부감이 크면 불가능합니다
프랑스처럼 전쟁따위 하지 않았죠
제말이 다 맞다는건 아니고
하나하나 예를들면 차이가 있을수 있겠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리고 지금 말하는건 옛날 얘기니까 현재하고도 분명 다를수 있구요
하지만 이분 주장대로 식민지 반감으로 목숨걸고 일본편에서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에서 말한거죠
특히 인도같은 경우
영국이 쿨하게 포기했자나요
근데 왜 목숨걸고 싸웠다면서 영연방에 남았을까요
앞뒤가 안맞죠
그리고 호주 얘기하셨는데
2차대전 당시 그럼 호주가 어떻게 했습니까?
일본이 쳐들어오기 전부터 뉴질랜드 침략당했다는 소식듣고 벌벌 떨었죠
이분 주장대로면 해방되니까 좋아해야 맞죠
그리고 일본편에서 목숨걸고 싸웠습니까?
일본 쳐들어왔을때 전부 내륙으로 도망치고 미국 영국에 지원요청하고
같이 싸웠습니다 지원병도 이미 많이 보냈구요
이제와서 반감이 있다고 하다라도 그당시 팩트가 저거자나요
동남아애들이 일본한테 털린건... 채 5~10년이 안돼요...
태평양전쟁 막판에 몇년 잠깐 털리고 만 거라서...
일본이 '식민통치'라는 빨대를 재대로 꽂기 전에...
그냥 몇년간 점령만 한 상태로
빨대 제대로 꽂을 준비만 하다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어느날 갑자기 패전해 버린거죠...
물론... 그 상태로 십여년이 더 흘렀다면 동남아지역도 일본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할텐데...
그냥 몇년간 점령당한 상태였을 뿐입니다... 동남아지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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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남아가 친일이 된 이유는 그 이유가 절대 아닙니다...
역사적 문제가 아니구요...
한때 우리나라 현대건설과 한보건설 등의 대형 건설회사들이...
동남아 국가들의 대형 건설사업을 엄청나게 발주해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참 공사하다 말고... 우리나라에 IMF 가 터진겁니다...
그래서 한보건설 부도나고... 현대건설도 동남아지역 건설사업단 철수시키고 난리가 났었어요...
그래서... 정말 동남아 각국 정부 차원에서 어마어마하게 벌여놓은 공사 현장이
하루아침에 광활하고 거대한 건축 쓰레기더미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겁니다...
그 타이밍에 일본정부와 일본 건설사가
동남아 국가들에게 간교하게 끼어들었습니다...
"한국이 포기하고 발 빼버린 그 공사들... 일본이 책임지고 마무리 해 주겠다...
그 대신에 조건은...
당신네들 국가에 일본 자동차와 공산품들 무관세로 수입 협정 맺어주고
국가 대 국가간의 무역협정을 맺어야 할 경우, 최우선적으로 일본에 우선협상권을 배정해달라..."
한국이 IMF 때문에 손 놔버린 공사현장...
기술력도 자금력도 딸리는 동남아 국가들 입장에선...
일본의 손을 잡지 않고서는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었죠...
그리하여...
20세기의 마지막이라는 1990년대 후반에,
동남아 국가들과 일본 간에...
어마어마한 경제적 불평등 조약이 맺어지게 된 겁니다.
'국가간 조약' 이라고 쓰고... '칼만 안들었지, 순 날강도' 라고 읽으면 될 정도로...
그때 당시, 정말 말도 안되는 조약들이 체결되었습니다.
지금 동남아 국가들은...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 일본 경제에 완전히 종속된 상황입니다..
무관세로 일본차량이나 가전제품이 동남아에 수입되고 있기에...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자동차의 70% 이상이 일본차고, 동남아 가전제품의 60% 이상이 일본산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 나라들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끊어 버리면...
국가부도사태 날 겁니다...
한국은 어느정도 살던 나라라서 그나마 IMF 때 휘청거려도 다시 회복했지...
못사는 동남아 국가들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야말로 끝장 나는 거니까요.
그래서 동남아 국가들은
뻔히 두눈 뜨고 띠꺼운 꼴 당해도, 친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20년 전 수하르토 정권에 로비
강제연행 증거 취재한 작가 감시
일본 정부가 1993년 8월 종군 위안부들의 고난이 기록된 책이 출간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인도네시아에 전달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14일 보도했다.
당시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 간 큰 외교현안으로 부상했을 때로, 일본은 한국 이외 지역으로 이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아사히 보도에 따르면 93년 당시 주 인도네시아 일본대사관 공사였던 다카스 유키오(高須幸雄·현 유엔 사무차장)는 8월 20일 인도네시아 관계자를 만나 7월 26일자 마이니치(<6BCE>日)신문 기사를 거론했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저항 지식인이자 대작가인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1925~2006)의 활동에 대한 기사였다. 태평양 전쟁 중 자바섬에서 140㎞가량 떨어진 섬에 다수의 소녀들이 종군위안부로 연행됐었다는 걸 알고 맹렬한 취재를 통해 이를 수백 쪽으로 정리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다카스 공사는 “자료가 발행되면 일본과 인도네시아 관계에 미칠 영향이 우려된다”고 말했고, 이에 인도네시아 측 관계자도 “종군위안부 문제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수하르토 정부가 해당 작가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일본 측에 알려줬다. 아사히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일본 정부에 보낸 8월 23일자 전문 내용을 입수해 보도하며 “문학작품의 발매 금지를 부추긴 것으로, (일본 정부가) 당시 인도네시아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가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프라무댜의 저서는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된 뒤인 2001년에 출판됐고, 2004년엔 일본에서도 발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