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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22 14:22
비기독교 사료에 의한 신양성경의 역사성..
 글쓴이 : 청춘별곡
조회 : 1,992  

" 비기독교 사료가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내용 "

콜넬리우스 타키투스-----소아시아의 총독
콜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역사가이며 A.D. 112 소아시아 ( 터어키 )의 총독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로마를 방화했다는 네로황제의 허위적인 고발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받는 박해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그리스투스 (그리스도)는 그 이름의 창시자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다. 빌라도는 티베리우스황제 통치시기에 유대의 총독이었다: 한 동안 잠잠했던 유해한 미신이 불행의 시 발점인 유대의 전 지역뿐 아니라 로마시를 휩쓸며 다시 일어났다 ( Annals XV 44 ).”
타키투스는 로마의 정부 문서 보관소에 접근하여 정보를 찾는 신중한 역사가로서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에 관련한 상세한 것들을 확인시켜 주었다.

세토니우스-----로마 역사가
세토니우스는 A.D. 125년 로마의 사관이었다. 그의 저서 “Life of Claudius”는 로마에서 불화를 일으킨 기독교인들이 도시에서 유배되는 것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파벌은 그리스투스 ( 그리스도의 이름 철자 )의 선동에서 유래됀 것이라고 하였다.

플리니 소자
플리니 소자로 알려진 플리니우스 세쿤더스는 “기도교인은 빛이 밝기 전에 확실히 정해진 날에 모이는 습관이 있다. 이들은 신에게 하듯 그리스도에게 찬양을 드린다. 이들은 사악한 것을 하지 않으며 결코 거짓말, 도둑질, 간음, 거짓 증거하지 않으며 믿음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아도 결코 믿음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엄숙한 맹세를 한다.” 라고 설명하였다.
플리니는 A.D 112년 로마령 비두니아 ( 터어키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자신이 심문할 기독교인에게 할 질문과 관련하여 교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썼다. 그의 저술 Epistle X 96에서 이것을 믿는 자들은 황제 트라얀을 섬기지 않고 극심한 고문에서도 조차 자신들의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지 않는다라고 서술했다. 플리니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값을 치루고서도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기술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거짓으로 알고 있는 것을 위해 기꺼이 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순교는 예수에 관한 복음서의 기술이 진실인 것을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한다.”

사모사타의 루시안
루시안은 그리스도 사후 1세기 경에 사모사타에 살았다. Passing Peregrinus 저서에서 그는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해 섬김을 받았다. 예수는 세상에 새로운 종파를 소개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가 형을 받았다. “라고 선언하였다.

플레비우수 요세푸스의 예수 증거
“만약 그를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이 시대에 현명한 사람, 예수가 있었다. 그는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이었고, 기쁨으로 진실을 깨닫는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이교도인들을 그 앞에 불러 모았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유대인 대표자들의 요구에 따라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을 때 예수를 사랑한 무리는 그를 저버리지 못했다. 예언자들이 예수와 그와 관련된 수 많은 기적을 예언했던 것처럼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무리 앞에 살아서 나타났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그리스도 무리는 오늘날도 소멸되지 않았다 (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k. XVIII, chap. III Section 3 ).
플레비우스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이었고 예루살렘에 살던 성직자였다.
예수 사후 A.D. 37년에 출생하여 예루살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 붕괴를 일으킨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는 로마항전 당시 갈릴리에서 유대저항군의 장군으로서 투쟁했다. 그는 오타파타시 함락으로 로마군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로마장군 베스파시안과 친구가 되었다. 로마와 유대정부 기록문서를 다 접근할 수 있었던 역사가로서 그는 처음 1세기 기간인 격정의 수 십년 간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술하였다. A.D. 94년 요세피우스는 로마에서 유대인 역사서의 결정판 “Antiquities of the Jews”을 출간했다. 이 귀중한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책 내용 중 예수그리스도와 야고보, 사도요한 등을 언급한 부분은 후일 기독교 편집자들이 삽입했거나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요세피우스의 예수기록은 진본이 아닐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조작을 주장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 부류의 학자들은 예수에 관한 내용이 없는 요세피우스의 “Antiquties of the Jews” 고대 사본을 지금까지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만약 이들이 예수 관련 내용이 없는 요세피우스 사본을 발견한다면 그 책에는 요세피우스 원본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을 것이다. 저서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를 통해 필립 샤프는 초기 슬로베니아어, 아랍어판을 포함한 요세피우스 역사서 고대 사본은 모두 예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다고 선언했다. 4 -5세기 경 무렵의 여러 다양한 언어로 복사된 모든 고대 사본은 예수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누구도 출간 후에 수세기 동안 널리 유통된 책을 편집자가 어떻게 변경시킬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이 예수기록을 거부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런 내용이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성을 확인해 주기 때문에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깊은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사실이 실제 있었다면 요세푸스는 그 사건들을 자신의 책에 요동치는 세기의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사실 요세푸스가 예수의 사역과 부활에 관해 기술하지 않았다면 바로 이 사실이 놀랄 일이다.

성경 학자 크래그 블롬버그는 1987년 저서 “The Historical Reliability of the Gospel”에서 “요세푸스에 관한 최근 다양한 연구 결과 문장 대부분이 요세푸스의 작문 스타일을 거의 닮았다. 문장이 권위가 있어 보인다. 또한 비 기독교인이 예수의 생애를 검증한 것으로 보존되어 온 가장 중요한 고대서이다.” 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블롬버그는 예수의 역사성에 관련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증거를 심도있게 분석한 후 다음의 글로 결론을 내렸다; “ 복음서는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것으로 신뢰할 수 있다.” R.C. 스톤은 “요세푸스”라는 제목의 글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와 연관된 문장은 기독교인이 끼워놓았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내. 외부적인 일련의 증거들은 요세푸스의 예수에 관한 기록이 진실이라는 것으로 규정지었다. 요세품스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중요사항을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의 역사가로서의 호기심은 상류층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는 그 운동을 확실히 조사했을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요세푸스를 가장 위대한 5인의 헬라 역사가로 평가했다 ( ZPEG, vol. 3: 697 ).”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한 증거
Antiquities of the Jews ( bk.XX,chap.IX,sect1 )에서 요세푸스는 또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아나너스(High Priest)가 경질될 처지에 놓이자 그는 이제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행정장관 이었던 페투스가 죽고 신임 장관인 알비너스가 부임지 노정에서 오는 중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관위원회를 소집하고 그들 앞에 야고보라는 예수의 형제와 다른 사람들을 끌어 내었다. 이들을 범법자로 고소하고 그들에게 돌로 쳐 죽이라고 넘겨 주었다.” 많은 자유신학자들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문구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반면 현대학자들 대부분은 “소위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 대한 구절의 권위성은 인정한다.

세례요한에 관한 증거
요세푸스는 세례요한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유대인 중 일부는 헤롯 군대의 멸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롯은 세례자라고 불리는 요한에게 가한 처벌처럼 똑같이 벌을 받을 것으로생각했다. 왜냐하면 헤롯은 선한 사람인 그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서로 서로 정의롭게 행하고 하나님을 앞에서 경건하여 선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러 오라고 하였다. 물로 씻는 것을 죄를 씻거나 용서 받기 위해서 뿐 아니라 신체의 정결을 위하여 이용해도 좋다고 하였다.

영혼은 정의를 실행하여 벌써 완전히 정결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군중이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의 주위에 모이자 헤롯은 자신의 권력의 지키기 위해 요한이 끼치는 거대한 영향력이 모반을 일으키기 쉬운 백성의 성향에 어떤 악영향이 미칠까 염려하였다. ( 당시 백성들은 이미 요한이 충고한 무엇을 할 준비가 다 된 듯 보였다 ). 헤롯은 요한이 몰고 올 불행을 방지하려면 요한을 죽게 하여 스스로 어려움에 빠지지 않는 것이며 또한 자신에게 회개하게 만들 사람을 없애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요한은 헤롯의 의심 많은 기질 때문에 죄수의 몸으로 마케루스 ( 마사다 ) 성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형을 당했다 ( antiquities of the Jews, bk. XVIII, chap. V, sect. 2 ). 요세피우스의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먼저 언급한 다른 정보소스와 함께 예수가 1세기 경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라는 풍부한 증거를 제시한다.

이외 증거-----쥴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탈루스
쥴리우스는 A.D 215년에 북아프리카의 기독교인으로 작문 교사였다. 그는
탈루스라는 이교도 역사가의 저술을 기록하였다. 탈루스는 예수 부활 직후 인A.D.52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탈루스는 A.D. 32년 유월절에 땅 표면을 덮었던 기적 같은 어두움이 있었다고 그의 역사에 기록했다. 쥴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탈루스는 그의 역사서 제3권에 이 어두움을 일식으로 설명해 버렸다---그러나 내게는 합리적인 것 같지 않다.” 쥴리우스는 탈루스 이론을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개기일식과 만월이 동시에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망한 때는 유월절 만월 시기 였다.

이교도 역사가 탈루스의 이런 역사적 언급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땅을 덮었던 어둠에 관한 복음서 기록에 확신을 갖게 하였다. 예수 죽음 당시 이런 초자연적인 어두움을 언급한 또 다른 고대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현대 천문학자들은 유월절시기 였던 만월에는 일반적 일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쥴리우스 주장이 옳다고 한다. 이 성직자는 만월에서 달 모양이 가장 적어지는 시기까지를 면밀하게 계산해 보았다. 유대인의 예배력은 행사 전부 특히 유월절은 정확하게 달 모양과 천체에 놓인 위치로 세기 때문이다.

구약을 의역한 유대인 탈굼에는 유대인들은 미가서 5장2절에서 예언된 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기대했다는 추가적인 증거를 담고 있다. 챨스 R. 콘돌는 성경구절 자체에 메시아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지만 구약의 여러 구절에 달린 72개의 탈굼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정보를 싣고 있다. 잘 알려진 탈굼 중 2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 혹은 인근에서 출생할 것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35장 21절의 탈굼은 이스라엘이 “에달의 탑 위”에 집을 지을 것이라고 되어있다.

조나산의 탈굼은 ‘에달의 탑’이라는 장소에 다 “종말에 왕 메시아를 드러낼 장소가 어디인가”라는 언급을 덧붙였다. 콘돌은 학술지Palestine Exploration Fund Report ( Quarterly Report, April 1875 )에다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믹돌 에달 혹은 무리의 탑 (the Tower of Flock)”은 A.D. 700년에 베들레헴으로부터 천 보 정도 떨어진 곳으로 “성목자 수도원”의 폐허터가 위치한 지역이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주석을 단 또 다른 은 예수가 부친의 목재소에서 양친에게 양육을 받은 나사렛 지역을 흥미롭게 언급했다. 이 탈굼은 “모세는 사막에서부터 오고 메시아는 로마에서부터 나아간다”라고 기술했다. 여기서 “로마”란 나사렛 근처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 Charles R. Condor, Palestine Exploration Fund [Quarterly Report, January 1876 ], p.98 ).

헨리 M. 모리스는 신약의 정확성을 비판하는 고고학적 또는 역사적 논쟁과 문헌을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그는 성경사본에 기술된 사건은 정확하게 기록된 것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박사는 “과학 혹은 역사적 발견이 오늘날까지 신약의 어떤 구절도 논박하지 못했다. 이 점은 스스로 신약 기록의 놀라운 정확성과 권위를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사가 필립 샤프는 나사렛 예수의 삶이 서구세계에 역사와 문화에 지속적으로 끼친 거대한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이 나사렛 예수는 돈과 군대 없이도 알렉산더, 시이저, 모하메드, 나폴레온 보다 더 많은 것을 정복했다. 과학과 학식도 없이 그는 모든 철학자와 학자를 합한 것 보다 크게 인간사와 종교에 엄청난 빛을 던져주었다. 그는 웅변학교에 다니지 않고서 전무후무한 생명의 말을 하여 연설자나 시인의 한계를 뛰어 넘는 역량을 발휘했다. 한 줄도 쓰지 않고 그는 많은 펜을 움직여서 고대와 현대의 모든 위대한 사람이 집합된 군단보다 많은 설교, 연설, 토론, 학문서, 예술작품, 찬양주제를 내어 주었다. ( Philip Schaff, The Person of Christ [American Tract Society, 1913] )”

역사적 사료가 절대적 신뢰를 걸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사건을 증명해 주는 반면 사도들의 진술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이 땅에 존재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의 교회를 하늘로 옮기려고 영광 중에 예수가 재림할 때에야 드러날 경외적인 영광의 실체를 우리는 아직 목격하지 않았다. 또한 예수가 재림하여 지구의 인간에게 그 자신을 스스로 들어낼 때 나타나게 될 영광도 모른다. 청교도 작가 존 오웬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주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을 우리의 신앙 함양이나 신앙 무장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만나지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의 권능과 영광의 현시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받았던 빛과 은혜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주의 사랑을 받던 사도 요한은 사랑에 싸인 친밀감으로 주의 가슴에 여러번 기대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영광으로 그에게 나타났을 때 요한조차 죽은 듯이 발 끝에 떨어졌다.”

서기 1 세기에 살았던 남녀는 나사렛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이 지닌 방대하고 심오한 지혜에 충격적으로 경탄했다. 예수그리스도가 마침내 주의 날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영광 가운데 나타날 때, 마태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 30 )”라고 예언했다.

Scrap: 세계 종교문제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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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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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별곡 14-08-22 14:24
   
요세푸스는 유대인이나 유대인들에게 변절자로 취급을 받던 유대출신 로마인입니다.
     
돈마니 14-08-22 14:30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통해서 무리하게 예루살렘의 파괴가 행해진 이유가 설명되지요.
어짜피 이완용도 아닌마당에 그런 기록이라도 남겼기에 참고가 되는 인물이네요.
운드르 14-08-22 14:30
   
콜넬리우스 타키투스 ->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그리스투스(그리스도) -> 크리스투스(그리스도)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세토니우스 -> 수에토니우스
플리니 소자 -> 소(小) 플리니우스
황제 트라얀 -> 황제 트라야누스
플레비우수 요세푸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로마장군 베스파시안 -> 로마장군 베스파시아누스
(친구 사이는 아니었음. 그 아들인 티투스와는 친구처럼 지냈지만, 형식적으로는 후견인-피후견인 사이)
쥴리우스 아프리카누스 ->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시이저 -> 카이사르
미우 14-08-22 14:30
   
아래는 Dan Barker의 "Godless:How and Evangelical Preacher Became One of America's Leading Atheists"에서 인간 예수의 존재자체도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는 부분,
그리고 요세푸스가 예수에 관하여 언급하는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신약성서 외에서 예수의 존재를 언급하는 저자들로는 Josephus, Suetonius, Pliny, Tacitus, Thallus, Mara Bar-Serapion, Lucian, Phlegon, Tertullian, Justin Martyr, Clement of Rome, Ignatius, Polycarp, Clement of Alexandria, Hippolytus, Origen, Cyprian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2-4세기의 교부들이 상당수 있어서 객관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 중 기독교에 적대적인 편견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과 로마인 저자도 있어서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와 동시대 혹은 그 다음세대에서도 예수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는 기원전4년부터 30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예수에 관한 동시대의 역사적 기록물은 단 하나도 없다. 로마인이건 유대인이건,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이건 간에. 가장 빠른 역사적 기록물은 요세푸스에 의한 하나의 작은 문단인데 이는 90년대 중반으로 예수 사후 60년 이상 지난 때의 것이다. 이것조차도 조작으로 드러나게 된다. 물론 동시대의 예수에 관한 기록물이 부족하다는 것으로는 그의 부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한 사람의 역사성에 커다란 의문점을 던져주게 됨은 분명하다.
초기 로마공화국의 시대는 역사적 기록물이 풍성한 시대였다. 예수 시대에 살았던 저자중의 하나는 Philo-Judaeus(때로는 Alexandria의 Philo로 알려짐)가 있었다. John E. Remsburg는 “The Christ”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Philo는 그리스도 시대 시작이전에 태어났고, 널리 알려진 그리스도의 사망 이후 오랜 동안 생존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존재하였다고 알려진 모든 시간대를 포함하여 유대인에 관하여 저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과 헤롯의 대학살이 발생한 그 시기에 예수살렘 내 혹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십자가처형과 뒤따른 지진, 초자연적인 암흑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 때에도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할 때에도. 당시의 세상을 경악으로 가득 채웠을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났었다면 그에게 분명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 관해 아무것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예수의 고향 갈릴리 출신 역사가인 Justus of Tiberius가 있었다. 그도 그리스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대를 다루는 역사를 저술하였다. 그 역사서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9세기 Photius라는 기독교학자가 그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Justus)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 당시에 그에게 발생했던 일들 혹은 그리스도가 행하였던 놀라운 일들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Flavius Josephus
 37년에 태어나 예수와 동시대는 아니었지만 가치있는 2차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시기에 살았다. 요세푸스는 존경받으며 자주 인용되는 로마 역사가였다. 그는 100년 이후 어느 시점에 사망하였고, 중요한 두개의 저작물인 The Antiquities of the Jews와 The Wars of the Jews를 남겼다.
Antiquities는 90년 이후 어느 시점에 쓰여졌는데, 초기 로마시대 동안 유대인의 삶에 관하여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 book18, Chapter3에 다음의 문장이 나온다.

“(63) 이 즈음에 예수라고 하는 한 현자(a wise man)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는 그리스도였다.

(64)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에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삼일 째 되는 날 다시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일만가지의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이 종족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의 저작이 조작되었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이 문단은 요세푸스의 초기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Origen의 요세푸스 2세기 버전인 Origen Contra Celsum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오리겐은 셀시우스의 이단적 견해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맹령히 옹호하였다. 오리겐은 그의 요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로이 요세푸스를 인용하였으나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이 문장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 요세푸스의 이 문단은 콘스탄틴황제 시대 황제의 측근인 유세비우스가 정통 기독교의 버전을 구조화시키고 정의하던 시대인 4세기 초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유세비우스는 이 요세푸스 문단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다. 유세비우스는 역사가들이 소설을 쓰는 것이 허용가능한 “약”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역사가 Jacob Burckhardt는 유세비우스를 최초의 철저히 부정직한 고대역사가로 불렀다.
요세푸스의 예수 문단이 역사적으로 이 시점- 수정과 변조가 난무하고 황제가 영지주의 기독교를 말살하고 문자주의적 기독교로 대체하려고 하던 시점-에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더욱 이 문단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2세기도 훨씬 지난 후에 요세푸스의 저작에 마술처럼 나타나는 예수관련 문단의 조작, 변개자로 유세비우스를 지목하고 있다.

2)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the Christ)”로 부르거나 “진리(the truth)”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누구였건간에 그리스도인이었음이 분명한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이었다. 만약 그가 예수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지나가는 글처럼 쓰지 않고 훨씬 많은 자료를 남겼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오리겐은 요세푸스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3)BOOK18(“Archelus의 유배로부터 Babylon 유수까지의 32년간을 포함한다”)은 6세기 Cyrenius 통치하의 로마 과세제도부터 시작하여 에세네파, 갈릴리의 유다파(예수에 관한 것보다 3배이상 할애) 등 그 당시의 다양한 유대 당파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는 여러 도시에 헤롯이 세운 건물과 사제들 및 행정관의 승계 등에 관해 토론하였다. 3장은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꾼 빌라도에 대항하는 소요사태로 시작한다. 빌라도가 성전 자금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자 유대인들은 저항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사람들 속에 무기를 숨긴 자객을 보내어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소요사태들 중간에 예수에 관한 기묘하고도 은밀한 문장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때에 또 다른 끔찍한 불행이 유대인들을 곤궁하게 만들었다…” 정통 유대인인 요세푸스가 기독교 이야기를 “또 다른 끔찍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영광스러운 승리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를 유대의 비극이라고 받아들인 것은 바로 기독교인(유세비스와 같은)이다. 세번째 문장은 그대로 생략해도 문장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다. 실제로 이 문장이 없으면 더 자연스럽다.

4)“지금까지(to this day)”라는 문장은 후세에 삽입된 것으로 보여진다. 요세푸스 시대에는 “기독교인들(tribe of Christians)”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기독교(Christianity)라는 명칭는 2시기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5)요세푸스는 이 짧은 문장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James)에 관한 간접적인 자료 외에는 예수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알려진 복음서 혹은 사도 바울의 저작물 혹은 활동들에 관하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당시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회자되었다면 그것들에 관해 알게 되었을 텐데도 전혀 자료로 사용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의 저작물과 마찬가지로 요세푸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기적들에 관하여 침묵하는 대신 다른 예언자들의 기행들에 관하여는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 때에 진짜로 발생하였다면 그 지역 전체에 걸쳐 널리 알려졌을 십자가 사건 당시의 지진이나 일식에 관하여도 그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방대한 그의 저술에서 이 짧은 문장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에 관하여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보다는 오히려 세례요한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갈릴리의 유다, 마술사 Theudas, 그리고 이집트인 유대 메시아를 포함하여 수많은 자칭 메시아들의 활동을 열거하지만, 정작 메시아 소망의 해답이라고 주장하는(만약 그가 썼다면) 사람의 삶에 관하여는 침묵한다.

6)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예수의 삶을 예언하였다고 말하지만 이 예언자들이 누군지 혹은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도 요세푸스는 히브루 예언과 예수의 삶을 연결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그리고 요세푸스가 그렇게 말하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만약 예수가 진실로 신성한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충분히 문서화할 수 있는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을 텐데 말이다.

7)과장된 문장 용어는 사려깊은 역사가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일만가지의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이 문장은 객관적인 보고문이 아니라 특정 종파의 선전문구처럼 들린다 – 달리 표현하자면, 신약성서의 문구와 비슷하다. 이것은 매우 요세푸스답지 않다.
     
운드르 14-08-22 14:34
   
'9세기 Photius라는 기독교학자' ->
이 부분에 대해 제가 조금만 첨언하자면,
동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포티우스(포티오스라고도 합니다)를 가리키는 것 같네요.
총대주교를 지냈다고 하지만 그건 순전히 정치적 정략관계 때문이었고,
시대의 석학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세속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회의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냥 참고하시라고^^;
          
미우 14-08-22 14:39
   
감사합니다.
다만 별로 관심 없습니다. 해당 글이 있기에 그냥 옮겨본 것 뿐입니다.
성경은 어릴 때 4번인가 정독 해봤고 이런식의 연관된 책도 몇권 봤지만 기억도 잘 안나고요.
               
운드르 14-08-22 14:43
   
예, 사실 아나마나한 얘기죠.
그냥 어쩌다 알게 된 이름이 올라와 있길래 써본 것뿐입니다^^;;;
청춘별곡님이 올린 글은 솔직히 고유명사 표기가 너무 엉망이라 신뢰가 안 가는데,
미우님이 인용하신 글은 적어도 그런 오류는 적네요. 글 자체도 더 치밀하고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미우 14-08-22 14:58
   
무의미하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찾을 수 있다면 조물주도 가능해야 정상인데...
논하나 마나죠.
무엇일까요 14-08-22 15:20
   
아직도 기독교가 요세푸스 타령하고 있을 줄이야.
미우님이 글을 이미 올리셨는데,
진리 타령가 에서 조작임을 알 수 있슴.
요세푸스가 부활까지의 기적들을 봤다는 것도 몇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엄청난 기적들을 접해 놓고도,
이후 관심이 전혀 없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슴.

무엇보다,
그 당시에 그 근처에 살았던 기자급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남긴 글 어디에도
죽었다 살아나서 승천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슴.
전해 들었다는 글 조차도 없슴.

오리겐 조차도 저 중요한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슴.
사본 타령 하면서 어물쩍 넘어 가려고 하는데,
Origen의 요세푸스 2세기 버전인 Origen Contra Celsum에 나타나지 않음.

거짓은 거짓을 낫기 마련.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라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했는데도,
거짓을 기반으로 옹호를 하려 드는 행위를 아직까지도 하고 있다니,
참 더럽기 짝이 없다고 느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