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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26 14:41
“다 죽이고 일본인 이주시켜라” 히데요시 지시로 호남 대학살
 글쓴이 : veloci
조회 : 3,739  


선조에서 503으로 바꼈지만 일본은 안 바뀜. 그때나 지금이나 야차같은 놈들

서구권 학생들은 후쿠시마 근처에도 안갔는데  한국이랑 동남아 학생들만 후쿠시마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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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기술한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는 조선에서의 전쟁 참상이 삽화와 함께 상세히 묘사돼 있다. 다케우치 가쿠사이가 글을 쓰고 오카다 교쿠잔이 그림을 그린 이 책은 1797년부터 1802년까지 7편84책이 발행됐다. 위 그림은 왜군과 전쟁 당시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고, 길을 가다가 이를 목격한 명나라 장군과 병사들(왼쪽)이 슬퍼하는 장면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촬영


그런 전라도를 장악한 왜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양도성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피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선조는 내전(內殿·왕비)과 세자 등 자신의 가족부터 피란시킬 방책을 마련하라고 신하들을 채근했다. 선조는 자신의 행동이 비난을 사는 것임을 모르진 않았다. 

“늘 나를 겁쟁이로 여기지만 서둘러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왕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선조의 도피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피하면서 백성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정유재란 발발 전후에도 왜군의 수상쩍은 움직임만 보이면 도주하려 했다. 1596년 11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깨진 후 히데요시가 다시 군사를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는, 황해도 해주 행궁(行宮)에 묻어놓은 왕자의 탯줄(藏胎)을 살펴본다는 명분으로 한양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 신하들에게 제지당했었다. 1597년 6월 일본에서 대군이 건너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도피하려 했다. 또 7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패전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도 선조는 왕비와 왕자 등을 피신시키려고 했다. 그때마다 조정 대신들은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다. 하도 신하들이 말리자 선조는 버럭 화를 냈다.  

“듣건대 조관(朝官)의 가속(家屬)들이 대부분 도성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내전을 떠나지 못하게 강요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까지 하니,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충성이란 말인가?”(‘선조실록’)

선조로서는 신하된 자들이 자기 가속은 챙기면서 임금 가족을 챙겨주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냉엄하게 간언했다.  

“성상(선조)께서는 주야로 궁궐 권속들을 피란시키는 데에만 서두르고 계시니, 천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중국군만 서둘러 군사를 철수하여 귀국할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이 이로 인하여 꼭 닥쳐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어찌 크게 근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가 아침에 후궁을 내보내시면 저녁에는 도성이 텅 비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생각을 못하시는 것입니까.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후궁과 왕자를 먼저 피란시키라는 명을 속히 거두도록 하소서.”(‘선조실록’, 1597년 8월 15일) 

왕부터 그러니 현장의 벼슬아치들 행태도 별다를 바 없었다. 사헌부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원이 패몰된 후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의 백성은 왜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붕괴돼 흩어집니다. 또 열읍(列邑)의 수령들이 곳곳에서 도망가거나 숨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직로(直路)의 수백 리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충청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공주(公州)ㆍ이산(尼山)ㆍ은진(恩津) 세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도망하여 거처를 알 수 없다 하는데, 이처럼 위급한 때에 한 고을을 지키는 신하로서 관직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는 생각지도 않고 먼저 도망하여 백성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속히 나국(拿鞫)하여 정죄(定罪)할 것을 명하소서.”(‘선조실록’)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려면 먼저 민심을 수습한 후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수령들이 먼저 도망쳐 버렸으니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호남인의 씨를 말려라” 

죽어나가는 건 조선 백성뿐이었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임진왜란 때의 왜군과 정유재란 때의 왜군은 확연히 그 행태가 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고려국금제(高麗國禁制)’라는 주인장(朱印狀·붉은 도장으로 사인한 명령서)에서 군사들의 약탈, 난폭, 방화 등 불법적 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납치 등을 하면서도 무자비한 학살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왜군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았고 히데요시도 이를 묵인했었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히데요시는 대놓고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난중잡록’)

히데요시가 자신의 처조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조선 재침략의 왜군 총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지시한 말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기 자식이 대를 이어서 조선을 굴복시킬 것이니, 장기전을 펼치라고 왜군 장수들에게 주문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빈 땅에다 일본 서도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겠다는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조선군에게 붙잡힌 왜장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는 상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할 것이다.”(‘선조실록’)

조선인을 잡아다 일본에서 노동력 착취 등으로 부려먹고, 대신 일본의 일반인들을 병력으로 차출하겠다는 뜻이었다. 히데요시가 집요하게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가 빈 땅을 만들겠다고 지목한 곳이 바로 호남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버틴 것은 조선 수군의 버팀목이자 곡창지대인 호남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호남을 철저하게 짓밟으면 조선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이긴 후 조선 땅에 상륙하자마자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분탕질을 쳤다. 1597년 8월 보름 남원성에서 조선인 백성 6000여 명을 도륙하기 이전인 8월 3일 왜군은 섬진강 하구의 하동과 구례에 도착하면서부터 살육, 약탈, 방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좌군(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을 따라 함께 움직인 종군 의승 케이넨(慶念)은 자신의 일기(‘朝鮮日日記’)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왜군들이)신속히 선박에서 내려 너도나도 뒤질세라 재물이 있는 사람을 죽이며, 서로 빼앗는 모습은 제대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못도 없는 사람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구름처럼 몰려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양새였다.”(1597년 8월 4일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칼로 베고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부모는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다.”(1597년 8월 6일 기록)

“조선 아이들을 잡아서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다시는 만날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의 고문과도 같았다. 애처로운 모자의 이별이 이런 것인가.”(1597년 8월 8일 기록)  

왜군은 남원성으로 진격해오는 도중에도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해쳤던 것이다. 케이넨은 그 스스로가 일본군을 따라온 종군승이면서도 악귀처럼 사람을 잡아 죽이고, 들과 산을 불 지르는데 혈안인 된 일본 무사들을 보면서 아수라장 같다고 표현했다.

돈 받고 목숨 살려준 왜군  

왜군은 군인이 아니라 강도떼에 가까웠다. 이 역시 히데요시가 부추긴 결과였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가하기를 기피하는 왜군들에게 전쟁은 출세와 돈을 벌 수 있는 호기라고 선동했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선물’을 약속했다. 점령지에서의 포로 사냥, 재물과 식량 약탈, 부녀자 겁탈 등을 무제한 허용했다. 병사들이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히데요시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한다고 보증까지 섰다.  

왜병들은 백성을 도륙하면서 목숨 가격을 흥정하기도 했다.

“조선 사람을 사로잡아 남자에게는 쌀 5두(斗)를 걷고, 부인에게는 쌀 3두를 걷은 후에 면사첩(免死帖)을 주었다.”(‘선조실록’) 

케이넨 역시 왜군의 일부 병사가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는 광경을 목격했다.(1597년 8월 16일 기록)  

왜군은 전주를 거쳐 공주와 청주, 천안 등지로 북상하는 동안에도 사람 사냥과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겨울,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를 돌아본 뒤 그 실정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본도(전라도)는 병화(兵禍)가 더욱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이 흙집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곡식을 가져다가 근근이 입에 풀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였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또한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심되고 참담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선조실록’)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826/85994201/1#csidx3db71c36844b6e78a70034cefb1ef2f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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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17-08-26 15:04
   
일본으로 연수 보낸 부모가 뷍신들.. 그리고, 이런 세세한 역사를 고등학생들에게는 아주 중점적으로 가르쳐야 함.
Misue 17-08-26 15:15
   
굳이 일본가서 차별대접 받고 싶다는데.. 말릴생각은 없음.

당해봐야 정신차린다는 말도 있지만.. 당해도 정신차릴런지원 ㅋㅋ
crocker 17-08-26 17:56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일본 역사교과서 살펴보면 교묘히 단어를 바꾸어서 인상을 좋게 심어줍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 1931년 만주사변을 침략이 아닌 만주로 진출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단어를 빼고 진출,출병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로 바꾸어서 현재의 일본인들은 착해서 침략안하는게 당연하다는 세뇌를 심어주는데 이게 은근히 무섭습니다. 단어 선택의 차이에 따라서 인상이 달라지더군요.
동화 17-08-26 18:34
   
좀 불편한 얘기일수 있지만, 임진왜란에 벌어졌던 일을 가지고 현재의 일본을 평가하고 비판,비난하는건 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네요.
일본제국주의시대(일제시대)에 벌어졌던 행위에 대해 일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이해하고 또 그렇게 하는게 좋지만, 임진왜란의 경우..아주 오래전 이야기이고, 정말 그 시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힘 쎈놈이 약한놈을 두들겨 패고 지배하기도 하고..그게 노골적으로 벌여졌던 시대라..그 당시 힘이 약하고 준비가 부족한 조선왕조를 탓해야지..일본을 탓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물론, 안좋은 감정은 가질수 있다고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요.

예를들어..프랑스와 영국이 아주 오래전에 피 튀기면서 서로 싸우고(백년전쟁)..떄론 일방적으로 한쪽이 도륙당하고 학살당하기도 했거든요. 근데, 그거가주고 프랑스, 영국이 서로 나쁜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독일은 일본처럼 근대시기에 벌어진 만행과 제국주의의 표본이라..현재까지도 비판하는거고요.
즉, 일본 역시 근대시기에 벌어진 제국주의 만행과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건 당연한거고 그게 참교육이라 생각하지만..수백년전 또는 천년전..이른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게 당연하던 시절. 강자가 땅따먹기 하던 시절..그거 가주고 뭐라..하는건 좀 오바 아닐까 싶네요.

고려가 원(몽골제국)과 함께 일본 대마도와 규슈에 일부가 상륙에 엄청나게 학살하다시피 한것도 사실이지만, 그거에 대해서 사과할것도 없고 뭐라고 비판-비난 할것도 없잖아요. 그떄는 원(몽골제국)이 강하니까 약한 나라(일본)를 뻇어볼려고 하는것일뿐이거든요. 그냥 그 시대는 그게 이데올로기이고 그게 그들의 가치관일뿐이에요.

근대로 넘어와선 얘기가 많이 달라지지만요.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땅에 침범한 왜구가 노략질을 했다고 하잖아요.그러나 그거에 대해 일본에게 비판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나요 ?
또한, 현재 몽골이란 나라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몽골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나요 ? 

임진왜란은..참 뼈 아프고 극한의 역사인건 분명하지만, 그 시대의 논리로 만들어진 역사라서, 누가 누구에게 잘잘못을 따지고 하기 애매하다고 생각하네요.
물론, 그런 역사로 인해 일본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가질수 있는건 이해하지만, 지금 현대시대에 와서 수백년전에 벌어진일을 가지고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것도 아니고..좀 그러네요.
     
살타고 17-08-26 22:50
   
비판 할수 있습니다

역사가 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연구되고 또 존재하는 이유는
잘못된 행위는 비판하고 잘된 측면은 지향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끔하는 것이고
그래야 중심잡힌 가치관을 정립해 같은 실수를 반복치 않게끔 하는 효과를 얻는것이겠죠

주위에 임진왜란 역사를 가지고 배상을 요구하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대한민국에 50년 살면서 임진왜란으로 비판하는 분들은 봤어도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사람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것 같아서 말입니다.
     
드래곤쥐 17-08-26 23:49
   
현재의 일본과 과거 일본의 행동머리는 하는짓이 똑같지요 .
일본 스스로가 임진왜란을 빌미로 욕먹기좋게 자초한게 있죠

이 점에서 일본은 억울해할 필요가 없고 우리나라도 미안해할필요가 없죠
     
포퓸 17-08-27 01:01
   
님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옛날일은 옛날일이지만 그 옛날일이 쭉이어져서 한국침략으로 까지 이어지고 독도침략가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성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호랑이 담배피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그 옛날 이야기기 지금까지도 한국-일본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땜에 철저히 진상을 파악해야 됩니다.


서로 싸움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식민지를 삼은일도 없고 영토분쟁도 없는  영-프완 기본개념자체가 완전 다른이야깁니다.
     
뱅뱅가드 17-08-27 15:06
   
동화님 지적이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임진왜란을 지적하는 식으로 따지면, 계속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주 옛날에 일본을 정벌했던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배상해야겠죠.
zone 17-08-26 20:11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할 운명이다..
세시봉 17-08-27 07:43
   
몽골인 노동자들 보시면 때려죽이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