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탈북자는 배신자라고 했다고요? 애시당초 인혁당이 간첩죄로 사형당한걸 주제와 관계없는 남파간첩이니 자생간첩이니 교묘하게 논점이탈 시도한거 댁 아님? 그리고 몇마디로 날 지적해요? 그럼 인혁당이 남파간첩이든 자생간첩이든 간첩죄 적용되서 사형 당한 사실은 사실이 아니게 되는 건가요? 뭘 어떻게 지적했다는건데요? 없는 말이나 만들어 내는 주제에 논점이나 이탈해서 쓸데 없는
남파간첩이니 자생간첩이니 ㅋㅋ 인혁당 간첩죄로 사형당한거 맞아요 틀려요? 틀림? 애시당초 없는 얘기나 지어내는 그쪽 말이 별로 마음에 와닿지가 않아요 솔까 키배 뜰 때 구라나 없는 말 만들어 내지는 마세요 그게 기본입니다
인혁당 얘기에 남파간첩 얘기가 왜 나오냐니...
흥분해서 부들부들 떠느라 제정신이 아닌거 같은데
저 뉴스 자체가 남파 간첩에 관한 내용입니다
남파 간첩 내용에 인혁당 얘기 하며 봉창 터지는 소리 하시는 님이 문제인겁니다 ^^
님이 본문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니까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리거죠 ㅉㅉ
통혁당은 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김질락·신영복 주도의「민족해방애국전선」과 이문규·이재학 주도의「조국해방전선」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비합법, 폭력·비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김질락·신영복 주도의「민족해방애국전선」과 이문규·이재학 주도의「조국해방전선」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비합법, 폭력·비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김질락은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가난한 형편에다가 어릴때부터 따르며 자랐던 삼촌 김종태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이리 채이고 저리채이고 하면서 마음속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찬 청년이었다. 비밀리에 북괴와 선이 닿아있던 삼촌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붉은 사상에 깊게 심취하여 결국 이적질까지 하기에 이르지만 그런 상황하에서도 그 특유의 불평과 불만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 김질락 과거.. ㅋㅋㅋㅋㅋ
서울도 북한으로 착각하는 분 때문에 웃고 갑니다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 약칭 통혁당)은 북한노동당의 실질적인 재남지하당(在南地下黨) 조직으로서 전 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였다.
김종태는 북한노동당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미화 7만 달러와 한화 2,250만 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다. 통일혁명당은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李文奎)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검거하면서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더 1대와 라디오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1971년 5월 13일 치안국은 전라남북도에 통일혁명당을 재건, 합법을 위장한 대중조직을 마련한 간첩단 11명을 4월 16일부터 30일 사이에 검거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들의 사명은 ① 호남에 당 호남지도부를 구성, 시·도단위 지하당을 조직하고, ② 공장·탄광·학원에 핵심조직을 두며, ③ 혁신계 정당에 침투하여 적화통일 혁명이론을 퍼뜨리고 유도하는 데 있었다. 증거물로는 무전기 1대, 암호문건 4조, 통혁당강령 9권, 김일성전기(金日成傳記) 등 40권,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려던 암호보고서 등을 압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통일혁명당간첩사건 [統一革命黨間諜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통혁당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씨 등이 월북하여 노동당에 가입하고 김일성에 충성맹세 했으며 대법원 확정판결로 사형된 후 김일성이 김종태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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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6월 25일, 황태성은 당시 대남공작 총책 이효순(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다음과 같은 지령을 띠고 남파되었다.
① 남한의 고위 지도층 가족을 포섭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접 접촉할 것, ② 앞의 사명을 수행하기 어려우면 경상북도에 가서 대구시를 중심으로 당의 기반을 구축하고 신분을 합법화할 것, ③ 남한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조성하여 4·19혁명 재판과 같은 혁명의 계기를 만들 것, ④ 평화통일 선동 및 미군 축출을 위한 반미사상을 고취시킬 것 등이었다.
1961년 8월 29일 평양을 출발하여 9월 1일서울에 잠입, 친척 되는 모 대학강사 김민하(金旼河)와 접촉, 북한에 있는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포섭에 성공하였다. 포섭된 김민하를 통하여 조카딸 임미정(林美亭)과 그녀의 남편 권상릉(權相陵)을 포섭하였다.
그 뒤 10월 9일 황태성은 자신의 중매로 박상희(朴相熙 : 박정희의 형)와 혼인한 조기분 여인을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 및 그녀의 사위인 김종필(金鍾泌)과 접촉하자 권상릉·임미정에게 편지를 휴대시켜 방문하도록 하였으나, 조모 여인은 접촉을 거부하고 곧 수사당국에 신고하였다.
이에 서울시 경찰국 수사진은 10월 20일 황태성을 검거하고 공작금 120만 환, 라디오 1대, 암호 문건 1조 등을 압수하는 한편, 임미정과 권상릉도 체포하였다. 그 뒤 황태성은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처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태성간첩사건 [黃泰成間諜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는 1949년 경찰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장이라는 고위직에 재직하면서 남로당 특수부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투옥되었다가, 6·25전쟁 때 출옥한 후 바로 월북, 밀봉교육을 받고 공작원으로서 그 해 10월 26일 남파되었다.
그 후 남로당과의 인연을 청산한 것처럼 위장하고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남하하여 본격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간부들과 교류,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기밀을 탐지하고 과거 친히 알던 경찰 종사자들을 통하여 대남공작원들이 검거된 상황을 일일이 북한에 보고하는 한편, 북한에서 파송한 공작연락원 한영창(韓永昌)·조돌용(趙突容) 등과 접선, 구체적인 공작 지령을 접수하여 그 결과를 무전으로 보고하였다.
1953년 10월에는 북한으로부터 공작금 3천 달러를 받은 바 있으며, 1956년 여름 10여 년에 걸친 그의 활동을 평가받아 북한의 초청으로 월북하여 약 1개월간 있으면서 북한 공산정권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그의 위장된 정치권 활동은 야당인 진보당과 민주당의 고위 간부들에게까지 손을 뻗쳤고, 자유당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추천받아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 찬조 연사로도 활약하였다.
1957년 8월 체포되었을 당시 그가 간첩활동의 대상으로 삼아 평소 긴밀히 접촉했던 인사는 장관급·국회의원 및 각 정당의 간부 등 고위층 인사가 50여 명에 달하였다. 그의 체포는 간첩 한영창이 남파되어 불심검문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경기도 경찰국은 관할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한영창을 검거하고 의약용 고무 튜브 속에 감추어 온 지령문과 미화 8,000달러를 압수하는 한편, 접선 대상자가 간첩 임주홍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은 수감중에 있던 임주홍을 조사한 결과 배후에 김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간첩 한영창이 도망갈 수 있도록 풀어 주어 그와 접선하기를 기다려 한영창의 집에서 만나는 것을 모두 검거하였다. 한영창의 집에서는 암호문·무전기·권총 등이 압수되었고, 그는 그 해 겨울 사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제간첩사건 [金正濟間諜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월북했다가 남파간첩이 되면 무효!!!! 라고 외치는 멀티탭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신오는 1948년경 남로당에 입당하였으며, 1950년 7월경 인민군 군관(정치간부)으로 입대하여, 1956년 7월경 상위로 제대하였다. 1957년 2월경 중앙당에 소환되어 5개월간 간첩 밀봉교육을 받은 후 1957년 7월경 강릉, 묵호, 삼척 등지에서 거점 확보 및 인물포섭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군산으로 상륙하였다. 부산에서 2년간 간첩활동을 하다가 1959년 2월경 강릉으로 이주, 오복라사를 경영하며 간첩활동을 하였다.
1911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수임은 어린 시절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능통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미군정기 때 헌병대장 존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독일 유학파 엘리트 공산주의자인 이강국과 애인 사이로 지냈다. 이강국은 북한 정권에서 초대 외교부장으로 발탁됐던 인물이었으며, 김수임은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1949년 '미군철수계획'과 같은 중요기밀을 북측에 넘기고, 남한에서 수배를 받던 이강국을 월북시킨 혐의 등으로 1950년 3월 체포돼 6월 15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호는 광복 후 북한에서 교역을 가장한 첩보공작 총책으로 활동하다가 1953년 5월 북한 내무상 방학세(方學世)의 지령을 받고 정당침투의 임무를 띠고 남파되었다. 지령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서울에 침투하는 즉시 위장자수하여 정당에 침투할 것, ② 조봉암(曺奉岩)과 자유당의 유화청(柳和靑, 초대총무국장)·정현모(鄭顯模, 초대당무국장)·진승국(秦承國, 당시 조사부장) 등 네 사람을 포섭하여 5·20선거(1954년)에 민의원으로 당선시킬 것, ③ 각종 중요기밀을 탐지, 보고할 것 등이다.
박정호는 남파된 뒤 합법적인 신분보장을 얻기 위하여 서울지검에 위장자수를 하고, 공작금으로 서울 중구 동자동에 대영목재주식회사(大榮木材株式會社)를 차려놓고 사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새로운 혁신세력을 규합하여 신당을 조직하고자 활동하고 있던 김경태(金京泰)·오중환 등을 포섭하고 막대한 공작금을 살포하면서 혁신세력 통합공작까지 벌였다.
정계거물인 장건상(張建相)·김성숙(金星淑)·조봉암 등 혁신계 정치인 20여명과 접선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바 평화통일노선에 입각한 정당을 조직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1958년 실시될 대한민국 민의원선거에서 같은 당원을 많이 당선하게 하여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변란을 기도하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절차를 거쳐 1959년 5월 6일 서울교도소에서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