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9-1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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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핵개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과학자들도 맨해튼 계획에 참가했으나, 영국과 미국 과학자들과는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3류취급을 받으며 중수로와 플루토늄분리 작업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는데에 그쳤다.전쟁 후 첫 수상에 오른 샤를 드 골 장군은 전쟁이 끝난지 몇달도 안 되었던 1945년10월, 핵폭탄의 개발을 비밀리에 명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하였다. 드 골은 곧 물러났지만,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었다.프랑스의 핵개발 의지를 알고 있었던 미국, 영국, 캐나다는 우라늄공급통제조약을 맺어 프랑스를 방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프랑스 국내에서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는 행운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프랑스와 영국의 독자핵개발 의지를 더욱 굳혀준 사건이 1956년에 있었는데, 제2차 중동전쟁이 그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작전은 이스라엘의 주도 아래 잘 진행되었으나, 소련이 개입해 이집트에서 얌전히 철수하기 vs 핵로켓 쳐맞고 개털리기라는 조건을 들이대자 미국이 동조하면서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굴욕의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나마 영국은 그 당시 원폭과 수폭의 개발이 거의 끝나가 양산체제에 돌입한 상태였지만, 프랑스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점점 뒤쳐지고 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정신이 프랑스에 팽배했고, 결국 일을 내고 만다.결국 프랑스는 원수 독일에게 핵무기 공동개발을 제의하기에 이르고, 비자금 20억 마르크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에서 서독이 프랑스에게 비밀리에 핵 기술과 돈을 지원한다면 핵개발후 프랑스의 핵 전력에 대한 서독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한 계약이 성사되려는 찰나, 알제리 쿠데타를 계기로 집권한 드 골 장군이 그 계획을 취소시킴으로서 프랑스의 단독프로젝트로 남게 된다.계약이 취소되자 당시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곧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이후 서독은 MRBM마저 배치되면서 완전한 NATO의 개로 전락하고 만다..한편 NATO를 미국-프랑스-영국의 3강 체제로 만들자는 드 골의 제안마저 프랑스가 핵이 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드 골은 그 어떤 수와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독자적인 핵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드 골은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핵개발을 주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다.프랑스가 공개적으로 대놓고 핵개발을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자,UN.미국.소련 등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프랑스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지만, 핵개발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라를 막을 수 없다는 국제정치판의 법칙은 이번에도 맞아 떨어졌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by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결국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핵실험 직후 드 골이 말하길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국력에 비추어 보아 소련이나 미국에 맞먹는 핵전력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비례억지전략이라는 핵전략을 채택했다. 자세한 것은 관련 위키를 참조.
이는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높기에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전략이었으나, 이 전략을 세운 당사자인 프랑스나 3차대전 발발시 주 전장이 될 서독으로서는, 핵무기가 일단 사용되기 시작하면 인류문명이 멸망할 전면적 핵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에 강요함으로서 이들이 유럽전선을 무대로 핵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 안전하게 전쟁놀이하면서 유럽전선에서만 핵무기를 주고받으시겠다? 웃기고 자빠졌네. 우리가 죽으면 니들도 죽는거야."결국 이 팽팽한 갈등은 민주당 정권과 드 골 정권이 모두 끝난 1969년 에 끝난다. 정권을 잡은 닉슨 정권은 프랑스의 그 고집에 질려서(…) 결국 프랑스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에 이른다. 어차피 프랑스가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 확실하다면, 차라리 도와주고 관계개선을 시도하려고 한 것. 당시 프랑스는 SLBM의 MIRV화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맥마흔 법에 의해 기술의 해외이전은 금지되어있었고, 결국 미국은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예를 들어 프랑스 기술자가 MIRV의 탄두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면, 프랑스 기술자는 미국 기술자에게 문제를 풀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는 그게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만 짚어주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미국측 기술자가 범법자가 되는것을 막을 수 있었다.또한 미국은 네바다 핵실험장에 프랑스가 자신들의 측정장치를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프랑스의 핵실험 횟수를 줄여 개발비를 절약하려는 노력(…)도 했었다.미국은 또한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프랑스의 핵폭탄을 실험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관대한 제안까지 했으나, 프랑스에게는 그게 굴욕이었는지 거절했다. 대신 미국은 과학자들을 파견해 프랑스가 무루루아 섬에 건설하던 핵실험장의 건설을 지원했다.이렇게 관대한 미국이었지만, 끝까지 전략핵 잠수함에 대한 기술은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해군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략핵잠은 해군의 보물이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는 외부 지원 없이 자체개발에 성공한다.(!)당시 프랑스의 한 관계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핵무기 관계자들은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이 프랑스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발전시켰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게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영국-캐나다 3국의 우라늄공급통제협정으로 핵개발을 저지당할 뻔 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프랑스는 미국에게 지원을 받은 이후로도 한국에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판매하려 시도하는 등 미국의 핵 비확산에 대해 불쾌한 입장을 표명하곤 했다.(…)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대신,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땅에 자신들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지지했고, NATO군에서는 탈퇴했으나 유사시 프랑스군이 NATO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비밀리에 허락했다.결론적으로, 프랑스의 100% 순수 프랑스 기술로 만들어진 force de frappe(핵타격군)은 강하고 위대한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MIRV개발과 몇몇 부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엄연히 자체기술로 핵실험에 성공했고 지상/수중배치 핵탄두와 그 발사체까지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면 영국은 SLBM체계 개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결국 미국의 폴라리스, 트라이던트 체계를 구입해서 운용하게 된다.이로 인해 미국은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고로, 이 때 프랑스의 핵개발예산은 한 때 국방예산의 25%에 이르렀을 정도이며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목소리로 조국의 핵무장을 외쳤다.미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프랑스는 미국을 위해 자국의 핵전략도 고쳐주었으며, 그외에도 미군의 유럽배치를 허락하는등 많은걸 양보했다.출처:엔하위키 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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