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의《고사통(故事通)》에 의하면 '강자(羌炙)'는 서북부 유목민족이었던 강(羌)의 고기찜[煮]을 뜻하고, '맥적(貊炙)'은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계의 맥(貊) 종족이 즐기던 불고기[炙]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3세기 경 중국 진(晉)나라 때의《수신기(搜神記)》에서는 맥적을 만들 때 "장(醬)과 마늘로 조리하여 불에 직접 굽는다."고 했으며,《의례(儀禮)》에는 '범적무장(凡炙無醬)'이라 하여 적(炙)은 이미 조리되어 있으므로 먹을 때 일부러 장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이 맥적이 고구려로 계승되어 오늘날 세계적으로 뮤명한 '불고기'의 원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금해 오다가. 고려 말엽 몽골족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다. 특히 몽골 사람이 많이 머물던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서는 맥적이 '설하멱적(雪下覓炙)· 설리적(雪裏炙)· 설야적(雪夜炙)'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이것이 지금의 불고기로 이어지고 있다.
설야멱적의 어원
《산림경제》(1715년경)는 설야멱적에 대하여 "소고기를 저며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다음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기름과 소금을 바른다. 충분히 스며들면 뭉근한 불에 구워 물에 담갔다가 다시 굽는다.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참기름을 발라 숯불에 다시 구우면 아주 연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고, 조수삼(趙秀三:1762∼1849)이 쓴 《세시기》에서는 "설야멱을 일명 곶적(串炙)이라 하며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굽는다."고 하였다.
《해동죽지》(1925년)에는 설야적(雪夜炙)이 나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명물로서,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삼성판《한국어대사전》에는 '설적(薛炙)'이 나오는데, "송도 설씨(薛氏)가 시작한 데서 유래한 말로,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이라고 쓰여 있다.'설적'을 만드는 방법이《세시기》에 나오는 설야멱(雪夜覓)과 같은 것으로 미루어 '설야멱[적]'이란 말이 '설리적'을 거쳐 '설적'으로 변하면서 그럴듯한 유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설야멱(雪夜覓)'은 '눈[雪] 내리는 밤[夜]에 찾는[覓] 고기'라는 뜻인데, 조선 순조 때 조재삼(趙在三)이 쓴《송남잡식(宋南雜識)》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태조가 눈 오는 밤에 진(晉)을 찾아가니 숯불 위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1800년대 말의《시의전서》에 "큰 잔치나 제사에는 일곱 가지 적(炙)을 쓰는 데, 고기산적 외에 생선적· 족적· 닭적· 꿩적· 양서리목· 간서리목이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서리목'은 설야멱(雪夜覓)을 뜻하는 것으로, 소의 밥통고기인 양이나 간을 넓게 썰어 잔칼집을 넣고 꼬챙이에 꿰어 석쇠에 구운 음식이다.
그러면 우리말의 '-서리목'은 단순히 한자어 '雪夜覓⇒雪裏炙'에서 유래한 말일까?
옛글에서 '서리'는「사이· 가운데」를 뜻하고[*辛苦히 盜賊의 셔리로셔 오라(辛苦賊中來)《杜解5:5》], '목'은「몫· 꿰미」를 뜻하던 순수한 우리말이었다. '목'이 '몫· 꿰미'의 뜻을 갖는 현대어로 '목돈'이 남아 있다. 가운데가 구멍 뚤린 엽전을 꾸러미로 엮어 허리춤에 꿰어차고 다니던 지난 시절에 얼마 안 되는 몇 푼의 돈이 '푼돈'이고, '목돈'은 엽전 꾸러미에 가득 꿴 한 몫의 돈에서 비롯된 말이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한우사랑
콩을 세계에서 최초로 재배하고 간장 등으로 활용해온 민족이기에
불고기 원조는 두말 할것도없이 우리 한민족이고
불고기의 연원을 따지자면 고조선까지 끌어올릴수 있지않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