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국민학교 학급문고에서 빌려서 읽은 김좌진장군 위인전에서는 별다른 중간과정없이 독립운동 열심히하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공산당무리들이 총으로 김장군을 암살했다고 나와서 '이 나쁜 빨갱이 넘들은 안끼는곳이 없구나' 이랬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아래 세부사항들을 읽어보면 '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 확실하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독립운동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봤을때 김두한이랑 별차이없어보이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나하구요. 비슷한 위상을 가진 홍범도 지청천장군은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거든여.
제가 말하고 싶은건 인간은 양면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완벽한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않고 공과를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해야한다는거죠. 저는 아래와 같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장군은 독립운동가가 맞다고 생각합니다.최근 박원순시장과 백선엽장군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https://namu.wiki/w/%EA%B9%80%EC%A2%8C%EC%A7%84/%EA%B3%BC%EC%98%A4
북만주에 사는 한인들은 가난했고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괴로운 삶을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는 것도 힘겨웠다.
그런데 김좌진 세력은 북만주 한인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냈다. 돈을 내는데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협박과 테러를 하며 위협을 했다. 그랬는데도 끝내 따르지않고 거부하면 죽여버렸다. 이런 테러활동에 대표적인 사람 중에는 이백호가 있다. 그는 신민부 군인세력의 중심인물인데 김좌진 장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3] 농민들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테러범을 김좌진 장군은 총애했던 것이다.
일본 제국은 조선(=대한제국)을 침략했고 한국인들은 일본에게 국가를 빼앗겼고 자신들의 영토를 일본에게 강제 점령당해야 했다. 일본에게 강제점령 당한 영토는 한반도다. 하지만 만주는 다른 국가인 중국의 영토였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재만한인들은 친일반역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도 중국 관헌에게 김좌진 측 군인을 고발할 권리도 없었고, 돈을 필수로 내야 했다. 물론 기존 중국 측에서 김좌진 측에게 정식으로 자치권을 허용해준 것도 아니다.
이 과정에서 김좌진 세력이 벌인 테러는 당시 북만주 한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이러한 김좌진 측의 테러활동은 여러 자료가 증언하고 있다.
김구의 증언[편집]
우리 한인들은 비록 중국 경내에 거주했지만 처음에는 가가호호에서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세금을 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
백범김구, 도진순 주해 2016년 전자책
당시 김좌진 측의 테러는 한반도의 언론인 동아일보에도 실릴정도였다. -중략-
김좌진의 측근 이강훈도 그 점을 증언했다. 이강훈은 김좌진 장군의 측근인데 그런 측근조차 김좌진 측의 부당한 테러 활동을 증언하며 변호는 커녕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않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이 없는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중략-
정화암 증언[편집]
같은 아나키즘 진영이지만 측근보다는 거리가 먼 사람의 증언도 있다. 정화암의 증언이다. 정화암은 다음과 증언한다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니 한족총련의 활동 가운데도 문제가 없지 않더군요. 이것은 정말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합시다. 그 가운데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더란 말입니다. 악한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뭘 하는고 하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넓은 지역에서 자기네가 중앙총본부라 해가지고 각 지역을 다니며 우리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중앙총본부에 세금을 내라> --- 그래서 그것 갖고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 중국의 사천성에서는 10년 뒤의 세금까지 미리 거뒀다더니.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놈들이 총들고 와서 계집도 빼앗아가고 소도 잡아가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산당원들 눈으로 볼 때는 이런 종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움이 났는데...[15]
정화암의 증언에 따르면 김좌진 세력("한족총련", "중앙총본부") 은 농민을 약탈하면서 위협했다. 그 탓에 공산당들이 분노하여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정화암과 아나키즘 세력은 공산당과 죽기살기로 싸웠다. 언제 공산당에게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기까지 했다.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초로 세워놓고 두가지를 경계하게 했습니다. 우리 동포 공산당원이 넘어오느냐? 왜놈이 넘어오느냐? 이 두가지를 경계하게 했습니다.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온다고 하면 신을 신고 옷을 입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대처해야 했습니다. 내가 만주에서 몇 해 동안 직접 겪은 일입니다.[16]
그렇게 공산당에게 위협당하고 대립하던 사람인데도 위와 같이 증언한다.
7. 간민호회 테러와 최계화 암살[편집]
신민부 군정파는 간민호회에 대한 테러를 하기도 했다. 간민호회는 '영안현 입적간민호회'를 가리키는데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권한을 획득해 실질적인 자치기관의 면모를 갖춘 곳이라 한다. 최계화(구영필)의 간민호회와 김좌진의 신민부는 시대적 상황과 이념적 차이 같은 여러점으로 인해 대립을 하였고 대립을 보여주는 기록은 수없이 많다고 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립도 있으나 영고탑 일대 주민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강제 징수하려는 신민부와 이에 저항하는 간민호회 간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18]
옌볜대 박창욱 교수는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이란 걸 공개했었는데 신동아에 의해 소개된 내용을 재인용한다.
신민부는 영안 지방을 자기 세력범위에 넣고 군자금을 모으고 자기 단체 세력을 뻗치는 데 매우 필요한 지방으로 느꼈다. 때문에 간민호회를 타도하고 전 영안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정 14년 9월 먼저 보안대를 파견하여 길에서 간민호회 수령 최계화(구영필)를 암살하는 것으로, 기타는 위협, 공갈하였다. 영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신민부의 이러한 태도에 질겁을 먹고 이전에 구영필을 수령으로 한 경상도파는 신민부와 연계를 갖고 있는 평안도파에 눌리게 됐다.
신민부에는 3개 보안대가 있었는데, 문우천을 대장으로 한 제3대가 영안지방을 관리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영안, 해림, 수문하와 기타 성시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강제로 징수했다(제3보안대장 문우천은 구영필을 암살하였다는 혐의로 현(縣)공서에 구류되어 지금 심문을 받고 있다).’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317/2 것을 재인용 재인용
우성박용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한애라가 최계화(구영필)를 언급한 글도 발견된다.
황상규, 김대지와 함께 의열단 지도부였던 구영필은 영고탑에 한인마을을 조성하고 쏟아져 오는 유민들을 받아들여 터전을 닦게 도와주었다. 구영필은 이 곳을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만들어갔고 의열단 의거 자금을 댔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을 피해 만주 영고탑에 도착한 김좌진의 신민부는 구영필의 기득권을 빼앗기 위해 구영필을 친일파로 몰고 결국 살해했다. 김좌진의 부하들이 죽였으니까 구영필은 친일파인가?
지혜겸의 증언[편집]
훗날 공산주의자 측 인물도 그점을 증언했다.
양환준이 말하길 지혜겸에게 이런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근거라면 지혜겸선생(같이 공산당을 했고 조국이 광복된 후에 연변대학 역사과 주임교수가 됨)이 말씀하기를 (...) "한번은 금방 조선에서 망명해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내리고 공산당 혐의 분자라고 때리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돈 500원을 내면 놓아 준다고 했답니다. 그의 가족이 급히 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19]
공산당의 증언 하나만 보면 정말인지 모함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증거들을 보듯이 증언내용과 비슷한 증언은 김좌진 세력 측에서도 나오고 있다. 공산당 측이 일방으로 주장한 거짓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9. 별명: "마왕", "폭군"[편집]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은 점점 존경심을 잃어갔다. 사람들에게 김좌진 세력과 테러는 무서운 존재였다. 북만주 한인들은 김좌진 장군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마왕. 사람들은 김좌진을 마왕, 폭군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하고 멸시했다.[20]
김좌진 장군은 북만주 재만한인사회에서 마왕처럼 군림했고,재만한인들은 그런 김좌진 장군을 점점 멀리했다.
10. 김좌진 장군이 살해된 근본 이유[편집]
"네 아버님을 살해한 박상실이라는 자가 한때 사회주의자 활동을 했었지만...... 분명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였다고. 진실은 아무도 몰라...!" - 야인시대, 정진영
근본 이유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있는 공산주의 사상을 위해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이의 암살도 아닌 만주 조선인들이 김좌진 측 테러에 복수한 것이다.
1928년 11월, 북만주 빈주현에 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만주 빈주현은 원래 신민부에서 돈을 걷어가던 지역이다. 그러나 빈주현 주민들은 더이상 신민부와 연결되기를 거부했다. 주민들은 주민대회를 열고는 신민부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신민부에 그것을 통지했다. 그러자 김좌진의 부하 25명은 무장을 하고 빈주현에 들이닥쳤고 주민대회장에 총탄을 퍼부었다. 이때 류연동, 김봉진, 황혁은 곧바로 죽었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은 중상을 입었고 그 밖에 여러 사람이 총탄에 맞았다.[21]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뿐만 아니라 같은 신민부원인 최호 진영도 적극 비판했다. 최호 진영에서는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賣族的 走狗),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 정신(鄭信) 등을 매장하라”고 강하게 규탄했다.[22]
그리고 1930년 1월 24일에 산시참에서 "박상실"(=공도진)에게 총탄을 맞고 살해됐다.
일본내부기밀 문서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좌진 일파에 대한 지방의 반감으로 특히 빈주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재중청년동맹의 일파는 계속 김좌진의 살해를 계획해 왔다. 지난 달 25일 그는 중동로 산시참에서 암살당했다.[23]
즉 빈주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김좌진을 죽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썼던 정화암 선생의 증언을 다시 보자.
"이놈들이 총들고 와서 계집도 빼앗아가고 소도 잡아가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산당원들 눈으로 볼 때는 이런 종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움이 났는데..."
공산당에게 테러위협을 받던 사람조차 한족총련(지난날 신민부) 사람들이 협박하고 강탈하니 공산당원들이 분노해서 싸움이 났다고 증언한다. 일본내부기밀 문서는 실제 정황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가해자들이 김좌진 장군을 노리고 죽인 이유는 분명했다. 김좌진 측 테러에 대한 복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중들에겐 공산당이 김좌진 장군을 죽였다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11. 독립기념관 편찬도서에서[편집]
빈주사건은 독립기념관 학술서에서도 나올만큼 독립운동계에서는 유명한 사건이다.
1927년 2월 일제는 석두하자의 신민부 본부를 습격하여 김혁과 유정근兪正根등을 체포했다. 이에 신민부는 수습책을 논의했으나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군정파와 민중본위의 자치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군정파는 1927년 5월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고 영안현 밀강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군정파는 1927년 8월 북만한인교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인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에 민정파는 1927년에 고려국민당을 조직하고 주하현 신개평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가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대립하였다. 특히 ‘빈주사건賓州事件’을 계기로 민정파와 군정파는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1928년 10월 20일 신민부가 관할하는 지역인 빈주에서 한인 40여 명이 회합하여 군정파 보안대의 무력적인 행동에 대해 자위책을 협의하고 있었는데 군정파 군인들이 이를 두고 자신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모의한다고 판단하고 무장대를 파견하여 황혁 등 여러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1928년 11월 하순 영안현에서는 민정파 지지자 중심의 대표들이 모여 북만주민대회를 열고 군정파의 영수인 김좌진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현주,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 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32-233면
신민부의 경우 민정과 군정 양파의 분쟁이 3부 통일회의를 결렬시키는 큰 원인이었다. 이 같은 신민부 내의 내분은 통일회의가 결렬된 후에도 계속되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더욱 치열해졌다. 3부 통일회의가 결렬되었다는 정식의 통고가 있기 전인 1928년 10월 20일 빈주賓州에서는 신민부의 관할 한인 4~50명이 회합하여 일제의 무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위책과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측에서는 이 회의를 민정파가 주최한 비밀회의로 오해하였다. 따라서 군정파에서는 회의장소에 무장대를 파견하여 회의의 책임자인 황혁黃赫등 수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한인들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 같은 불화가 생기자 1928년 11월 하순 영안현에서는 민정파를 지지하는 신민부 관할의 6개현 16지역의 한인들이 회합하여 북만주민대회北滿住民大會를 개최하고 빈주에서 발생한 군정파의 행위를 성토하였다. 그리고 군정파의 지도자인 김좌진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채영국,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0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7, 282면
12. 본 내용은 조선족들의 주장이다?[편집]
이강훈 선생은 강원도쪽이고, 대한민국에서 돌아가셨다.# 정화암은 전라북도 김제고 대한민국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당연히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언론이고, 거기다 당시 중국측 문서와 일본내부문서도 조선족과 무관하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역시 대한민국 단체다. 조선족과 전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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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위와 같은 독립군들에게 착취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재만 조선인들의 눈에는 독립군=마적단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눈에는 과연 독립군 김좌진과 일제앞잡이 백선엽중에 누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과연 절대선과 절대악이라는게 존재할수 있을까요?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요즘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