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일본의 반도체를 쓰지 않고서는 ‘핵탄도탄’의 정밀도가 보장될 수 없게 되었고, 미국과 소련이 아무리 군비확장을 계속한들,
일본이 반도체 판매를 중지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일본이 반도체를 소련에만 팔고 미국에는 팔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전반적인 군사력의 균형이 일거에 뒤집힐 수 있다.”
1989년 일본 버블경제 최고 절정기에 출간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첨부 참조)이 있음. 당시 소니 회장이었던 모리타 아키오가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공저한 책인데, 한 마디로 말해 일본은 미소 양강 사이에 낄 수 있는 초강대국이 되었으니 국제 사회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만 한다는 내용임. 특히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거의 장악했기에, 일본 반도체가 어느 편을 드느냐에 따라
패권경쟁의 승패가 결정될 수 있다는 아주 대담한 내용까지 있었음. 본문 시작 부분이 바로 저 내용임.
일본이, 특히
일본 반도체가 소련에 붙으면 미국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아주 공격적인 주장을 담은 책이 20쇄나 팔릴 정도로 일본에서 대히트를
쳤고, 또 그 저자가 일본 최대의 전자기업인 소니 회장(예컨대 지금으로 치면 삼전 이재용 회장급?)이기까지 하니 미국은 일본에
대해 안보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더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음. 위 사례뿐만 아니라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미국은 일본 경제와
반도체가 자국 경제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 결과가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임. 바로 그
때부터 일본 반도체와 경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됨.
물론 삼전과 하닉이 임형규 사장님 같은 선구자 분들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역량으로 잘 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승자가 된 것도 큼. 그런데 앞서의 이유로 미국이 일본 반도체를 조지고, 반대로
한국 반도체를 밀어 줘서 성공할 수 있었던 부분도 적지 않음. 크리스 밀러 교수도 저서 '칩 워'에서 미국이 ‘적의 적은
친구’라는 판단하에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적극 지원했고, 그로 인해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그런 관점에서 일본 반도체 몰락의 교훈은 세계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는 앵글로색슨에 개기면 개쳐맞게
된다는 사실임. 심지어 미국 GDP 81% 수준까지 따라잡고, 1990년에 1인당 GDP 전 세계 1등을 찍어 봤고,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거의 장악했었던 일본마저도 미국에 개쳐맞고 몰락하게 되었음. 최전성기 일본도 이렇게 되었는데 한국 따위가 미국에
개기면, 혹은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미국이 한국 반도체를 어떻게 조지게 될 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
그렇게
보면 지금 일부 정치 세력이 칩스 법에 대해 "미국이 일본 반도체를 조졌던 것처럼 한국 반도체도 조질 것이다."라고 선동하는데,
이 주장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빠졌다고 생각함. 바로 '한국이 미국의 편에 붙지 않는다면'임. 다시 말해 "한국이 미국
편에 붙지 않는다면, 미국이 일본 반도체를 조졌던 것처럼 한국 반도체도 조질 것이다."인 것임.
사실 지금 이슈가
되는 칩스 법 독소조항은 한국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음. 용인 클러스터 발표에서도 드러났듯 미국이 한국에게는 대만과 달리
반도체 FAB을 반드시 미국에 짓도록 강요하지는 않거든. 왜? 한국이 미국 말을 잘 듣고, 또 미국 편에 설 것이기 때문에 안전한
공급망(프렌드쇼어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거든. 그런데 만약 한국이 그렇지 않게 행동하지? 미국이 한국을 믿을 수 없게 되지?
반도체 FAB을 미국에 지으라는 압박과 강요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지리라고 생각함. 반도체 산업을 미국이 지배한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산업 외적 측면, 예컨대 환율 같은 수단을 통해서도 미국은 한국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엄청나게 많음.
이렇게
되면 일부 정치 세력이 걱정하는 미국의 일본 반도체 키워주기도 그때부터는 진짜 현실이 되어 한국 반도체에 큰 위협이 되리라고
생각함. 대만과 한국을 대체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고, 또 반도체 부활에 대한 일본의 의지가 대단하거든. 지금 우리가
메모리, 파운드리 모두 일본을 좁밥 취급하는 것과는 다르게 미국이 작정하고 한국 조지고 일본 밀어주기에 들어간다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정말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함.
결국 일부 정치 세력이 걱정하는 '미국의 한국 반도체 조지기와 일본 반도체
밀어주기'는 오히려 오이디푸스식 자기 실현적 예언에 가까움. 위와 같은 걱정으로 미국과 멀어지려는 행위가 결국 애초에 우려하던
결과(미국의 한국 반도체 조지기와 일본 반도체 밀어주기)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거든. 즉, 쓸데 없는 걱정을 먼저 해서 스스로가
화를 초래하게 된 상황임.
결론적으로 한국 반도체가 선택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음. 미국 편에 찰떡같이 붙어서
미국이 한국을 안전한 공급망 파트너라고 믿게 만드는 것임. 그리고 어차피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또 미국이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상 선택지는 미국밖에 없음. 미국을 선택하면 미국은 한국 반도체를 중국으로부터 지켜줄 것이고, 또 프렌드쇼어링 파트너로
선택해서 메모리는 현재의 독과점 위치를 굳히고 파운드리에서는 대만 TSMC의 파이를 나눠 먹게 해줄 것임. 일본 반도체 몰락의
가장 큰 교훈, "미국에 개기면 뒤진다"를 한국 반도체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만 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