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이슈 게시판
 
작성일 : 19-06-13 18:17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최악인 점.
 글쓴이 : blazetorz1
조회 : 1,207  

https://namu.wiki/w/%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20%EC%82%AC%EA%B1%B4


[편집]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의 증언[1]

6·25 전쟁 중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회,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횡령 및 뇌물 범죄로 인해 보급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된 사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 중 민간인을 징집하여 일종의 예비역 육군 인재 풀(pool)인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병력 수송 비용과 식비 등을 횡령하여, 신정동지회 김종회 등 20여명의 국회의원들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제공되었다. 덕분에 징집된 방위군이 혹한기 속에 굶주리면서 행군하여 기아와 동상으로 전투 한번 없이 희생된 대한민국 육군 최악의 흑역사이다.

즉, 적군도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 경시로 100여 일 사이에 전투에 참여는 커녕,  한 번 못 만져본 장병 수만 명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으며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유영익 교수도 "9만 명 가량의 장정들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애초에 내로남불의 중증 정치병에 걸린 환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저렇게 규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점은 적군이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아니라, 적을 맞아 싸울 전투병력이 전선에 투입 한 번도 되지 못하고 사실상 아군의 손에 대량학살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이 사건으로 낙루장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 규명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무지막지한 회의감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스스로 행정부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지경이었다.

2. 첫 부대 소집[편집]

1950년,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무단 월경[2]을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중공군[3]과 전쟁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한동안 북한 치하에 있었던 남한의 장정들, 즉 곧바로 군인으로 징병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이 다시금 공산군에 의해 징병 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이미 북한 점령지역의 남한 청년들 다수가 허울 좋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징병되어, 조선인민군 육군에 징집되버린 전례가 있었다.[4] 따라서 정부는 같은 해 12월 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하여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대한민국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2월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서 소집돼 행군에 나섰다. 사실 중공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 그로부터 겨우 2주 뒤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두른 게 이해는 간다. 그러나 아직 행정체계고 뭐고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낙동강 이북 지역을 수복했다가 다시 상실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인원이송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모론을 펼치면,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바탕 쇼를 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면 굳이 정치자금을 먹으려면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문서로만 존재하는 유령부대를 편성하는 게 뒷말도 없고, 목격자도 없어서 은폐하기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대를 편성하는 것보다 수고도 적고, 빼먹은 것 들키기도 어려우며, 보는 눈도 적어 공금유용에 최적화된 방법이다. 앞서 링크된 것처럼 시대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애용되는 수법이다. 즉 국민방위방군의 예산유용은, 대규모 편성 인원에게 산정된 예산을 탐욕스럽게 빼돌렸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앞뒤가 바뀐 음모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음모론 여부를 떠나서 당시에 유령부대를 만드는 것은 써먹기 어려웠다는 주장도 있다. 위 링크에서처럼 유령부대는 비전시에나 써먹을 수 있는 것으로, 국방예산을 전시에 유령부대에 집어넣고 있으면 몰락의 히틀러 재탕 찍을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XX를 비롯한 4개 사단은 방어시키고, 나머지는 다 공격시킵시다. 그 부대들 다 유령부대인데요? 더구나 6.25 전쟁 시기에 전시작전통제권은 전쟁 발발 1달 만에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에 이양하여 유엔군 사령관이 행사했는데, 그 상황에서 유령부대 따위를 만들었다가는 금방 들켰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부분으로, 작전권과 통수권은 엄연히 다르다. 노태우 정부 시절 평시 작전권을 우리 쪽에서 단독행사하기 전까지, 작전권은 전/평시를 막론하고 모두 유엔군사령부에서 행사하였다. 작전권이 군령권이라면, 인사/행정/교육은 모두 군정권에 속한다. 따라서 평시는 물론이고, 전시인 6.25 전쟁 당시에도 장교 및 사병의 배치 및 진급/전역, 신병의 훈련과 간부의 교육 등은 모두 우리측 관할에 속하는 권한이었다. 국민방위군 역시 징집하여 바로 전투에 투입할 목적이 아닌, 후술되는 것처럼 후방으로 이송한 뒤 각 교육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예정이었다. 벌어지는 참극은 모두 후방 교육대로 이송하는 동안 벌어진 것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즉, 국민방위군 자체는 유엔군사령부가 아닌 우리 쪽 육군본부에서 지휘 및 통솔 권한이 있었다.[5] 앞선 주석의 막장 이라크군에서 보듯, 허위로 교육대를 만들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인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실제 편성인원보다 적은 수로 징집하고 나머지는 유령인원으로 할당하면 뒷소문 없이 깔끔하게 해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징집했을 뿐, 별도의 사단이나 여단으로 미리 편제를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대에서의 훈련 수료 후, 각 부대에 뿌려지기 마련이므로 인원 조작도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다.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수 만에 달하는 인원이 이동하여 소문이 안날 수가 없는데, 단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술책을 부렸다기엔 어폐가 있다. 인원이 편성되며 배당된 예산에 군침을 흘린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예산을 빼먹으며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았다고 보는 것이 선후관계에 타당하다 하겠다.

3. 죽음의 행렬[편집]

당시 작전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만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 그리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지방 행정기관에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는 국방부와 내무부의 알력에 따른 것이다. 왜냐면 당시 국군과 경찰은 앙금이 깊은 사이였는데,[6] 경찰은 내무부 소속이었으므로 내무부가 국방부에게 곧이곧대로 협조하지 않은 것이다. ??? 따라서 이들 끼니는 제대로 해결될 리 없었으며, 심지어 인민군 치하에 의용군 대접만도 못할 정도였다.[7] 북한에 의해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서태원[8]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거지 중의 상거지란 표현은 다른 국민방위군 경험자 및 목격자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관용구다(...).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 유례없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그럼 알아서 숨어있다 추위 풀리고 봄 되면 오라고 하지 혹한기에 왜 부른거야  당연히 차량 같은건 있지도 않았다. 무조건 도보 행군. 이뭐병. 따라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질병이 창궐하여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고난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4. 예산 유용[편집]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 후방에 50여 개의 육군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 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9] 하지만 교육대의 육군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게다가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육군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군복조차도 지급하지 않은 채 알아서 해 처먹으라는 식으로 던져주었다. 거기에 교육대 장병들은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10] 특히 사령관인 김윤근[11]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군경력자가 아니었다.[12]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즉, 계급만 준장이지 정규군 장교가 가져야 할 군사적 자질은 아예 없었다. 참고로 대한청년단 간부들은 국민방위군의 전신에 해당하는 청년방위대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서도 예산을 횡령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군인으로서의 자질도 없고, 군 행정에 대한 지식이나 책임감, 직업 윤리 의식도 당연히 부족하며 당장 자기 보전과 부의 축적부터가 우선일 수 밖에 없는 민간단체 인력을 군 간부로 충원한 것. 평시라도 이러한 군인 양성 및 예비대 조직의 운영은 퇴역한 예비역 장교들이나 부상 등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전선에 나갈 수 없는 상이 현역 장교들이 간부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창군 2년 만에 벌어진 전쟁이니 만큼 국군 출신 예비역 장교는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 만주군 혹은 중국군(국부군) 출신자로서 고령 등의 이유로 현역에서 물러난 이들은 존재했다. 그런데도 이들을 활용할 생각조차 안 했다. 무엇보다 상이 군인도 존재했는데 그들 역시 활용할 생각을 안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말도 안되는 행정은 육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교육대의 장병들은 병력이 죽음의 행군에 필적하는 고생 끝에 도착하면, 자기들에겐 수용 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들을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 당국의 발표로는 24억 원, 국회 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13]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육군 대령 윤익헌 [14]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윤익헌 대령이 100여 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 원. 그 당시 국가 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 원 가량 될 때였다. 그를 수사한 검찰관이었던 김태청은 훗날 "윤익헌 대령이 돈을 쓰듯이 물을 써봤으면 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부산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실제로 물이 무척 귀했다(…).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 받게 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지급받는 전쟁 포로만도 못한 것이었고, 빠듯한 예산에서 사령관부터 병들까지 다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 상으로 젤리()공장을 짓는다고 써 놓았다. 이런 어이 털리는 비리의 천태만상 속에,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빈 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였다. 젤리(엿)공장의 경우 일단 만들어는 두었으나, 생산 능력에 비해 소비한 것으로 기록된 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 250대를 구입했다더니 20대밖에 안 산 거였고, 생선을 산다더니 장부 상 기록의 1% 정도만 구입한 등 예산 횡령 목록이 쏟아져 나왔다.

국회 조사를 통해 밝혀진 횡령 액수는 국민방위군사령부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전국 각지의 교육대[15]에서 얼마나 빼돌려졌을지는 불명이다. 또한 횡령한 금액 중 상당액이 당시 국회에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민간 업자와 일부 군인들의 연계로 벌어진 거대한 군납비리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군납(軍納: 명사. 인가를 받은 민간 업자가 군에 필요한 물자를 납품함)이라는 말은 군에서 소요제기, 예산심사, 입찰 등등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업자의 납품이 이뤄지고 대금을 받는 과정까지가 군납이다. 이 과정에서 비리가 벌어졌다면 그것을 군납비리라고 하는데, 국민방위군 사건 전반에서 군납비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부분 민간업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들이 부대내의 장부조작과 횡령으로 예산과 물자 다 해쳐먹었으며, 정부에서는 아예 국민방위군이 살아남기 위해 최소 한도로 필요한 쌀과 동계피복을 보급 해줄 개념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군의 물품과 예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사용할 것인가 등은 군 내부의 군수(軍需: 군사물자) 문제이며, 군 예산과 군수물자를 횡령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국민방위군 사건은 민간이 개입한 군납비리가 아닌 내부 군수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책임소재가 파악되어 처벌받은 사람들도 전부 국민방위군 간부들이지, 민간 업자의 존재는 아예 없다.

5. 사망자 수[편집]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1,000~2,000명 사망으로 되어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 명의 대원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되어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0,000여 명으로 되어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조직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5만~ 8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계측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당시 국회조사에 의하면 상당수의 사망자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고 하며 약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아사, 도주등의 이유로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약 27만여 명이 사라졌다고 한다.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 동안 다수의 매장지가 개발되면서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전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 내내 한국군 사망자는 14만 명 정도이다.[16]

6.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편집]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사건 수사가 진행되었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재판으로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자 사회적으로 비판여론이 격앙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경질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으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때 한 답변이 걸작인데, 위에도 언급한 김태청이 전 육군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국민방위군사령관)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하고 묻자 정일권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검열관으로 참석했던 김석원 장군은 이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하였다. 당시 정일권의 계급은 육군 소장, 김석원은 육군 준장이었다. 어찌보면 하극상이라 한때 징계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 정일권은 겨우 만주군 육군대위, 김석원은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사실 국군 이전의 군경력은 김석원이 한참 대선배였다(...). 사실 김석원이 미 군사고문단과 불화를 겪지 않았다면 커리어가 가장 좋던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

신임 이종찬 총장은 고심 끝에 적용법이 바뀔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국방경비법이 아닌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으로 적용법을 바꾸도록 지시하고 재심을 명하여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풍조를 불식시키는 차원에서 본래 비공개인 군사재판을 공개로 돌리고 방청객을 위한 스피커까지 설치하여 재판의 공정성을 알리려 했다. 그리고 당시 사령관 김윤근을 장인인 신성모가 빼돌릴거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이들은 대구 근교 야산에서 공개처형된다.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유당 정권에서조차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승만 다음 세력자였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은 후계자로 부상했다.

 위에는 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는 걸 예전에알았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약 50만명의 장정들이 행진하다가 국가의 바보짓으로 약 4~5만 혹은 9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얼어죽거나 굶어죽거나 병에 걸려 죽은 사건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잘부탁드립니다.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하기기 19-06-13 18:19
   
사람은 보는 시야가 달라지면 변하는법.
많이들 봤져
그중 한명임
     
blazetorz1 19-06-13 18:20
   
어떤 뜻인지요?
          
하기기 19-06-13 18:21
   
독립운동가지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되자마자 욕망에 빠진사람이란뜻
               
blazetorz1 19-06-13 18:24
   
개인적으로는 독립운동가라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당시 동포들이 준 돈을 자신의 개인의 영위를 위해 사용하던 사람이라고 봐서요.

사기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DawnShine 19-06-13 18:48
   
환경이 달라지면 인간 그릇 밑바닥과 본성이 여과없이 나오는거겠지

이승만은 시대 흐름을 따라서 자기과시하고 영달 추구할 수 있는 건수를 물은 것뿐이고

결국 대통령까지 해먹었으니까 성공한 싸이코패쓰네
복불복 19-06-13 18:21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은것만으로도
그냥 최악임
blazetorz1 19-06-13 18:23
   
본문 아래로도 글을 상당히 많이 썼는데 짤려 나오네요.

무튼 예전에 대학교에서 6.25 관련해 발표 수업이 있었는데 저 사건을 저는 저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사해 봤고 학교내에 있는 학생들과 주변 어르신들, 학교 주변내 상인 분들과 제 주변 친구들에게 설문조사 형식으로 물어봤는데 나이가 저보다 많으셨던 분들은 알고 계시는 분들이 더러 계셨지만 제 주변 나이 때에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계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근데 왜이렇게 많은 부분이 짤렸는지 궁금하네요...)
바람아들 19-06-13 18:32
   
이승만은 능력도 없는 사람이 정권욕이 너무 심했었죠
     
DawnShine 19-06-13 18:51
   
닭은 능력이 있어서 대통령 했나요?
이명박은 대통령직 수행능력이 있어서 대통령 했나요?
노통은 대통령 역할을 그렇게 못해서 그렇게 갔습니까?

인간 집단이 그런거죠
적합한 사람을 선출해서 지지할 수 있으면 사회 발전도 삶의 질도 압도적으로 좋았겠죠

자유의 대가입니다.
탄돌이2 19-06-13 19:05
   
이미 임시정부에서 비리죄로 탄핵 당했던 놈이 또 기나와서 대통령질 하다가,  쫓겨난 역적 임!
영어탈피 19-06-13 19:15
   
국가 행정력 장악도 제대로 안되던 시절임
저런 비리가 일어났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거 없던 시절
낙동강까지 밀렸을때 다 국가 망할거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80-90퍼 였을듯
전쟁와중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긴 한데 이건 결국 전쟁을 일으킨 북한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지 이것 때문에 이승만이 욕먹을건 아니라고 봄
     
본자아 19-06-13 19:41
   
녹음기에 본인은 서울에 있다고 녹음 해 놓고
한강다리 끊고 몰래 야밤도주 해서
부산으로 튀어서 그 전쟁 중에 혼자 선거해서
재선하는 새퀴를 변명도 오지네.
본자아 19-06-13 19:42
   
독립운동가 라고 하면 이승만에 대해서 모독하는 겁니다.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을 독립운동가라고 하는건 인격 모독이라구요.
조선면옥 19-06-13 20:11
   
국부로 이승만을 모시는 방법은 단 하나. 

 또다시 독재정권이 나오는 것밖에는 없죠.
마니다 19-06-13 20:23
   
김구 선생 암살 당해서 가장 이득본 사람이고
미국 입장에서 다루기 쉬운 사람이고
독립 운동가인 척 하지만 지지하는 세력이 없으니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사람이고
지도자란 자가 도망가며 한강다리위에 국민을 몰살한 사람이고
자신의 세력 규합을 위해 제주도민을 학살한 사람이고
주어는 없다.

자한당과 나베가 국부로 칭하는 사람이고
부쳐핸섬 19-06-13 20:47
   
이승만의 최악 포인트는 독립이후에 정권 수립후 권력의 정점에 서기 위해 당시 명망있는 운동가들에 대한 뒷공작을 했다는거겠죠. 그러기 위해서 김창룡,김종원,노덕술 같은 인간들을 등용했고 노덕술을 통해서 김원봉에게 큰 모욕을 주기도 했었죠. 이 제1 공화국 이승만이 기용했던 인간들이 학살한 사람이 얼마인지 아시면 이승만빠는 새끼들이 사탄의 후예들이라는걸 아실 수 있을 듯.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친일파 사이코패스 가릴것 없이 기용했던 인간
헬로비녓스 19-06-13 20:54
   
조선을 대표할 지식인이 너무 없어 이승만이 미국의 눈에 든건지 아니면 미국이 이승만을 선택한 건지 궁금하네요.
박사학위도 특급 특혜를 줘가며 쉽게 받을 수 있게 했던데..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 미국의 허수아비로 간택된 게 아닌가 의심됩니다.
미국이 독재국가 독재자들 지원한 사례는 너무 많죠.
2copy 19-06-13 22:45
   
뭔 개소리들이야.
분석질 그만 하고 잇는 사실 그대로 좀 봐~~~~~
사실 다음이 분석질이잖아. 사실도 모르면서 뭔 분석질한다고 난리야.
이승만 없었으면 느덜 존재하지도 않아. 시간 지났다고, 직접 연관없다고 엉뚱한 소리 지껄이는 당신들이 돌아이야~
2copy 19-06-13 22:48
   
역사가 그렇게 논리대로 흐를 것 같은가? 웃기고 자빠졌네.
지나고 나서 분석질 하니 잘난 것 같지?
웃기고 자빠졌네. 느덜 어떻게 사는지 되돌아 보라고. 후회 없니?
2copy 19-06-13 22:55
   
모두가 되돌아보고 분석질할 수 잇지. 앞을 보는 사람 누군가?
앞을 보는 사람은 최소한 당신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야.
지닌 시간 보는 것, 누구나 할 수 잇지만,
최소한 리더라면, 지도자라면 앞을 봐야 하는 거잖아.
실수도 있었을 것이고, 문제도 남겼을 것이고....그렇지만 앞으로 가야지
당신들이라면 국민을 책임지는 자리에서 완벽할 수 있엇을 것인가?
되돌아 보는 지금 말고, 당시 현장에서 살얼음 판에서, 온 국민의 목숨줄을 쥔 입장에서....
     
blazetorz1 19-06-13 23:59
   
역사에 if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승만 아니었으면 니그들 존재하지도 않았어라면서 자기가 if로 이야기 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님도 똑같이 이야기 하고 계시는거에요. 다른 사람 비난할거 없어요.
캠핑음악 19-06-13 22:57
   
아래 김일성이 욕먹으니 바로 이승만을 욕하는 게시글이 올라오네요
참으로 애국자네요
물론 한국의 애국자는 아니겠죠
     
blazetorz1 19-06-14 00:01
   
아래 김일성이 욕먹는데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승만 글이 보이길래 생각 나서 쓴 글입니다.

사상 검증해 드려요? 김일성 개.샹.넘. 니때문에 죽은 우리 국민들이 지하에서 울고있다. 됐나요?
2copy 19-06-13 23:11
   
잘난 체 하는 사람들 글 보면 이제 바로 알지만,
본인들은 잘나지도 않은 잘난 맛에 사는지....
말로는 천재가 일 맡겨보면 엉터리인 사람이 너무 많아요.
말에 현혹되면 현실이 엉망이 되지요.
민민 19-06-14 03:01
   
이승만은 김일성과 더불어 권력욕에 분단을 고착화 시킨 장본인으로 북한의 김일성과 동급이거나 더 최악인 인물입니다.

김일성보다 최악인 이유는 어차피 같은 이유로 살리고 죽이고 한거지만, 북한에선 친일파들이 일소되었다는 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