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용군 제1기인 김경순(80) 씨는 광복 이전에 사할린에 살다가 일본인들에
게 아버지를 잃고 귀국,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워 참전했다고 한다.
소설 같은 기막힌 사연 속에 입대한 케이스도 있는데, 의용군 4기인 문정수(78)
씨가 그 경우다. “집에서 운영하던 양초공장에서 일하다가 인민군에게 끌려갔습
니다. 아버지께서 ‘네가 끌려가면 인민의용군이 될 거다. 그들이 총을 주면 몇
명이라도 쏴 죽이고 너도 죽어라.’라는 비장한 말씀과 함께 저고리에 현금을 얼
마 넣어주시더군요. 나중에 그 돈으로 보초를 매수해서 탈출, 우리 군에 입대했지
요. 나라를 지키는 일에 남녀가 따로 있겠습니까(국방일보, 2007. 6. 25 9면).”
6.25 당시 정보 분야에서 복무한 윤정순
(78) 씨는 참전 동기를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
키기 위해 연약한 여성의 힘이라도 보태야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학도의용
군 제2기 모집 때 자격이 미달인 17세의 나이로 조르고 졸라 입대했습니다.”
여자
의용군 1기 출신으로 정훈장교로 활약한 이점례(78) 씨는 전방 배치를 자원한 용
사였다. “처음 임관해서 경무대로 발령이 났습니다. 청소만 시키더군요. 청소하
려고 입대한 것이 아니니 전방으로 보내 달라고 했지요. 당시 정훈국장님이 ‘네
가 전방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하시며 보내 주시더군요.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사나흘씩 연속으로 야간행군을 하고 적의 기습을 받으면 M1으로
전투를 하기도 했지요. 적지 앞에서 대적선전을 하다가 습격을 받은 적도 한두 번
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여군의 참전이나 공적을 몰라준다고 해서 섭섭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었고 우리의 작은 힘이 조국수호에 보탬이 됐다는 것에서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다만 요즘 젊은이들이 6.25전쟁의 비극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
하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약한 것이 큰 걱정입니다. 우리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후손들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알리고 국가정체성을 확고히 할뿐더러 먼저 간 여군
동지들의 공적을 기리는 선양사업과 증언록을 만들어 후세대에 남기는 것이 우리
의 소원입니다.” 6.25참전 여군들의 친목단결과 권익강화에 앞장서고 있는 김범
녀 회장의 비장한 말이다(국방일보, 2007. 6. 25. 9면)
한국 여성들의 인내와 끈기, 그리고 저력은 6.25전쟁 시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
다. 이들의 구국투쟁의 정신은 고대에 북방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한 여
성들의 활동이나 왜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한 행주치마에 담긴 잠재된 기질이 되
살아 난 것이라고 하겠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35). 우리나라 역사상 빛나는
항쟁의 역사 이면에는 언제나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큰 힘을 발휘했다.
출처 한국보훈논총_제9권 제2호 (통권 17집)
2010년 2호(9권 2호) 6.25 참전 여군의 활약상과
국가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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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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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하지마세요 헌재 재판관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