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사항의 일종인 배우자 관련 질문은 15번에 나오는데 김일성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부인은 조선 사람이고, 빨치산 부대에 재봉사로 일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 당원’이라고 기재했다.
여기서 ‘부인’은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인 김정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을 검토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당시 빨치산 부대에서 바느질을 하고 밥을 하던 인물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고 했다.
이 문건의 내용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보증인’이라고 밝힌 이청산(李靑山)이라는 인물의 존재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어느 조직에 입당했으며, 보증인이 누군지’를 묻는 8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1931년 펑톈성 안투(安圖) 중국공산당 조직에 입당했고, 당 사업을 하러 파견을 신청했으며, 중국공산당 동만주 안투 조직에 가입했고, 보증인은 이청산이다’라고 답했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보증을 선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북한은 초대 주석의 무결성을 입증하기 위해 김일성이 누군가에게 추천받았다거나 상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겨온거 같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입당 후 조선노동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건대로라면 이청산이라는 인물이 김일성을 공산당에 최초로 가입시킨 인물이 된다.
이에 대해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교수)은 “이 자료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북한의 공식 전기에 언급되지 않은 중공당 가입과 소련 측 검토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1929년 중국 지린시에서 국민당군에 체포돼 5개월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났다’는 것도 이 문건을 통해 새롭게 확인된 획기적인 사실이다.
김일성이 1929년 무렵 수감됐었다는 사실은 그간 알려져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체포돼 얼마나 수감됐었는지가 불분명했다.
김일성 공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그가 1929년, 1930년 5월, 1931년 봄 등 수차례 체포됐었다고 밝혀왔다.
김일성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빨치산 활동을 했는지도 이 문건에서 새롭게 드러난다.
‘당 사업과 빨치산 활동 목적으로 만주로 (당신을) 파견한 자가 누군지’를 묻는 10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1932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가 나를 빨치산 부대에 파견했고, 왕칭(汪淸) 항일 빨치산 대대의 정치위원에 이어 제3연대 참모장, 제6사 사장, 제2방면군에서 지휘를 맡았다’고 답한다.
** 참고로: 김일성, 본명: 김성주는 태어난 생년이: 1912년이다. 이렇게 쓴건 그때그때 나이를 알수 있다.
특히 김일성이 왕칭 항일 빨치산 대대에 파견되기 전에 ‘왕덕림(王德林) 부대 밑에서 일했다’고 스스로 밝힌 것도 주목된다.
7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기 전인 1932년 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왕덕림의 구국군에 입대했고 선전가로 일했다’고 밝힌다.
이 문건 발굴자인 째르치즈스키씨는 “구국군은 당시에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과 더 가까웠다.
그래서 김일성은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고 유추 할수있다. 자신이 구국군에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 시기 김일성이 조선인 부대를 이끌며 독립적으로 항일투쟁을 했다고 선전해왔는데 이 조선인 부대가 왕덕림 부대 휘하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주에서 활동한 중국인 군 간부’ 정도로 알려진 왕덕림은 193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왼쪽 두 번째)이 허가이와 함께 소련 측 안드레이 로마넨코, 테렌티 스티코프와 의논하는 모습.
보천보전투 경력은 언급 없어
북한이 선전해온 1937년 보천보전투 경력이 이 이력서에는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의 대표 사례로 홍보해왔는데 김일성은 이 문건 어디에서도 빨치산 활동과 관련된 주요 경력을 묻는 질문에 보천보전투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직접적인 질문은 없고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에 대해 신주백 한림대 연구교수는 “왕칭 대대 6사 사장으로 있었던 김일성과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김일성은 같은 인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이력서의 답 부분을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는지에 대해 이 문건을 검토한 국내 김일성 연구자들 대부분은 “자필일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김일성 연구 권위자인 기광서 조선대 교수는 “정확한 필적은 필적 감정가가 대조해 봐야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김일성 주석 본인의 자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도 “첫눈에 김일성의 필체로 보인다”며 “오른쪽으로 눕혀쓰는 특유의 필체가 젊었을 때도 그대로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소련공산당 간부들이 이 이력서를 검토한 후 작성한 의견서도 눈길을 끈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의견서는 B4용지 1장 정도 분량으로, 작성 일자는 1941년 3월 14일로 기재돼 있다.
문건에는 빌코프, 쥬진, 플르셰브스키, 코간이라는 4명의 분석가 서명이 있다.
이들은 ‘참고서’라는 제목의 의견서 말미에 ‘결론은:
1. 진지첸을 만주 빨치산 부대에 정치 일꾼으로 남도록 한다.
2. 1929년 진지첸의 체포 관련 사유를 알아봐야 한다. 무슨 까닭으로 체포되었는지, 누구의 요구 혹은 누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 문건을 발굴한 째르치즈스키씨는 이들 4명 모두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국제공산당 서기장의 직속 소련 간부들”이라고 했다.
디미트로프 서기장은 사회주의 불가리아의 초대 지도자를 지낸, 당시 국제공산당 서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다.
반면 기광서 조선대 교수는 “이 문건에 디미트로프 서기장이 관여했다는 근거는 현재로썬 미약해 보이고 자료도 부족해서 이에 대해 연구와 시간이 더 필요할것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조사표’의 원본을 촬영한 것.photo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소련 간부들 “체포 사유 알아봐야”
이 문건의 성격에 대해서도 째르치즈스키씨는 “1941년 김일성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 들어올 때 검증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자료”라고 주장한 반면, 기광서 교수는 “국제공산당은 입당에 있어 증명서를 발급한다든지 특별한 절차를 요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국 영토에 들어온 김일성이 어떤 인물인지를 소련 공산당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문건 정도로 평가 할수도 있으므로 아직 단정은 이르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굴된 김일성 이력서의 가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김일성 연구의 논란을 바로잡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만주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신주백 한림대 연구교수는 “공산당 간부의 검토에 거짓 내용을 적었다가 적발될 경우 엄청난 곤경에 처하기 때문에, 그런 성격이 당시 확실했으므로 이 문건에 기술된 김일성 본인의 이력은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며
“대단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기광서 조선대 교수도 “전반적으로 김일성과 관련해 알려진 사실과 크게 배치되거나 기존 연구를 뒤엎을 정도의 사실이 담겨 있지는 않은것 같다”면서도 “그간 학설이 분분했던 점들에 관해 논란을 정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갖는 자료”라고 말했다.
그간 국내외 김일성 연구자들은 이른바 ‘가짜 김일성’ 논쟁을 벌여왔다.
2000년 작고한 이명영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 경력은 허구이며,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한 김일성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따르면 만주의 전설적인 무장투사였던 김일성은 1937년 이미 전사했고, 이후 김일선(金一善)이라는 항일 무장대원도 따로 존재했는데,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경력을 포장하기 위해 이들의 경력을 모두 김일성 1인에게 몰아넣었다는 설명이다.
또, 김광서,김경천등으로 비유도 했는데 (사실 이 두이름은 같은 한사람이다.) 이건 이미 그의 유족들의 증언과 그의 삶을 연구 조사해 북한의 김일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밝혀졌다.
이 이력서의 내용대로라면 김일성이 193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빨치산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김일성 신화의 진실’ 저자인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는 “문건에 기술한 김일성의 활동 경력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3명의 김일성이 존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조사표’를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고서’ 원본.
참고서 (한국어 번역)해서 간단히 총정리하면..
진지첸, 조선인, 조선 출신, 헤이조(平壤)시, 중학교 퇴학, 지린시 중국 중학교에서 공부했음. 그의 아내가 조선인인데 빨치산 부대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1941년에 작성한 이력서에 따라 1929년에 진지첸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포당하였고, 5개월 동안 수감돼 여러 사람의 요구 및 보증에 따라 석방되었다.
펑톈성 안투(安圖)군에서 리칭상(李青山)의 추천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리칭상은 우리에게 모르는 사람이다.)
1932년 봄 이전에 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 잘 알려져 있고 현재 사망한 왕덕림(王德林) 장군의 영도 밑에 있었던 구국군(救國軍) 부대에 입대하였고 거기에서 선전가로 일하였다.
1932년 동만주 특별 당위원회가 만주의 중국 빨치산 부대에 보냈다. 이때부터 제2군 왕칭(汪清)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 제3연대의 참모장 및 정치위원, 다음에 제1통합만주항일군 제2방면군 지휘의 임무를 맡았다.
진지첸이 자신의 이력서에 쓴 바와 같이 그는 아무 정치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당적 징벌도 받지 않았다.
결론:
1. 진지첸을 만주 빨치산 부대에 정치 일꾼으로 남도록 한다.
2. 1929년 진지첸의 체포 관련 사유를 알아봐야 함. 무슨 까닭으로 체포되었는지, 누구의 요구 혹은 누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서명) / 빌코프 /
(서명) / 쥬진 /
(서명) / 플르셰브스키 /
(서명) / 코간 /
1941년 3월 14일
2개의 복사본은 인쇄됨.
‘김일성 이력서’ 발굴 학자가 재구성한 김일성 약력
photo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냥 참고로 그의 약력을 추려보면..
1912년 4월 식민지 조선 평양 출생(본명 김성주)
1919년경 중국 지린성에 이민
1927년경 유웬중학교 입학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체포, 5개월 동안 수감
1931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2년 중국국민구국군 입대
1932년 동북항일연합군 입대. 직위는 왕칭 항일 빨치산 대대 정치위원.
이후 제3연대 참모장, 정치위원, 제6사 사장.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지휘(제6사 사장 때로 추정)
1940년 12월~1941년 1월 소련으로 탈출
1942년 7월 소련 ‘노동자-농민의 붉은군대’에 입대. 계급은 육군 대위.
직위는 극동전선 제88독립보병여단 제1독립대대 대대장
1945년 9월 예멜리얀 푸가쵸프호를 타고 조선 원산에 상륙
1945년 10월 14일 평양 군중집회에서 주민들 앞에 최초로 등장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1949년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년 7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
1972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4년 2월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 임명
1994년 7월 사망
이상.. 그는 이미 죽은지 오래됐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최소한 적어도 100~150년 정도의 시간은 지나야 그때는 김일성 이라는 사람의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 가 가능하다고 학자 이들은 말한다.
출처: 주간조선. 동의,허가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