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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2-03 15:13
어제 쓴 위화도 회군에 관한 글 보충...
 글쓴이 : 싱끌레어
조회 : 813  

어제 밤 늦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가 동맹인 북원의 멸망 때문이었다는 글(북원 멸망->위화도 회군)을 썼는데, 어떤 분께서 위화도에서 회군했기 때문에 구원군을 잃은 북원이 멸망한 것(위화도회군->북원 멸망)이라는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긴가민가해서 찾아봤는데, 위화도 회군 1개월 전에 이미 북원은 명에게 초토화되어 포로만 10만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고 쫒겨났다고 나오더라구요.

물론 북원이 그 때 멸망한 건 아니고 20년 정도 더 존속은 하니 북원 멸망이라는 제 표현이 문자 그대로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명에게 대패한 후의 북원은 나라의 격을 잃은 거지꼴이었으니 위화도 회군 때문에 지원군을 잃은북원이 망했다는 표현은 약간 인과관계상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명이 원과의 국운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섭만 잘하면 명과 싸우지 않고 좋은 결과를 이루지 않았겠냐는 댓글도 있었는데요. 

이미 원은 공민왕 시절에 명에게 대패하고, 북쪽으로 쫓겨났습니다. 기황후가 쫓겨나면서 고려를 저주하기까지 했지요. 그렇게 한 번 망하고 난 후에 다시 세운 게 북원인데, 얘도 위화도 회군 전에 쫄딱 망합니다... 원과의 전쟁에 명이 국운을 걸었다는 건  말이 안되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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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맹덕 14-02-03 15:25
   
제가 알기로는 북원도 멸망했다기보다는 어느때인지는 몰라도 원이라는 국호를 버렸다는거지
정체성측면에선 몽골고원에서 다른 민족에 복속되지 않고 몇백년정도 계속 이어진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싱끌레어 14-02-03 15:36
   
맞습니다. 원이 아예 멸망하지는 않고, 몽골 고원으로 돌아간 뒤 국호를 타타르로 바꾸고 계속 존속은 합니다. 다만 쿠빌라이의 직계가 끊어지고, 대륙의 제국으로서의 원이 사라진 거지요.

참고로 원이 망하고 북원이 되었다는 것도 진짜 망한 거 아닙니다. 남송처럼 그냥 쫓겨간 거에요. 망했다는 건 좀 오버해서 과장되게 표현한 거니 유화해서 이해하시길...

사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몇 안되는 역관 과목 중에 몽골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했던 원이었으니 다시 재기해서 대국이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몽골어를 존속시컸다고 하더군요.
          
모래곰 14-02-03 17:20
   
에센족을 말하시는데 몽골의 한 부류지만 원나라에 적대적이라고 압니다.
실제 원나라는 위화도 회군 전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후의 잔당들은 이들과 크게는 연관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명나라 정통제가 정벌을 갔다가 포로로 잡혔죠.
이때가 조선 세종 말인데 명나라가 망할 뻔 하다가 우겸이라는 신하의 활약으로
북경을 사수해서 막아내죠.
               
싱끌레어 14-02-03 17:28
   
위화도회군 전에 쿠빌라이의 직계는 대가 끊기고, 방계에서 20년간 왕위를 지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엔 아예 몽고로 돌아가서 타타르로 국명도 바꾸고 가늘고길게 존속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혹시 이 내용 중 제가 어느 부분부터 잘못 알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굿잡스 14-02-03 16:29
   
어제 밤 늦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가 동맹인 북원의 멸망 때문이었다는 글(북원 멸망->위화도 회군)을 썼는데>???

지난 글이고 이번 글을 보니 원말기에 대한 상황이나 당시 명나라 그리고 북방세력인 북원이나  고려에 대

한 전체적 이해가 부족한 듯 보이군요.


기본적으로 이성계가 당시 북원 멸망? 어쩌고로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식은 어떤 근거도 아닌 지극히

님의 추론이고 도리어 이성계 일파들이 오랜 시간 정치적 야욕의 계획된 산물이고 위화도 회군은

그 기회를 포착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 추론일 것임.



-- 근자에 고려가 표문을 상주하는데 언사가 많이 부실하여 짐이 이미 담당 관청에 이를 규명하도록 명했

다. 듣자하니 그들은 수도 개경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매 역마다 1, 2만

서 혹은 7, 8만석 혹은 십수만 석에 이르며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을 유인하여 국경을 넘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중략)...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

리고 고단한데, 만약 즉시 사령창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구휼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도망병

을 꾀어 드이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

면 여러 부대는 어떻게 막겠는가. 이제 건축과 보수를 잠시 정지하고 임시 막사를 지어 10년 간 거주한 후

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이 수고로우면 화란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

이게  태조고황제실록에 적히 명 주원장이 우려한 기록입니다.


한마디로 이성계의 불가론 어쩌고 그럴싸한 명분론과는 달리 명나라는 요동일대를 제대로 방비할

군사력도 없던 거의 공백상태였음. (물론 요동 일대는 고려가 심양왕을 겸하면서 고려의 관할권으로

거의 내지나 다름 없던 상황이였고)

실제 고려는 이미 공민왕 시기 이성계가 기병 5천에 보병 1만으로도 성공적인 요동정벌을 감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우왕 시기 요동정벌때는 5만에 이르는 대군이였음.
     
싱끌레어 14-02-03 17:22
   
고려가 심양왕을 겸했다는 표현은 오류가 있습니다. 충선왕 이래로 고려인이 심양왕을 대대로 해왔지만,  고려왕과 겸한 적은 초대 충선왕 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로는 통치자는 고려왕족이었지만, 행정체계나 통치체제는 별개였거든요.

시기적으로 위화도 회군이 있기 1년 전에 북원의 나하추가 명에 투항하면서 전세가 명에 급속도로 기울었는데요. 명 태조도 이 때부터 고압적으로 변합니다. 그러면서 고려에 철령 이북을 내놓으라고 하죠. 위 발언대로 고려를 두려워했다면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게 말이 안되죠. 참고로 위 발언은 조선 건국 후입니다... 조선 건국 후에도 한동안은 고려로 불렀습니다.

1387년 명나라는 20만 대군을 동원해 금주(압록강 바로 위입니다)에 터를 잡고 있던 나하추를 공격해서 항복시킵니다.그리고 몇 개월 안되어 나하추란 한 쪽 팔을 잘린 북원도 괴멸시키고요. 이 때 명은 이미 중원의 원나라 잔당도 다 정리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 병력을 고려에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고, 심지어는 바로 작년에 바로 그곳까지 원정도 왔었던 적이 있었어요.

또한 공민왕시기는 명과 원이 치열하게 쌈박질하던 때여서 적은 병력으로도 요동을 2치례에 걸쳐 정벌했던 겁니다. 위화도회군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5만 대군이요? 명나라는 최대 50만에, 당장 원정 올 수 있는 숫자만 15만이었습니다. 1387년에 20만까지 동원했으니 실상은 15만은 최저수치고 그 이상 동원할 수 있다고 봐야지요.
          
굿잡스 14-02-03 18:27
   
고려가 심양왕을 겸했다는 표현은 오류가 있습니다. 충선왕 이래로 고려인이 심양왕을 대대로 해왔지만,  고려왕과 겸한 적은 초대 충선왕 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로는 통치자는 고려왕족이었지만, 행정체계나 통치체제는 별개였거든요. >

그렇다고 고려인들이 활동제약이나 고려행정권에서 딱히 이질적 어쩌고 볼

당시의 어떤 현실적 부분도 없군요(이런건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만 ㅋ

실제 고려인들과 발해 금 이후 예맥계(부여계)등도 상당수 살고 있었고)



<시기적으로 위화도 회군이 있기 1년 전에 북원의 나하추가 명에 투항하면서 전세가 명에 급속도로 기울었는데요. 명 태조도 이 때부터 고압적으로 변합니다. 그러면서 고려에 철령 이북을 내놓으라고 하죠. 위 발언대로 고려를 두려워했다면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게 말이 안되죠. 참고로 위 발언은 조선 건국 후입니다... 조선 건국 후에도 한동안은 고려로 불렀습니다. > 이런식의

통보로 떠보는 식은 외교에서 제법 합니다. 고수, 고당전쟁에도 고구려에 내내 쳐발리고

요동에 가면 죽니 어쩌고 소리나와서도 허세질은 열심히 했음. 그리고

북원과의 결전을 위해 이런 고압으로 떠보고

고려를 묶어 둘려는 식의 전략 구사도 가능하고.


그리고 최대 50만 어쩌고는 군사 전성기 영락제 시기 였지

주원장 시기는 북원에도 쳐발렸습니다만

이후에도 님말과는 달리 북원이 사라진게 아니라 타타르로 동서로 분할 제국화로

영락제도 골머리 앓다 결국 5차 원정에서 결국 결과를 못내고 막사에서 켁했고.

그리고 수성전에 비해 남경에서 긴 원거리 대군은 보급 문제부터 이후 최소

3배는 되야하죠. 요동의 지리적 낯설음과 제대로된 기반도 없던 당시

명나라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많이 와서도 실제 전쟁에서 과거 전쟁을 보더라도

마냥 숫적 우위로 어쩌고 하기는 승패를 장담하긴 힘들었을 것임.

물론 북방 세력도 원명 교체기 시기라서 더욱 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여차하면 기회를 엿보던 시기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