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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20 22:48
장준하는 ‘밀수왕초’ 였던 박정희를 경멸했다
 글쓴이 : 초록바다
조회 : 2,248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154645



박정희와 장준하를 두고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둘은 인간적, 도덕적 견지에서 차원이 달랐다. 장준하의 박정희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과 박정희의 유난한 콤플렉스를 보면 박정희도 장준하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진짜보수의 눈에 외세의 앞잡이나 하고 기회주의적 변신을 일삼는 자가 예쁘게 보였을 리 없다. 장준하는 자신이 광복군일 때 일본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를, 좌우대립이 격심했던 해방공간에서 자신이 민족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 남로당의 군부 프락치였던 박정희를, 그리고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삼성재벌의 한국비료 밀수사건에서 ‘밀수왕초’였던 박정희를 도덕적으로 경멸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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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20-07-21 00:28
   
장준하의 죽음에는 의문이 깊죠
저 역시도 타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감방친구 20-07-21 00:29
   
또한 우리의 진정한 우파 보수 라인은
이승만ㅡ박정희가 아니라
김구ㅡ장준하 라인이죠
     
개개미S2 20-07-21 00:32
   
근데 자칭 보수라고 주장하는 토왜시키들은.. 김구선생님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이죠...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쓰레기 도 있고...
정확하게 쪽본 원숭이 포지션에서 김구선생님을 평가하고 자빠졌더군요..
초록바다 20-07-21 00:41
   
장준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야권 제일의 박정희 저격수였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과 1967년 5월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두 차례나 구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의 비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이건희와 상속분쟁을 벌이는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는 1993년 6월에 발간한 <묻어둔 이야기>에서 삼성에 일본에서 받은 리베이트를 국내로 들여올 때 물건을 사와 처분하여 더 큰 이익을 남기라고 조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고 밝혔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박정희를 “자기 사상을 갖지 못한 사상적 방랑아”라고 공격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사상논쟁을 다시 한번 불러오려는 의도였다. 구속된 장준하는 옥중에서 6월8일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자행한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에서 장준하는 무난히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초록바다 20-07-21 00:41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의 구심점은 원래 <사상계>였고 장준하였다. 박정희가 근대화 논리를 펴면서 <사상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자유주의적 지식인 세력은 와해되었다. 그냥 와해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서 열심히 사람을 빼갔다. 박정희의 정치적 스승이라 불리던 엄민영은 두 차례나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공화당 정권의 싱크탱크라 불린 정경연구소를 만들었다. 김상협은 군정의 문교장관으로 불려갔고, 유창순도 상공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었다. 한태연은 공화당 의원을 지내고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되기까지 했던 법철학자 황산덕은 인혁당에 대한 사법살인이 집행될 당시의 법무부 장관이었다. 그리고 동경제대 재학 중 학병에 끌려가 장준하처럼 목숨을 걸고 탈출했고 장준하와 함께 밀수 규탄대회의 단골 연사였던 신상초도 박정희 쪽으로 넘어가더니 장준하가 죽은 뒤지만 유정회의원이 됐다. 이들이 떠나간 빈자리에서 장준하는 외로웠을 것이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던 약사봉 그 등산길에 우연히 동행했다는 한 언론인이 있었다. 장준하에게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고 왜 혼자십니까?”라고 했더니 “나는 언제나 혼자인걸요”라고 쓸쓸히 답했다고 한다.
초록바다 20-07-21 00:41
   
그렇게 다 떠난 자리에 제자리를 지킨 장준하와 그의 벗들이 재야가 되었고 진보의 울타리가 됐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배후 함석헌, 우익 학생운동 패의 주먹대장 계훈제, 주한미군 철수 반대 서명을 받고 다니던 문익환, 국군장교로 한국전쟁을 치른 리영희, 남쪽을 선택한 반공포로 김수영 등 이 땅의 진보세력에게 젖을 먹인 이들은 해방 전후 사상의 스펙트럼에서 맨 오른쪽에 서 있던 분들이었다. 양심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은 전혀 다른 기준을 갖지만, 박정희같이 기회주의적 변신을 일삼은 자가 권력을 잡은 사회에서는 양심을 지키는 것이 엄청나게 진보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가짜 민족주의에 맞서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민족주의자의 길>을 발표했다. 분단된 조국에서 참된 민족주의자의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초록바다 20-07-21 00:45
   
장준하는 세상을 뜨기 20여일 전인 7월 말 김대중을 찾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당에 몸담고 있던 장준하는 김대중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이제 장준하가 준연금상태에 있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장준하는 광주로 홍남순 변호사를, 원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다니며 김영삼과 신민당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 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박정희로서는 영 꺼림칙한 일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헌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윤보선이나 김대중 같은 정적이나 정치적 위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와 얼치기 광복군 출신으로 두 차례나 국헌을 짓밟았던 박정희에게, 진짜 광복군 출신이자 진짜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가요 ‘애모’가 나오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가 딱 장준하 앞에 선 박정희의 처지였다.
초록바다 20-07-21 00:45
   
장준하가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두고 숱한 추측이 난무했다. 혹자는 야당의원이었지만 군에서 깊은 존경을 받았던 --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같은 이는 “그런 분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했다 -- 장준하가 군사쿠데타를 도모했다고 믿기도 하고, 혹자는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와의 각별한 인연에 무게를 두기도 하고, 혹자는 장준하가 광범위한 민중봉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고 믿지만, 2기 의문사위원회는 이런 거사설을 증거가 부족하다며 채택하지 않았다. 그의 사인 역시 진상규명 불능으로 나왔다.
4·19 묘지 앞에서 장준하는 “지금의 우리를 대신해서 이 민족이 당했던 그 무서운 시련을 죽음으로 감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 가슴속에 그들이 살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면 어찌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준하처럼 살고 장준하처럼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유족들은 사글세방을 전전한다는데 우리 마음 한구석에라도 장준하가 살 자리를 비워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장준하는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당한 젊은이들에게, 삭막해질 대로 삭막해진 분단한국의 사상계에 <사상계>를 통해 영혼의 자양분을 대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정작 다섯이나 되는 제 새끼들은 대학교육 시키지 못한 못난 아비였다.
구르미그린 20-07-21 00:46
   
개인적으로 이승만, 박정희보다 김구, 장준하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끌립니다만.......
진짜 우파보수, 진짜 좌파진보 라인 따지는 건 한국국민에게 득이 없습니다.

2004년 한국 정치권이 "진짜 좌파, 진보, 우파, 보수" 따지기 시작하고 대중이 그런 담론을 내면화한 이후
정치인들과 관계자들만 득봤지
살기 어렵다는 한국인들의 삶과 한국의 국력은 더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1996년까지 세계 GDP에서 한국 비중이 계속 늘고 빈부격차가 꾸준히 줄고 연간신생아수가 70만이었던 이유는 진짜 보수가 집권했기 때문인가요?

21세기 한국은 86세대 정치인들이 계속 국회의원하고 정책 만들고 있는데도
세계 GDP에서 한국 비중이 더 늘지 않고, 양극화/저출산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이유는 진짜 좌파진보가 권력을 잡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일본이 19세기 이후 한국보다 잘 나갔고, 중국이 21세기 들어 세계 GDP에서 비중이 가장 많이 커진 이유는
진짜 우파보수, 좌파진보가 집권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책 방향"에 있습니다.
구르미그린 20-07-21 00:46
   
토착왜구 타령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그런 사람들 중 국내 일본인 수가 2010년대 초 3만, 2017년 4만, 2019년 말 8만으로 급증한 것을 문제삼는 이는 없습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책과 기업행보는 갈수록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큰 이익을 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정치인, 재래시장 상인들이 스타필드, 코스트코, 뷔페 체인점 입점은 막으면서, 외국인 자영업자의 상권잠식은 전혀 막지 않는 결과, 외국인만 득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한국직원수는 2007년 이후 제자리걸음이고 지금 베트남직원수가 한국직원수보다 훨씬 많을 정도로 한국기업의 해외이전이 갈수록 심해지는 추세에서
정부가 동남아 11개국에 10년짜리 비자 주고 한국기업의 동남아이전을 촉진하는 신남방정책 펴면
한국인 VS 동남아인 중에 누가 더 득볼까요?
     
개구신 20-07-21 04:10
   
한국인과 동남아인 모두죠.

한국 기업의 동남아 이전을 촉진하는게 아니라,
한국 기업의 동남아 진출을 촉진하는겁니다.

애초 한국과 동남아지역의 저임금을 활용하는 사업은 생산품목이 다릅니다.
구르미그린 20-07-21 00:46
   
진짜로 김구의 뜻을 기리고 싶은 한국인이라면
백범일지에 "친일파 다 때려잡자:"는 말은 없고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는 말만 나오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초록바다 20-07-21 00:53
   
(해방 정국) 당시의 이광수는 '문단의 거성'이었지만, 김구는 반탁운동을 계기로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범일지> 윤문을 맡게 된 것은 문단의 거성 이광수한테도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광수는 윤문 과정에서 백범 독립운동의 의의를 교묘히 떨어트리는 한편, 반공주의 색채를 상당히 크게 부각했다. 친일·보수 세력의 논리를 슬며시 주입했던 것이다.
<백범일지> 끝부분에 '나의 소원'이라는 부록이 붙어 있다. 김구의 정치사상을 요약한 부분이다. 이 부분에도 이광수의 손때가 묻었다. 이 부분은 이광수가 윤색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작을 했을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반공 이념이다. 해방 직후에 친일·보수파는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빨갱이요 공산당으로 몰아세웠다. 당시의 반공 이념은 친일 청산·분단 반대를 봉쇄하기 위한 논리였다. '나의 소원'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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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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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이란 부분은 김구의 원래 글에 없었다. 이광수의 윤문 뒤에 생겨난 부분이다. 김구가 최종적으로 승인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광수의 머리에서 나온 부분이었다.
2016년에 김구의 원래 글을 기초로 <정본 백범일지>를 펴낸 김학민·이병갑은 '친필본 주해 <백범일지>를 펴내며'라는 부분에서 "'그 후의 일들' 및 '나의 소원'도 원본에는 없으나, 국사원 간(刊)에서 뽑아 추가하였다"고 말한다. 이광수가 윤문한 국사원 판본에만 있고, 원래 글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방민호 논문은 '나의 소원'이 김구의 승인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백범일지>의 여타 부분과 문체가 다를 뿐 아니라 김구의 사상과도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김구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구의 생각이라고 보기에 어색한 부분들이 많다고 말한다. 아래는 위 논문의 두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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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장은 필자가 보기에 확실히 김구의 원본 <백범일지>의 문체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구는 위의 문장들에 나타나는 마르크스나 헤겔 포이에르바하 같은 유물론 철학자들의 이름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아담 스미스 같은 경제학자, 뉴튼·아인쉬타인 같은 과학자들과도 확실히 거리가 멀다.
어느 면에서 보면 확실히 이 '나의 소원'은 이광수가 김구의 자서전 저자명 아래 그리고 그의 승인 아래 자신의 생각을 삽입해 놓은 흔적이 역력한 텍스트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광수는 김구의 자기 생애 서술의 역작 <백범일지>를 국사원 판으로 윤문하는 가운데 자신의 반공주의적 사상을 알게 모르게 기입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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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윤색한 글을 꼼꼼히 따지지 못한 김구의 책임도 없지 않다. 하지만, 김구의 <백범일지>에 친일·보수파의 논리를 교묘히 삽입한 이광수의 행동이 갖는 죄악성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보수 세력은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막기 위해 김구를 이용하기도 하고 암살하기도 했다. 살아남고자 발악을 했던 해방공간 친일파들의 흔적이 지금 시중에 있는 <백범일지>의 여러 판본들에 묻어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수염차 20-07-21 01:01
   
왜곡을 시도하지 말아요....
지금같은 정보화시대는 순식간에 자료검색이 가능하니까 말이죠....
김구주석을 욕보이나요??
어디서 마사오개색히를 미화하려 시도합니까.....
초록바다 20-07-21 01:01
   
<김구의 독립운동론>
김구라면 기미년 삼일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래 광복 때까지 독립 투쟁에 헌신한 분인데, 어째서 이 분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대일협력자'로 '악명' 높은 이광수에 의해서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미 김원모 선생 같은 역사학자가 이 문제를 논문으로 밝힌 적도 있지만 역사와 문학이 만나고 항일 독립운동가와 대일협력자가 만나는 이 진귀한 풍경을 명쾌하게 논의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 주간 이기웅 선생의 열화당에서 3년여 각고 끝에 2015년에 펴낸 '백범일지' 한글 정본을 가지고 다니며 '상권', '하권', '계속' 편 등으로 이루어진 김구 '직필'의 '백범일지'을 읽다 보니 모르던 사실도 많고 '깨닫는' 일도 많다. 그중에 생각하게 되는 한 가지는 김구 선생이 '한국독립당'을 이끌어 나간 어떤 방침에 관한 것이다.
당시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등이 여러 갈래를 치며 분립해 있었고 이 분산된 역량을 하나로 모을 지혜가 절실한 터였다. 이때 김구, 이시영, 조소앙, 차리석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내건 이념은 '독립'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니 어떤 주의보다 앞서는 가치는 독립일 것이요, 이 독립이 이루어지고서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그 밖의 어떤 주의든 독립된 사회를 어디로 만들어 가자는 논의가 현실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요, 그러므로 현재는 모든 주의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 '독립'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 바로 한국독립당의 취지였던 것이다.
이 문제를 국민대학교의 장석흥 교수는 차리석의 논리를 들어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이를 차리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안창호의 '대공주의' 이념에 연결 지었다. 이 대공주의는 여러 가지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작은 '나', 작은 분파의 이익이나 이념에 치중하지 않고 전체가 함께 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 함께 노력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김구는 이러한 안창호, 그리고 차리석 같은 사람의 논리를 실천에 옮긴 독립운동가였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90930010010646
펴나리 20-07-21 01:20
   
우와 다들 대단하세요 ,
패드로 20-07-21 02:21
   
어렸을때 티비에 나오던 박정희 미화시킨 개같은 미담들이 생각나네.....
Kaesar 20-07-21 11:50
   
그리고 박정희는 장준하를 두려워 했다.
그래서 마침내 장준하를 북한산에서 살해했다.
정면대결을 할 용기도 자신감도 없는 찌질이이기 때문에.
김정은 20-07-21 11:56
   
굿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