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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12 20:48
제사의 기원
 글쓴이 : 사토우하루
조회 : 2,832  

누가 제사에 대해서 소홀해 졌다고 한탄하시기에 글 남깁니다.

 먼저, 조상 제사가 효의 척도인 것처럼 알면 안 된다. 제사가 없는 민족은 미개하거나 우매하거나 불효 막심한 막나니라고 말하면 안되며, 또한 조상 제사만 하면 효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조상제사에다가 자기의 효심을 모두 건 것 같이 행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은 실상은 불효자였던 것을 왕왕 볼 수 있다.

제사의 유래


대개 제사를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전통인 줄 알지만 실상은 외래에서 수입된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왔어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문화 전통이 된다고 하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제사의 오랜 뿌리는 중국의 고대부터이다. 그런 제법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에 대하여 사가(史家)들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고려조 말기 이전까지는 제사흔적을 찾을 수 없다가, 고려 말기에 나타난다고 한다.

조선이 유교의 나라가 된 이유


제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조선의 정치체제를 알아야 합니다.
조선은 한 마디로 말해 ‘유교로 정치한 나라’입니다. 유교 정치의 근간은 가부장제입니다. 유교에서는 사회나 국가를 가정의 확대판으로 보기 때문에 각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국가는 자동적으로 잘 다스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가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효를 준수할 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부장으로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맏형이 그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들은 가문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가문을 통치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역할 수 없습니다. 거역했다가는 가문에서 퇴출당하는데 그것은 사회적 죽음을 말합니다.

고려말의 왕씨 정권을 무력으로 탈취한 이성계가, 도덕성이 문제되어 민심이 이반되자 정권의 유지를 위한 묘안으로 내 놓은 것이 온 국민을 제사할 수 있게 한 것인데, 그 묘안은 이성계의 자문이며 우인이요 국부로 여기는 '무학대사'가 제안했다고 하는데.

무학이 왈 "정권은 칼고 잡을 수 있으나 이반 된 민심은 칼로 잡을 수 없으니 간접적인 방법을 쓰세요' 자고로 이 백성은 조상에 대한 효가 극진하오니 이를 장려하면 옳게 여길 것이외다" 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조상 제사를 더 많이 하도록 권장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제사의 종교적 의미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사는 간접적인 영생법입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죽음 극복법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종교를 만들었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영생과 불멸을 꿈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다만 육체만 죽는 것이고 영체는 그대로 남아 사후에도 다른 형태로 자신의 삶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이런 영생법이 없습니다. 유교의 교리에 따르면 우리는 죽은 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자신이 더 이상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교인들도 인간인 이상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겁니다. 이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유교인들은 자신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생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가통을 이을 아들을 그렇게도 바랐던 것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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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우하루 21-02-12 20:49
   
사토우하루 21-02-12 20:53
   
찾으면서 알게 된것

제사를 지내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겠지요? 과거 양반들이 일 년에 수십 차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사에는 좋은 것을 차려야 하니 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제사를 지내는 장남으로 하여금 유산을 더 많이 상속할 수 있게끔 법을 바꿉니다. 그래서 대략아버지가 가진 전 재산의 2/3 정도는 장남에게 주고 그 나머지를 다른아들들이 나누게 되지요. 딸에게는 한 푼도주지 않는 이런 상속법은 놀랍게도 1990년대 초반까지 지켜졌습니다. 이때가 되어서야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하는 쪽으로 법이 바뀌게 된답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속법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전까지 아버지의 재산은 형제들에게 동등하게 상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딸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딸들은 시집올 때 그 재산을 가져와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가 임종 시 자기가 주고 싶은 자식에게 상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상속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었던 조선의 주부들과는 참 다르죠. 어떻든 상속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유교식의 가부장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굿잡스 21-02-12 21:15
   
??ㅋ

조선시대에도

경국대전의 법치하에 상속은 남녀 동일 균분상속제가 법으로 보장 내려 오고 있었군요.

그러다 17세기 임진왜란등 여러 큰 전란을 거치면서 신분제 질서의 동요와 제사 역시 점차 커지면서 장자 우선주의로 바뀌게 되군요(여기에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 사망률이 높아지자 농경 사회에선 자연스럽게 힘이 필요한 남아선호 사상의 비중과 중요성이 더욱 높아진것도 시대적 한몫에 제사 비용 증가등 여러 현실적 요인들도 작용)


https://jaynoel.tistory.com/395
          
사토우하루 21-02-12 21:40
   
아마도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나 재산의 재분배가 필요하다 생각되어 내부적으로 바뀐듯 하네요.
     
굿잡스 21-02-12 21:23
   
그리고 주변국이나 세계사적으로

조선의 여성 지위는 당대 결코 나쁘지는 않았군요.

옆 서토만 봐도 천여년 가학적 미개 전족을 여성들에게 강요했고 

왜국은 아예 전국시대고 메이지 시대에도 자국 여성들 수십만을 인신매매 팔아 화약이나 조총 전비등을 마련했던 미개 정치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고

이런 뿌리깊은 Jap의 당연한 미개 풍조와 의식의 연장선에서 2차대전 시기 수십만의 조직적 Jap정부의 악랄한 성노예 중범죄를 자행.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968297&page=


Jap정부의 조직적 성노예 착취 강제 동원 근거들

https://m.blog.naver.com/haru8283/221657273014


“Jap군, 위안부 학살하고 우물에 버렸다”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126685
          
사토우하루 21-02-12 21:43
   
당연히 미개한 주변국과 비교를 해선 안되겠죠. 여자에게 작은발이 이쁘다는 이유로 억지로 작은 신발을 신겨 발의 기형을 불러오는 전족 문화라든가 맘에 드는 여자는 밤에 몰래 들어가 강간하는 요바이 문화라든가 비교할거리가 안되죠.
제글에서 조선을 낮추는 듯한 느낌이 드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린힐 21-02-12 22:54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에 보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주로 사랑하고 공경하면 그뿐인 것이다.
가난하면 집안형편에 어울리게 하면 되고, 병이 났다면 몸의 형편을 헤아려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에 좋은것을 차려야 한다는건 뭘 근거로 하신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의 제사 상차림은 박정희때 만들어진 것이지 조선시대때의 상차림이 아닙니다.
가로수길 21-02-12 21:19
   
https://youtu.be/X43-Y4b85T4 제사의 기원에 대해서 어느정도 궁금증이 해결됩니다. 서울대 강성용교수
굿잡스 21-02-12 21:28
   
"제천행사 '무천'은 동예 아닌 고조선 풍속"


기존 국사교과서 내용 뒤집는, '돈황문서' 고구려사료 첫 발견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050614.010141015020001
굿잡스 21-02-12 22:00
   
제사(祭祀)라는 상형문자 자체가 제는 물고기(제수 용품)를 신에게 바치는 그리고 사는 신에게 비는 행위를 표현한 글자이군요.

즉 개인의 제사는 제사의 여러 종류와 의미 중 하나.

우리의 고조선 건국 신화를 보면 알겠지만

천손강림 하늘숭배 광명사상이라 조상이 곧 하늘에 해당하는 조상숭배가 상당히 두드러지게 나오군요.

고조선시대 이런 제천행사는 국가가 주도 온 백성이 화합하고 즐기는 장이자 이런 과정에서 가무도 함께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삼국시대에 오면서 건국 시조등 점차 중요 인물 로 세분화 확대되고 조선시대로 오면서 민간쪽으로도

점차 확대 정례와 격식이 갖추어지게 되군요(단순히 유교적 산물이 아니라 시대별로 여러 복합적 융합이 되면서 이어진 산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

복 교수는 고조선 관련 문헌을 다수 발굴해 이날 발표했다. 『고려사』 중에 ‘단군편’이 별도로 있음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매해 2월·8월에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했다. 

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15927997
행운두리 21-02-12 22:09
   


정말 밀가루로 전 부치고 전부칠 기름이 얼마나 있겠었나요 ㅋㅋ

굿잡스 21-02-12 22:16
   
부여 사람들은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데, 온 나라 백성이 크게 모여서 며칠을 두고 마시고 먹으며 춤추며 노래 부르니, 그것을 곧 영고라 일컫는다.

또한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길목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으며, 늙은이·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노래를 불러 그 소리가 날마다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 백성은 노래 부르기와 춤추기를 좋아하며, 나라 안의 모든 읍(邑)과 촌락에서는 밤이 되면, 많은 남녀가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즐겨 논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동맹’이라 부르고 있다."

ㅡ삼국지


제사의 시작점이던 고조선과 열국시대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이런 우리의 제천 의식은 따분하거나 힘든 제사거나 모임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고 즐기는 축제의 장이였군요.

21세기 오늘날 이런 미풍양속을 계승 발전시켜

핵가족화되는 시대에 고령화에 다른 나라에서도 이미 사회문제화되는 고독사등에 개인주의화의 시대에

이런 명절을 격식보다는 시대와 트렌드에 맞게 각집마다 간소화할건 하면서도

참된 의미를 되새겨

온 가족이 모처럼 만나 가족애와 화합 웃음과 힘이 위로가 되는

 즐거운 축제의 장으로 다시금 승화시켜 나갔으면 하군요.
비좀와라 21-02-12 22:34
   
양반이 아니라 양반가문이 문제에요.

양반은 그냥 관리를 말하는 거고 지금으로 치면 직업 공무원과 직업 군인을 말하는 거에요. 이런 양반이 많아지면 어는 나라가 망조가 드는 거에요. 이런 의미로 현 정부를 욕하는 거고요.

반면에 양반가문은 나라에 큰 공헌을 한 가문에 그 공헌을 기려서 토지를 주고 사당을 지어 줍니다. 그리고 이 양반가문의 장자는 기본적으로 묘와 제사를 담당해야 하고 더불어 참봉이란 세습직을 받죠. 이 들이 가난할  이유가 없겠죠? 토지와 세금면제를 받는데 가난할 이유가 없는 거에요.

단지 후 일에 어떤 이유로 토지를 몰수 당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잘 먹고 잘 산단 말이죠. 이들이 진짜 양반가문인데 기본적으로 이들은 현재의 국가 유공자 같은 사람들로 조선시대에는 지금 보다 훨씬 국가 유공자 관리를 철저 하게 한 거죠.

이들이 기본적으로 토지와 사당을 받을려면 시호를 받아야 해요. 시호를 받으면 그 때 부터 양반가문으로 그 후손들은 잘 살게 되는 거죠. 충무공 이순신 가문이 좋은 예죠.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누가 봐도 양반가문이 아닌데 양반가문이라고 깝치는 일이 일어나는 거에요. 지금의 빨갱이 들이 국가 유공자라고 그 혜택을 달라고 하는 일이 그 당시에 벌어지는 거죠. 전라도에선 동학을 유공자로 지정해서 혜택을 주는 것도 마찮가지죠. 진짜 웃기는 일 벌어지는데 아무도 이런 이야기 안해요. 이게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 하는 거에요.

국가가 인정 해주는 공로를 가진 집안이 제사를 지내면 누가 뭐래요. 국가나 사회에 아무런 공로도 주지 않았으면서 제사를 지내고 그 제사에 대한 적통성을 인정하라고 지랄하는데 이걸 인정하니 근세조선은 망한 거에요.

원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떤 권리에 주장을 말하는 거에요. 여자라도 재산을 상속하면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거에요. 후기에는 여자에게 재산을 주지 않는대신 제사에도 참여하게 하지 않게 하는 것 이고요. 대신 시댁의 제사에는 음식을 준비 하는 등의 참여를 하기에 재산을 주지만 대신 아들을 낳아야 하는 거죠.
     
지누짱 21-02-13 03:52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누가 봐도 양반가문이 아닌데 양반가문이라고 깝치는 일이 일어나는 거에요. 지금의 빨갱이 들이 국가 유공자라고 그 혜택을 달라고 하는 일이 그 당시에 벌어지는 거죠. 전라도에선 동학을 유공자로 지정해서 혜택을 주는 것도 마찮가지죠. 진짜 웃기는 일 벌어지는데 아무도 이런 이야기 안해요. 이게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 하는 거에요.


이 양반이 못하는 말이없네. 제정신이슈???????????
동키11111 21-02-13 00:18
   
어디서 말 같잖은...
제사를 유교적 제사에 한정하고, 양반에 한정해서, 현대 제사문화와 동떨어진 형식을 취하는 것 같은데...
제사는유교가 아니라도 인간사의 어떤부분에서든지 나타납니다.
실제 성경에도 나오고, 학교에서 배웠듯, 가뭄이 들거나 나라에 우환이 들면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사는 유교의 제사에 도교적 성향과 불교 및 토속신앙이 합해진 형식입니다.(어짜피 성리학이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니...)
실제 형식은 유교식(정확히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을 따르지만, 실제적으로는 토속신앙과 결합한 불교의 내용을 많이 받습니다.
현재의 제사가 형식적으로 성씨가 보편화 되기 시작하는 고려말로 추정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도 여러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또한 제사문화도 바뀌어 갑니다. 현재도 천주교나 불교에서 제사를 안치하는 문화가 있듯, 어떤식으로 바뀌어 갈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발제의 내용에 여러가지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특히 현재의 제사의 기원과 유교에서의 영생에 대한 부분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특히 혼백과 혼신을 부정하는 이론은 조금 납득이 어렵네요.
가난한서민 21-02-13 00:52
   
조선족도 개그맨 될수 있습니다. 당신은 재능이 있습니다. 태평양 동네 각 섬들 원주민들도 제사지네요 ㅋㅋ
터키에서부터 1만 2천년전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제사의 기원이 중국? ㅋㅋㅋㅋㅋㅋ
지누짱 21-02-13 03:56
   
제목도 잘못지으셨고 내용도 틀리셨네요
1. 유교식 제사ㅡ고려말기 유학자로 부터 유래. 주자가례로부터 비롯됨.
2. 동북아시아에서 제사란?ㅡ국가적으론 시조신과 개별단위에선 조상신을 주기적으로 추모하는 모든 행사
지누짱 21-02-13 04:03
   
나무위키 내용. 대략적으로 살펴본 것

삼국시대 이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하늘 숭배 사상이 유행하는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띠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우리 고유의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16]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시대: 불교와 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절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17]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어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고려시대: 삼국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대에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고려 말: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초기: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경국대전에서는 사대부만 4대, 6품 이상 관료는 3대, 7품 이하 관료는 2대, 서민은 부모만 제사 지내도록 했다.
16세기 중반: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20세기 이후 개신교의 유입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은 제사를 거부하곤 한다.
mymiky 21-02-13 08:49
   
어제 댓글 달려다가 귀찮아서 안 달았는데

윗분들 말씀처럼

제사라는게 꼭 유교만 있는게 아님

고려나 삼국시대는 불교식 제사가 흔했고

고대로 갈수록

죽은이와 자연물ㅡ 하늘이나 비의 신  같은 농경과 관련된 신들의 제사도 흔했음
사랑투 21-02-13 09:48
   
제사는 유교의 산물이 아닙니다.  유교가 토속신앙을 접목한거죠.

거창하게 우두머리가 하는 제사나. 무당이 굿하는 제사....유교식 형식으로 또는 불교식 형식으로 접목된 제사만 제사가 아니라...
어머니들이 가정에 좋은일 있기를 또는 나쁜일 없기를 물 떠놓고 비는 행위 도 제사의 일종 입니다.

샤머니즘같은 토속신앙 자연숭배에서 부터 시작하는 거죠.
기원을 생각하면  석기시대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성행하지 않았을까요?
턀챔피언 21-02-13 16:56
   
본문은 유교식 제사를 말하는거죠
우리나라는 태초로 부터 하늘에다가 제를 지내왔습니다.
가신신앙, 토속신앙에서도 제를 지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