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산하 콜롬비아 픽쳐스에서 제작한 가라테 키드랑 코브라 카이가 알고보니 오키나와와 한국 근현대사를 재조명해 태권도역사를 반영한 작품이었고 아메리칸 무덕관 당수도부 지원 아래 만들어져서 한국과 태권도 떡밥을 집어넣어서 한국 악역 바이럴로 자기네 홍보하는 시리즈 였음
코브라 카이 도복엔 태권도 패치도 붙어있고 도장내 태권도 품새 하는 장면까지도 묘사됨
아닌데요? 그냥 유파 따라서 형태가 다른거임 가라테 카타 보면 분카이라고 있는데 거기보면 무기술 이라던지 유술 같은걸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를 가르침 원래 가라테라는 무도 자체가 오키나와 사람들이 왜구들 상대하려고 전투용으로 쓰던 은닉 무기술겸 유술 섞인 무도였는데 일본 합병후 오키나와인들이 일본 넘아가서 정착하던 와중 대표적인 후나코시 기친의 쇼토칸이 일본 유도 스포츠화를 진행하던 강도관 유도관에 입성 하면서 철저히 유술위주로 가는 유도랑 반대로 타격기 위주로 가면서 발차기가 나름 화려해진 근접 맨손 격투 타격 위주 가라테가 스포츠화 되면서 나오는데 그게 쇼토칸 가라테임
거기서 최영의가 배운거고 그러다 슨도메때문에 고주류로 전향해 두개 섞은 극진이 탄생한거고
뭔 이야기신지 모르겠는데 가라테는 애초에 일본 무도가 아닌 류쿠 무도에요 1900년대 초엔 일본에선 제대로 없던 무도인데다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류큐인들이 자리잡으면서 일본 무덕회 빌어서 일본 유도도복 띠 체계 받아들이면서 일본화 된거지 일본이랑 상관없던 무도임
가라테란 용어 자체가 1900년대 초에 생긴 신조어고
거기서 유학생들이 배워서 한국에 당수도 권법 공수도 같은 이름으로 들여와 1940년대 부터 한국에 자리잡았는데 1950년대 이승만이 가라데 시범 보고 저게 택견이구만 하면서 착각한거 때문에 군장성 최총희(쇼토칸출신)랑 그 부하 남태희(쇼토칸 계열 한국도장 청도관 출신)이 옥편 찾아가면서 억지로 만든 단어가 태권도임
그들이 쇼토칸 계열 청도관 출신이다보니 청도관 개조 이원국과 거길 중심으로 ITF 태권도를 창시한거고
1970년대 초까진 태권도는 가라테 카타들을 그대로 품새로 썼을 정도로 그 차이가 가라테랑 미미했음
그러다 최홍희 쫓겨나면서 지도관 가라테 출신 이종우한테 태권도가 먹히면서 가라테랑 차별 둬야지 안그러면 태권도 죽는다고 발차기 위주에 포인트 들어가는 룰로 바꿔서 엽기적으로 발만 쓰는 무도로 바뀐게 지금의 태권도임
정권단련 품새동작 가라테랑 다른게 없음
이승만이 본건 쇼토칸 가라테다 극진은 훨신 나중에 생긴 유판데
가라테가 얼굴에 손질 못하고 발로만 얼굴차는건 극진에서 풀컨택트 시도하다가 ㅂㅅ되고 다치는 사람들 나오니 손으로는 몸통만 치라고 룰 정한거고 전통가라테 계열쇼토칸을 비롯한 JKA WKF 계열은 슨도메 룰 쓰면서 직접 타격을 안하거나 손으로 만약에 얼굴을 쳤더라도 다치지 말라고 글러브같이 생긴 보호구 끼고 하고 걍 유파별 룰이 다른거임
상식적으로 류큐에서 1900년대 초에 흘러들어간 류큐 가라테가 먼저겠냐 아님 그 유파들을 경험하고 슨도메 룰 싫다고 풀컨택으로 룰 수정해서 한국인이 새로만든 가라테가 먼저겠냐
그리고 한국 청도관에서 쇼토칸 가라테 배워서 미국에 태권도를 전파한걸로 알려진 이준구 씨의경우 태권도의 기본은 모두 가라테라고 발언한적이 있음
https://www.taekwonmaru.com/2510750 미국에 코리안 가라테라고 가르치던 와중에 한국 정부측에서 태권도라고 이름 바꿔서 가르치라고 요구받은적도 있다고 하고
그가 태권도를 처음 배운 건 1946년 서울 동성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가 입문한 청도관은 이른바 ‘태권도 9개 관(館)’ 중 하나다. 9개 관은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를 결성한 초창기 태권도의 대표적인 9개 파를 일컫는다.
뜻밖에도 그는 검은띠 따는 데 5년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것도 도장에서 못 따고 군에서 땄다고 한다.
“내가 좀 둔해서 (유단자가 되는 데)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꼭 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중엔 점프를 가장 잘했어요.”
청도관에서 배울 때 가장 힘든 기술이 이단옆차기였다고 한다.
“현 국기원장인 엄운규씨가 그걸 제일 잘했어요. 그분한테 많이 배웠죠. 나보다 2년 선배인데, 나중에 청도관 관장까지 지냈어요.”
▶초창기 태권도는 사실 일본의 가라테를 그대로 본뜬 것 아닙니까.
“청도관 초대 관장인 이원국 선생이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 배운 가라테를 귀국해서 보급했으니, 맞는 말이에요. 역사는 거짓말하면 안 되죠.”
“다 가라테를 기본으로 한 것”
▶주먹을 허리춤에 댔다가 지르는 것도 가라테 동작이죠?
“맞아요. 그래서 내가 독특한 동작을 만든 거예요. 준리 태권도에서는 주먹이 가슴에서 나가죠.”
이 총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리 태권도의 정권 지르기를 보여줬다. 국내 태권도 도장에서는 볼 수 없는 자세다.
“우리가 하는 게 좀더 과학적이라 할 수 있죠. 심리학적 요소도 있고. 역학적으로 주먹이 허리에서 나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못써요. 가슴에서 나가야 힘도 안 들고 속도도 빠르죠.”
언뜻 권투 주먹과 비슷하다. 그도 인정했다. 그렇다고 권투를 베낀 건 아니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이기에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신호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깨를 구부리고 주먹을 뻗는 권투보다 더 위력적이라고 주장했다.
광복 직후 서울에는 태권도장이라는 게 없었다. 청도관을 비롯한 무술도장의 대부분은 가라테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이들은 가라테의 한자어 표기인 당수(唐手), 혹은 공수(空手)도장으로 불렸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육군 소장이던 최홍희씨가 제정한 것이다. 태권도는 일견 한국의 전통무술인 택견이나 수박도를 계승한 것 같지만, 모태는 어디까지나 가라테였다고 한다. 1959년 최홍희 장군은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중간에 파벌 싸움으로 대한태수도협회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던 대한태권도협회는 1965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권도 창립에는 최홍희 장군의 공이 크지요?
“그 양반이 만든 거요. 이승만 대통령한테 태권도 명칭에 대해 사인까지 받았어요. 그래서 태권도가 탄생했지.”
▶그 공은 인정해야겠지요.
“그럼. 그건 맞지. 태권도에 아주 미친 사람이었어요. 나하고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양반이 이북에 간 날부터 인연을 끊었지요. 나는 반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홍희씨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초기 태권도에 대해 궁금한 것을 더 물어봤다. 태권도가 현재 남과 북으로 양분돼 있는 만큼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 총재의 증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9개 관에서 가르치는 기술은 다 비슷했습니까.
“그럼요. 다 가라테를 기본으로 한 것인데.”
▶관마다 특징이 있지 않았나요.
“굳이 말하자면, 청도관이 옆차기로 유명했고, 무덕관은 앞차기를 잘했다는 정도죠.”
▶가라테 기술과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까.
“가라테를 가르친 거니까. 당수니 공수니 다 같은 거예요.”
▶발차기에서 차이가 없었나요.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이 가라테보다 더 발전했지. 일본은 전통을 따지기 때문에 지금도 옛날 것 거의 그대로 가르쳐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의식이 없어 뒤돌려차기니 뭐니 해서 제멋대로 만들어냈어요. 그게 뒷날 다 복이 된 거요.”
▶당시엔 뒤돌려차기가 없었습니까.
“그랬지. 나도 그때 뒤돌려차기는 못 배웠어요. 기본 동작만 배웠지. 지금은 뛰어앞차기 등 기술이 얼마나 화려해요. 가라테보다 훨씬 앞서 있지. 상대가 안 되죠. 쿵푸도 그렇고. 그러니 올림픽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대중이 좋아하니까.”
▶태권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시초는 가라테이지만, 이후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것’이라고.
“다른 도장은 몰라도 청도관만큼은 분명해요. 품새도 가라테의 평안이니 철기니 하는 것을 그대로 배웠으니. 태극형도 마찬가지고요. 거짓말하면 안 되지.”
“해방 직후죠. 사춘기의 꿈이라고 할까. 17세 무렵 막연하게 무림의 고수를 꿈꾸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소공동에 가면 18계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죠. 그곳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유도 도장이었는데, 그때는 조선연무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도부와 권법부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권법부에서 가라테를 배운 거죠. 권법이 바로 일본 가라테거든요. 일본말로 부르면 국민감정도 있고 하니까 권법이라고 부른 겁니다.”
...
―당시 가라테는 당수(唐手)로 불렸죠.
“당수(唐手)로 쓰는 사람도 있고 공수(空手)라고 쓰는 사람도 있었죠. 당수나 공수를 일본말로 옮기면 가라테가 되거든. 모두 같은 내용인데 도장별로 특색 있게 보이기 위해 권법이다 당수도다 공수도다 그렇게 불렀어요.”
―태권도 이전에는 태수도(跆手道)로 불렸습니다. 태수도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까.
...
“내가 한남동 외무부장관 공관 위에 살 때 최홍희 집은 그 건너 이슬람교회 너머에 있었어요. 그래서 둘이 자주 만났죠. 5·16이 나고 얼마 안됐는데, 최홍희가 태권으로 쓰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태권이 뭐냐? 가라테의 변형인데’라고 대꾸했어요. 그러다가 가라테(당수·공수)하고 태권도를 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죠. 우리끼리 펴면 수(手)고 쥐면 권(拳)이니까, 쥔 거나 편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했어요. 그때 최홍희가 6군단장이었는데 권총을 차고 막 출근하려다 말고 나하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좀 무리가 따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사람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내세울 게 없었잖아요.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도 서고 잘 먹혀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겁니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죠. 일본 사람들이 중국 무술을 많이 개량해서 과학적으로 만들었어요. 한가지 문제가 뭐냐 하면 일본 사람들은 유연성보다 근육성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의 움직임이 굳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이걸 가지고 스포츠로 경기화하기 위해서 겨루기를 시킨 겁니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겨루기를 안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놔두었고, 중국에서는 손 맞춰서 하는 유연한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태권도는 중간 입장에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면 우지좌지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겨루기를 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역으로 우리 걸 배우게 된 겁니다. 자기들 무술은 보급이 잘 안되는 데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와의 싸움보다 치고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나요.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택견도 현대에 와서 많이 변질됐어요.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택견을 배우니까 발차기가 태권도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입니까.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요.
“그게 솔직한 대답입니다.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해방후 wtf 태권도 창시한 사람도 태권이라는 이름을 몰라서 그 명칭 만든 최홍희 한테 태권이 뭐냐고 되물음
그리고 국기원에서 발간한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 전기인데 서문에 이종우가 발언한게 딱 적혀있음
참고로 이종우는 한국형 품새 제정이나 겨루기 룰 제정한분인데
1990년대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연도와 계절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말은 그와의 만남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 나눈 대화의 의미가 강렬한 나머지 그 외의 것을 기억하는 것은 무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강렬한 빛이 내게로 비칠 때 주위의 모든 것을 삼 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까. 아무튼 당시 세계태 권도연맹 부총재였던 그를 필자는 국기원에서 다른 일을 취재하던 중 만나게 됐다. 어릴 적 태권도를 수련한 필자는 국기원은 늘 성소 같은 장소였고 다소 말수가 적었던 그는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인식
하고 있었다.
현재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개혁'이란 화두는 모두의 관심사였다. 평소 태권도 개혁을 주제로 많은 기사를 썼던 필자는 태권도 경기 규칙 제정을 주도했던 그에게 불쑥 퉁명스런 질문 하나를 던져봤다.
“태권도는 밟을 태와 주먹 권자를 쓰는데 왜 주먹 점수에 야박합니 까?" 그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주먹 점수를 다 주면 태권도가 망합니다."
이 무슨 소린가.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복싱이 손기술을 쓴다면 태권도는 발기술 위주로 발전된 스포츠입 니다. 주먹 점수를 제대로 다 주면 태권도는 손발을 다 사용하는 어정 쩡한 스포츠가 돼 태권도만의 매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도 주먹이 발보다 빠른데 주먹 점수를 안 주면 수련을 등한시
태권도 수련생의 무력(武力)이 약해질 것입니다."
필자의 반대 논리에 그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주먹 점수를 다 주면 한국 태권도가 설 땅이 없어져요.”
그의 대답은 서양인들의 팔다리가 모두 길어 그렇지 않아도 한국 선 수들이 불리한데, 주먹 점수까지 다 주면 한국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얘기였다. 스포츠 태권도를 설계한 그의 말에서 '애국심'이 숨겨져 있어 놀라웠다.
그날 그와 나눈 대화 내용에는 몸통 보호대가 더욱 개량돼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선수들이 돌려차기를 할 때 허리부분이 무 방비로 노출돼 허리 부상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현대 태권도의 설계자'답게 그는 국기원을 찾아오는 이들과 담소하 기를 즐겨했고, 대부분이 태권도 기술과 경기 규칙 개혁이 화두였다. 그 러면서도 자신이 확신을 갖고 추진한 일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단호함을 보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일생을 태권도와 더불어 살았다. 그는 태권도를 개인의 수련 도 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태권도에서 스포츠의 속성을 발견했다. 그 때 가 1950년대 중반쯤이었으니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할 따름이다. 태권 도가 겨루기로 특화된 스포츠로서 전국체육대회 종목이 되면서 태권도 에 대한 주위의 불편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전국적인 보급과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가 바로 그였다.
현대 태권도의 기원이 일본과 중국 등에서 무예를 배우고 온 지식인이 세계 2차 대전에서의 일본패망과 우리민족의 해방을 전후로(1944~ 1946) 창립한 5개의 기간 도장들이라는 주장이다.
■1944년 이원국의 청도관, 1945년 황기에 의한 무덕관, 1946년 전상섭에 의한 조선 연무관(한국전쟁 때 지도관으로개명), 1946년 윤병인에 의한 YMCA 권법부(한국전쟁 직후 창무관으로 개명), 1946년 노병직에 의해 창설된 송무관이 이른바 태권도 여명기의 5개 도장이고 태권도 1세대 원로들이다.
이들 기간 도장은 한국 무도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최초로 군사 조직도 교육기관도 아닌 일개의 민간인에 의해 설립된 사설 도장에서 체계적이고 공식적인 무도 수련이 이루어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태권도'라는 명칭이 생겨나고 기술체계가 완비되기 휠씬 이전부터 이들 기간도장에서는 자체 심사과정을 거쳐 '급증'과 '단증'을 발급하는 조직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셋째, 이들 기간도장의 창설자들은 초기에 자신의 무도를 '당수도' '공수도' '권법' '
화수도' 등의 이름으로 지도해 왔으나 .
이후에 태권도라는 통합명칭 제정과 협회 설립 및 기술체계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이한 점은 이들 사범 중 황기는 상고시대 때부터 우리민족 무예로써 수박도(手搏道)가 있었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를 역수입하였다고 주장하며(수박도대감4, 1970,p. 47)[20] 자신의 무도를 정통성과 정당성이 있는 수박도로 개칭하여 태권도와 다른 무도 형태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 해 보면, 최초 기간도장들은 근대 한국 태권도사의 시작이고 핵심인 것은 분명하나, 유일하고 결정적인 태권도의 기원설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