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총칼을 들고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절터로 몰려왔다.
이곳에는 특이한 형태의 석탑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14m의 큰키에 탑신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비록 세월의 풍상에 깎였지만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할만했다.
일본인들은 이 석탑을 마구 해체해 포장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근주민들
과 군수 일행이 가로막았지만 총검으로 위협해 달구지 수십대에 싣고 개성역으로 가져와
일본으로 실어가고야 말았다.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는 한국 문화재 약탈자 가운데 최고 악질로 꼽히는 인물
이다. 그는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이 경천사십층석탑
을 보고 그만 흠뻑 빠지고 말았다. 그는 자나깨나 이탑을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을 궁리를
했고, 결국 약탈과 야반도주라는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 백주대낮의 날강도짓은 한양에까지 소문이 났고, 한국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젊은
영국인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35세의 언론인 어네스트 베셀이다.
베셀은 영국 특파원으로 조선에 왔다가 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돕기위해 <대한매일신보>
라는 신문을 발간하고 있었고, 이 소식에 분개한 베셀은 파렴치한 일본인의 문화재 약탈
사실을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신문 지면에 실었다.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때 공주를 위해 옥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년이 된 조선의
보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탑을 무너트려 일본으로 실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베셀은 연일 이 사건을 보도했고 일본 통감부는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라는 반박 기사
를 올리며 일대 논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역시 이 소식에 크게
분노한 사람중에 하나이다. 그는 고종황제의 밀사로도 활약했으며, 뉴욕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강연을 수차례 한 바 있다. 헐버트는 이 사실을 미국 뉴욕 포스트에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입김까지 작용하자 더이상 발뺌만 할수 없었다. 후일 조선 초대 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다나카에게 훔쳐간 석탑을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데라우치는 집권기간 내 조선의 유물 반출을 엄금했는데, 이는 그가 양심적인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조선이 억년만년 일본땅이 될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도 조선을 떠날때 석굴암
본존불을 반출할 계획을 세웠지만 제반 상황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나카는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무려 11년동안이나 석탑을 반환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반파되어 심하게 망가진 석탑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1348년 고려 시절 세워져 '병을 치유해주는 약황탑'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경천사십층석탑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0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마치고 2005년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과 헐버트의 유해는 유언대로 고국에 가지않고, 합정동 서울
외국인 묘지 공원에 묻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004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