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언하자면,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자음만 있고 모음은 알아서 갖다 붙여 읽어야 해요.
요즘은 모음을 만들었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예전엔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히 고유명사의 경우에는 사람마다 읽는 데 혼란이 생기기도 했어요.
야훼/여호와가 대표적으로 그런 케이스인데,
여호와의 경우에는 Iehova/Jehova를 음역한 경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정확합니다. '테트라 그라마톤'은 그냥 '네 개의 글자'란 뜻의 그리스어예요.
신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것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금기사항이었습니다.
뭐 이건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얘기죠?
그래서 갖가지 '돌려 말하기' 방법이 개발되었는데, 이건 그 중 하나였죠.
귀신들린자들은 귀신을 믿어요. 그들은 기괴스러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비정상적으로 힘이 쎈 사람들도 있어서 묶어 놔야할 지경입니다. 무당 중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무당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악령을 그들이 왜 믿으며 괴로워 하는지, 귀신들린 자와 그 현상을 자세히 아는 자 외에는 몰라요.
예수를 예수 때문에 믿는게 아니예요. 예수는 자신이 사라지지만 이후에 성령(신의 영)이 올 것이라고 말했어요. 성령이 임하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요. 바람이 불면 우리 눈에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피부의 감각은 완전히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신의 영)이 임하면 영적감각이 영을 인식해요. 바람이 상쾌한 느낌을 주듯이 성령은 두렵고 거룩한 감동을 줍니다. 성령을 받은 자 외에는 성령을 알지 못해요.
마지막날에 성령이 인간의 육체 안에 임할 것이 구약 부터 신약에 이르까지 예언되고 기록되어 있어요. 성령을 받은 자는 성경의 신빙성에 상당히 공감하게 되죠. 성경에 사실성을 부분적으로 알았으니, 인내와 배움으로 지식을 이해하고 더욱 믿음이 증가하게 되죠.
창조의 기록을 지식적으로 인정하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창세기는 신자에겐 신빙성이 있는 책이예요. 예로 대표적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는 구약의 신의 잔인성을 홍보하면서, '어떻게 신이 아브람에게 외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했는지'라며 신을 모욕했지만, 신자들은 '왜 신이 아브람에게 그러한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를 알아요. 이삭은 예수의 예표로서, 미래에 신이 자신의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속죄의 재물로 죽이게 될것을 보여준 것이예요. 아브람이 이삭을 재물로 바친 것은, 아브람은 이삭이 죽고 재단에서 불에 타 재가 되어도, 다시 그 가운데서 부활해 살아날 것을 믿었어요. 신이 그 광경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었는지 헤아리기 힘들겠죠. 긴 세월동안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전까지 누가 '신이 왜 아브람에게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했는지'를 누가 이해했겠습니까?
'신이 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했는지'는 최후에 지구가 사라지는 날 비로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죠.신자들에게 창세기는 요한계시록에 이르까지의 연속성 가운데 성경의 내용과 구조로 이해할때 신빙성을 갖고 있습니다. 창조의 기록을 지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훗날 알게 될것을 기대하며 믿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모든 '엄마의 말'을 쪼개고 이해해서 '엄마'를 믿는게 아니예요. '엄마'를 믿으니 '엄마의 말'을 믿을 때가 있어요. 울 엄마를 모르는 알래스카 김상덕씨는 울 엄마 말을 못믿겠죠. 5섯짤 예은이도 엄마말은 그냥 믿어요.
생각이 무슨 필요 있을까요? 어차피 결국에는 의심없이(생각없이) 그냥 믿어야 하거든요.
신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은 악마의 선물이라는데...
그런데 어차피 어떤 종교든 그 최고 신이 우주를 만들거나 하죠.
아브라함이 믿던 신은 결국 동이족의 여(호)와 라는 설이 그나마 가장 그럴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