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조선인의 상식으로는 일반 國은 황제국의 제후국일 뿐이고, 王은 황제 밑의 존재였기 때문에 청나라, 기타 서양열강들과 대등한 국가란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제국과 황제, 그리고 연호를 쓰게 된 거죠. 지극히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저런 명칭을 쓴 것이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 제국을 의식해서 국호를 저리 정한 게 아니에요.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 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실제로 일본도 조선을 청나라의 제후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러 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히는 조문들을 억지로 삽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에서도 무슨 일만 터지면 청나라에 군사를 청하거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고, 청나라는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흥선대원군을 압송해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볼 때 조선 말기는 독립국의 위치와 제후국의 처지가 혼재된 상황이었고, 일본으로서는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기하도록 부추긴 거죠.
구한말,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을 다시 버젓한 국가로 세우기 위해 고종이 선택한 카드가 제국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주권국이니 내정에 간섭하지 마!' 라고 하면서 중립국을 선포하였죠.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병합당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