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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1-07 00:24
서양선교사의 진짜 모습을 밝혀드립니다.
 글쓴이 : 헬로가생
조회 : 3,526  

당대 천재라 불리었던 윤치호를 아시나요?

좌옹 윤치호(1865~1945)는 당시 대부분의 조선 식자들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에 비해서도 분명 한발쯤 앞서가던 신세계의 개척자였습니다. 미국 본토인들보다도 더 고급적인 작문실력을 보였으며 1887년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으며 1888년엔 미국 벤더빌트대학에서 신학과 영어를 수학했습니다. 그는 일기조차 영어로 쓸만큼 서방문물과 기독교 옹호자였습니다.

그런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눈으로 직접 본 선교사들의 작태를 한번 다시 보기로 하죠.


... 1899년에 언더우드 박사와 그 부인이 내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원산으로 잠깐 들렀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그 부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일주일 후에 원산을 떠날 때 우리집을 지나가면서도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예의를 정확하게 지키는 데다 우리에게도 자신들에게 예의 지키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그들이기에, 그러한 행실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우리에게 인류 평등의 원칙이 명백하게 적혀있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처럼 그 원칙을 자신들이 위반하는 것이다. .... 그들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나는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과 되도록이면 사교하지 않으려고 한다.
(1903년 1월 15일자)


꼭 남에겐 예의를 강조하며 자신은 전혀 예의에서 먼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오늘 아침에 레르(Loehr) 목사가 중국 학생 신도들에게 교회에서 예수가 악마를 이겨서 천당을 쟁취하셨듯이 일본이 중국을 이겨 대만을 얻었다고 설교했다. ... 중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자리에서 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이 왜 예수에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의 주택의 접견실에서 원주민들을 절대 대접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원주민들도 마음을 열 리가 없다.
(1897년 6월 31일자)


기독교 선교의 모습이 어쩜 예나 지금이나 이리 같을까요? 그저 한국이 이제 아프간으로 변한 것 밖에는...


... 나에게 짐을 미리 배에다 실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휴제스(Hughes) 부인(Hughes 선교사의 부인)이 "끝내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강요를 해서 대단히 미안한데, 우리 선교사 같으면 당신네들을 보통 작은 아이로 보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습관이 나에게도 있어서 (나도 모르게) 강요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네 선교사들을 아시잖아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 내 마음을 질러버렸다. 그녀는, 우리 원주민들이 우리 일을 스스로 처리 못할 만큼 다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원주민들을 그렇게 보는 그들이, 민감한 일본인들의 분노를 그토록 많이 유발하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97년 4월 23일자)


기독교인의 눈으로 집적 본 사람의 글입니다.
선교사 "님"들이란 환상에서 깨어나시길 빕니다.


아래는 월간 "복음과 상황" 중...

알 렌은 주한 미공사관과 선교사로 활약하면서 조선의 각종 이권을 챙겼다. 시들해진 평양대부흥운동을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간 것도 갬블(F. K. Gamble) 리드(C. F. Reid) 스톡스(M. B. Stokes) 등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부흥을 염원하는 기도 모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기도가 확산되어 장감연합공회에서 백만인구령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백만인구령운동 실행을 위한 위원회에 게일(James S. Gale)이 의장을 맡고, 밀러(Hugh Miller) 언더우드(H. G. Underwood) 벙커(D. A. Bunker)가 서기를 맡는 등 한국 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렇듯 대부흥운동의 핵심에는 선교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우리에게 회개를 통한 부흥 경험을 안겨주었다. 아울러 감리교와 장로교 등 교파가 자유롭게 연대하고 협력하는 일치운동의 역사도 남겼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다른 행보를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대부흥운동에서 민족 현실에 참여하려는 흐름을 배제했기 때문에, 친일 선교사가 일으킨 전략적 운동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복음과상황> 161호 '나라 망하는데, 교회 부흥이라…' 참조). 하디가 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을 회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선교사들의 본분을 망각한 행보가 한국 교회사의 한 장을 어둡게 수놓고 있다. 특히 초기 선교사들은 사업가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알렌(Horace N. Allen)과 언더우드가 두각을 나타냈다.
알렌은 미국과의 관계 발전을 열망하는 고종의 각별한 대우를 받아 금광채굴, 철도와 전기 부설 등 각종 이권을 따냈다. 특히 한국 최대 금광으로 '노다지(No-touch)’라는 유행어를 남긴 운산금광 채광권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알렌은 이 금광을 미국인에게 넘기면서 거액의 구전을 챙겼다. 운산금광에서 총 900만t의 금광석을 생산, 5천6백만 달러의 산출고를 올렸다. 1천3백만 원을 일제에 빚져 나라를 빼앗겼는데, 한 금광에서 나라 빚의 몇 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그 돈이 고스란히 선교사를 통해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는 점은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밖에도 알렌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J. Morse)에게 넘겨 수익을 챙겼다. 이후 모스는 170만여 원을 받고 일본에 넘겼고, 일본은 침략과 수탈의 발판으로 삼았다.
 
<한국인 멸시하며 오만한 태도 보여>

백 만장자 선교사라고 불리던 언더우드는 선교 활동을 위한 자금 확보와 한국인들에게 서양 문명의 이기를 전한다는 명분 하에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공사관보다 호화스런 집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을 만큼 사치를 누린 빈톤(C. C. Vinton)은 재봉틀 1백여 대를 들여다 팔았고, 심지어 서울의 한 선교사는 여관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교회 보수 신앙의 대부로 칭송받는 마펫(Samual A. Moffett:한국명 마포삼열)과 리 선교사조차도 압록강 연변의 나무 3천여 그루를 세금 지불도 하지 않고 벌채하려는 이권에 관계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7년 주한 영국공사였던 힐리어(W. C. Hillier)는 "선교사들이 아니었으면 동양에 대한 상업 진출의 정보를 서구 국가들이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죽했으면 타운센트(L. T. Townsend) 선교사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선교 단체에 기부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한국 기독교의 역사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개화기의 한미관계-알렌 박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조각, <대한예수교장로회 백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일제 시대에도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각종 규제를 완화해주고, 법인을 허가하여 재산 유지를 편리하게 하도록 배려한 일제의 회유 정책에 말려들어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제 만행을 촬영하여 외국에 알린 이유로 추방당한 스코필드(Frank W. Scofield)조차 1922년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송별연에서 당시 <동아일보> 간부 김서수와 송진우에게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일선(日鮮) 공존의 온건한 사상을 지니는 것이 이롭다"라고 충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과 일제 당국으로부터 비호를 받으며 부와 권력을 누린 선교사들은 하디가 회개한 대로 한국인을 멸시하는 편견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허시모(C. A. Haysmer)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허시모 선교사는 자신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다 들킨 김명섭 군의 얼굴에 염산으로 '도적'이라고 새겼다.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실리면서 한국인의 분노를 샀다. 결국 허시모는 경성 고등법원에서 징역 3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뒤 조선인에게 공개 사과문을 낸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밖에도 선교사들은 여러 구타 사건과 성추행에 연루되었다.
 
<미국 장로교, 유학 금지 주장도>

선 교사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개인의 독선과 죄를 넘어선다. 그들은 교인과 목회자의 지적 수준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특히 장로교가 심각했다.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는 1896년 '현지 교육자 영성책'이라는 논문에서 '목회자의 지적 수준은 일반 평신도보다 약간 높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 외국에 유학 보내는 일도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대신 그는 '신령한 훈련을 많이 쌓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선교사들이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를 키우지 않고 그들의 지휘 아래 두다 보니, 장로교는 선교사들이 소개해주는 것만 받는 꼴이 되었고, 신학적으로도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라고 평가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그릇된 정책은 당시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1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가 크게 반성하고 돌이켜야 할 과제를 떠넘겼다. 이 위원장은 "장로교가 수적으로는 번창하면서도 지도자가 부족한 것이 이후의 문제였고 오늘날에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라며 "장로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것과 통한다"라고 주장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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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boy 15-01-07 00:32
   
하도 예전에 읽었던 내용인지라 가물가물......

검색을 하려니 귀찮기도 해서 저는 포기 해버렸습니다.

새삼 고맙습니다.
     
헬로가생 15-01-07 00:44
   
반기련 영월소나무님 글이죠.
          
oldboy 15-01-07 00:47
   
제가 본 글은 이글과 일치하지는 않아요.

더러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저는 반기련 게시판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선교사 이야기는 온라인이 아닌 잡지에서 읽은것 같고요.

성령체험이니 은사주의니 하는 선교사들의 전도 행태가

미국 선교사 파송단체의 지시에 의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글은

온라인에서 읽은것 같습니다.
띠로리 15-01-07 00:55
   
6월 31일이라니...
     
헬로가생 15-01-07 01:01
   
ㅋㅋㅋ
알아보니 인용한 원문이 실려 있는 박노자의 "우리 역사 최전선"에 실린 오타네요.
빨간내복 15-01-07 01:14
   
개독 처단 해야겟네여.. 절 국회로 보내주세여~~ 개독 타도 법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백전백패 15-01-07 02:30
   
무리입니다..이미 저들은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잠식했고
단결력도 저들에비해 현저히 떨어지죠..
여기서 사실상 어떠한  방법을 논의한다고해도  실제 밖에서 저들을 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게 현실입니다..
청백리정신 15-01-07 02:51
   
기 .. 길군요 내일 시간날때 꼭 읽어봐야 겠네요..
청백리정신 15-01-07 06:52
   
와 눈아퍼도 다 읽게 되네요..이런 양의탈을쓴 늑대가 있는가 하면 은안님이 언급하신 선교사분도 있는거겠죠? 제가 아는한분 소개드리자면 초대 매리놀간호전문학원장 이신 노파트리샤 수녀님 입니다...
루리호 15-01-07 09:02
   
천안 독립기념관 한번가보세요
거기있는 자료의 절반이 넘는게 바로 선교사들이 모아둔자료입니다. (일본군도 외국인자료는 못건드리다보니 많이 남았죠)

한번 보시면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독립운동가들지원은 또 어떡게 했는지 보입니다.

물론 일부중엔 나쁜놈도 가짜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일제시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우호적이였는지 우리를도와 일제와 어떡게 싸웠는지 자료들을 보다보면 보입니다.

그냥 독립기념관 한번가셔서 자료들한번 직접 눈으로보고 느끼세요

일반화의 오류는 정말 위험합니다.
     
oldboy 15-01-07 11:16
   
당췌.... 어떤점이 일반화의 오류라는것인지.....

과거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그 첨병 역활을 한것이 선교사들입니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말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신실한 선교사도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을 한번 들여다 볼 필요도 있는것 아닙니까?
하늘꽃초롱 15-01-07 10:38
   
개독 집단에 특공대를 투입해야 할 시점이네요.
김민지 15-01-07 11:12
   
근데 윤치호 일기는 가생이에서 인용하면 안되는것 아닌가요? ㅎㅎ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 18일자)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정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893년 11월 1일자)


윤치호는 친일파 넘버 3 안에 드는 사람인데 ㅎㅎㅎ
도미니크 15-01-07 21:20
   
다 이런 사람들만 이라면 기독교가 전파나 됐을까요? 좋은일 한분도 많습니다 지금도 목회자나 평신도나 기독교인 중에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죠 그러니까 850이 유지되는거 아닐까요? 저런분도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저걸 모든 선교사가 저렇다고 일반화 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