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단하고 지친몸을 이끌고 사는 자에게 자기성찰과 내면의 집을 짓고 피안에 세계로 들어가는 불교를 권할만한 종교가 못된다.
어떤 이는 불교가 종교가 아니다 '과학'이다 하는 과학은 보편적으로 물질적인 인식 범주안에서 동의할수 있는 것 을 과학이라 부르지, 그외 형이상학적이고 알수없는 피안의 세계를 추론하여 과학이란 옷을 입혀 논리화 시킨것은 과학이 아니다 바로 종교다 왜?과학이라 굳이 우길까 그것은 상대적으로 개신교보다 우월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기위한 자기 과장에 불과하다.
언젠가 죽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논쟁이 있었다 살아계실때 쓰신 책이 죽은 후에 수십만원 하는 책으로 껑충뛰었다 대부분 불자들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무소유를 구하기 위해 웃돈을 언저주고 서라도 구하기 혈안이 된것이 문제였다.
'무소유'라는 것은 어떤 현학적 불교 내용은 그렇다 처도 이름그대로 무소유 즉, 모든것을 내려 놓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귀결된다.또한 '갖지 않으면 근심이 없다' 근심이 없으려면 눈에 '가시적'인 것은 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망상'에 불과하다 봐야한다"는 것으로 볼수있다 일단 '불교'의 종교적 맥락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런 '무소유'의 대한 삶의 '내면의 성찰'은 한 인간이 외부의 '물질적 세계'에 연결되 있고 물질과 관념이 서로 뒤엉켜 있어 정신적인 상호침투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환경 주변 인간관계에 따라 '자아'가 사로 다게 정립 다를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식하게 말하면 '존재하는 자는 존재하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것 만큼 각자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자아 에고는 타자와 향유할수 없는 것이다 허덕이는 자아가 심적으로 존재성에 허덕이면 종교를 매꿀수는 있다.
앞서 자아는 '타자'와 향유할수없는 나눌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즉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각자 자신의 알맞는 '하나님'이 존제한다 그것은 다르다"는 것으로 볼때 각자 알맞는 '하나님'이 존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다 '예수님'이 헐벗도 굶주린 목수의 아들 천민으로 태어났다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말할수 없는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구원을 하려는 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교는 '부르주아적 인식체계'를 갖추고 있다 즉, 불교는 불자들의 환경과 자아에 대한 배려가 너무없다 즉 모든것은 '공허'하다는 것 즉, 세상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말기적인 '개신교 세계관'과 흡사하다 인간의 관념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관념과 물질세계에서 상호 조응하고 생각과 행동을 한다, 따라서 불교는 물질적으로 풍부한자 즉 물질에 허덕이지않고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자연적 풍족함아래 배우는 자기 피안의 부르주아적 종교인 것이다.
즉, 실존적 인간이라는 물음에 실존이란 없다는것이고 기독교는 실존적인 인간은 실존하니 각자 자기에 맞는 종교심을 구축하고 불우한 환경이라면 그 환경을 받아들여 변화를 모색하라 는 '능동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불교는 이에 비해서 '피동적'이고 언제나 '현실세계'를 '도피'하는 '도망자의 종교'다.
헐벗고 굶주리고 가진것이 없는 자에게 "내려놓으라 집착은 어리석은 것이다"해봤자 '실존'하는 인간에게 있어 삶이란 곧 '투쟁'이고 '존재의 갈망'이라는 것에 또 태어남과 동시에 입으로 먹어야 하고,옷을 입어야 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해야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로서, 가난한 자에겐 그리 피부로 와 닫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사회적으로 부유한자 부러울것 없거나 자식을 다 기르고 느즈막하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노년층이나 사업실패 업보가 있어서 그렇지않나 하는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이와달리 공사장 인부나 공장근로자나 계층을 볼때는 육체노동을 하고 고된 삶을 사는 자에게 심정적 영혼적으로 충만하게 하는것은 '기독교'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