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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29 05:26
한옥이 2~3층이 없는 이유
 글쓴이 : 푸우님
조회 : 5,664  

한옥은 일반적으로 단층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다층 건물이 많은데
조선에는 다층 건물이 거의 없습니다.
처마위에 처마를 올려서 3층 처럼보여도 들어가면 1층입니다.
주거용이 아닌 건물은 다층 건물이 있어도
주거용은 거의 단층입니다.
이유는?
건축기술이 없는게 아니라 난방때문입니다.
바로 온돌 때문이죠..
2층, 3층은 온돌 난방을 할수 없었기 때문에 건물을
단층으로 지은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조들의 건축기술이 떨어져서 고층의 고루거각을
못지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봤는데 그게 아니라
고대에는 침대와 의자에서 생활하는 입식 생활을 하던
시기도 있었고 당시에는 다층 건물도 많았습니다만
온돌이라는 이상적인 난방기술이 일반화하자
지금처럼 보일러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단층외에는 온돌
난방을 할수 없으니 다층 건물이 사라지고 단층화하게 된거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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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기안 14-01-29 08:17
   
그래도 화로같이 서구나 주변국에서 나름대로의 난방방식이 잇을텐데
     
샤발 14-01-29 08:29
   
글쎄요. 만약에 몰랐으면 모를까 한번 온돌에 지지는 맛을 알고 난후에 복층집 지을려고 다른 난방으로 가려했을까요?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온돌이아닌 라디에이터 같은 방식의 난방을 사용하는 외국에서 겨울을 보낸다면 온돌 생각이 간절할겁니다.
          
바랑기안 14-01-29 08:33
   
그게 아니라 단순히 난방문제 때문에 짓지 않았다는건 무리가 있단 뜻입니다.
운드르 14-01-29 08:39
   
난방 문제도 있었을 거고, 다른 문제라면 단연 비용이겠지요.
한옥은 층 하나 올리려면 나무가 몇 배나 들어갑니다. 과연 그 비용을 감당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도 그럴 나무가 있기나 했을까요?
조선 후기에는 집 지을 때 헐어낸 집에서 그나마 쓸 만한 나무 추려내 재활용했을만큼 나무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바랑기안 14-01-29 08:40
   
복층집은 돌과 목재가 많이 들어가는데 이러한 자재들을 개인이 구하는건 조선민초들 입장에선 어려웠고 흙과 지푸라기등을 엮어서 초가집을 지어 산거죠, 그리고 중요한건 복층집을 건설해야할 필요성이 부족했구요.
복층건물이란게 좁은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기위해 건설되는건데 조선은 그렇게 인구과밀한 나라가 아니였죠
그리고 복층건물은 관리하기도 까다로웠습니다. 당장 중세 유럽엔 복층건물들이 수두룩 했음에도 위상상태는 최악이였습니다.
인구가 많아 수로가 더럽혀지기 일쑤였고 제데로된 화장실이 없어 오물등을 그대로 바닥에 뿌려버렸죠. 때문에 돌림병도 자주 일어났구요.
만약 조선이 특정지역에 인구가 과밀해졌다면 어쩔수 없이 주거난 해결을 위해 복층집을 지엇겠지만.. 사실 조선이 아무리 민초들을 위한다지만 그 엄청난 재정을 감당해줄리도 만무하고 그렇다고 단층집만 짓는다고 주거난이 생긴것도 아니니 필요성을 못느꼇습니다.
일단 그런 건물을 지어야한다는 당위성 자체가 부족했어요ㅗ
붉은여우 14-01-29 08:43
   
조선은 나무자원이 굉장히 부족한 나라였습니다.쉽게쉽게 2층을 올릴 수 있을만큼 목재가 풍부하질 않았죠. 그리고  상공업의 천시등으로 인한 낙후된 기술력과 유통구조도  다층구조의 건물을 만들기 어렵게 했을겁니다.    본격적으로 온돌난방이 시작된  18세기 이후에는 땔감에 쓸 나무도 쉽게 구하기 어렵게 됐죠.
     
바랑기안 14-01-29 08:49
   
목재부족은 70년대까지 이어졌죠 -_-;; 아버지도 나라에서 절대로 땔감때지 말라고 하는데 그말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단속도 거의 없었죠
사실상 나무를 하지말라면 밥도 먹지말고 난방도 하지말고 얼어죽으란 뜻인데..
나중에 아버지가 하는말이 나무를 하고싶어도 민둥산만 남아 나무를 할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석탄이나 석유등의 대체애너지가 지방과 시골까지 보급이 되고나서야 이러한 목재사용량을 줄일수 있엇죠.. 한국은 정말 오래동안 땔감을 사용했죠.. 지금이야 수십년동안 나무를 심어서 이정도까지 회복됬지만
붉은여우 14-01-29 08:46
   
위생상태 최악인건  조선이나 중세유럽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고요.  조선은 인구과밀한 나라 맞습니다. 영토대비 인구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인프라가 미비한데다가 상공업 발전이 더디고 능력부족과 수요부족 때문에 발전이 안된 것 뿐이에요.
     
바랑기안 14-01-29 08:52
   
경신대기근 이전까진 조선은 그렇게 특정지역에 과밀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인구과밀의 시작은 조선~ 대한민국 수도과밀화는 경신대기근 이후입니다. 행정력이 모조리 마비되어 지방엔 구휼미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행정과 치안이 완전히 부재상태였고 오로지 제데로된 행정력과 구휼정책이 원활하던 한양일대에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과밀해진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위생상태가 서로 별반차이 없다하더라도 좁은 곳에 여러명이 옹기종기 사는것과 한가구에서 더렵게 사는건 차이가 큽니다. 더 쉽게 질병이 걸리고 쉽게 오염이 되죠
          
붉은여우 14-01-29 08:57
   
바랑기안>>> 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은 높은 인구부양력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구가 과밀한 상태입니다.    유럽처럼 널널한 상황이 아니죠.    조선도 돌림병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상하수도 시설 자체가 안갖춰져 있는데  중세유럽보다 깨끗하다는 주장은 뭘 근거로 하는 겁니까??? 유럽은 그래도 일부지역이라도 상하수도 개념을 이해했는데요.  유럽은 상하수도 개념이 로마시대때 이미 완성된 경험이라도 있었죠.
     
디노 14-01-29 08:52
   
조선이 인구 과밀한 나라라니...말도 안되는 소리죠...조선 초기 인구 600만명이에요.
조선중기 임진왜란 영향으로 300만명으로 줄어듭니다. 그게 인구 과밀인가요?
          
붉은여우 14-01-29 08:58
   
조선 인구는 임진왜란 직전 천만을 넘은 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구 감소가 많았어도 300만은 불가능하죠.
               
디노 14-01-29 09:00
   
임진왜란 직전에 600만 명 맞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어요...
                    
붉은여우 14-01-29 09:01
   
추정인구 천만 넘었습니다.  인구추정은 남아있는 행정서류로만 하는게 아니라  그 시대의 농업생산력과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추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구증가율을 거꾸로 적용해봐도 600만은 도저히 안나오는 수치입니다.  실제로는 1200만 정도 됐다고 보는 게 마 더 현실에 가깝습니다.
                         
디노 14-01-29 09:04
   
구한말 때 인구가 천만이에요...무슨 임란 직전에 1200만명이라는 건가요?
자료를 보니 18~19세기 때 인구가 6, 7백만명이네요..
그것도 임란 이후에 많이 증가한 거에요...
                         
붉은여우 14-01-29 09:06
   
추정치는 학자마다 다 다르지만 600만은 말이 안되는 수치죠....  태조때도 오백만이 넘었을 걸로 추정하는데요.  임진왜란 이전 시기는 이미 토지 개간이 성공적으로 끝난 시기죠.    안정적으로 인구가 늘어나있는 상황이었고요.  조선은 인구조사가 정확하게 실시된 나라가 아니였고 실제 인구는 남아있는 기록과 그시대 농업생산력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를 해야 되는겁니다.
                         
디노 14-01-29 09:07
   
자료를 보니 18~19세기 때 인구가 6, 7백만명이네요..
조선은 호구조사가 잘되어 있었던 나라에요...추정하지 말고 자료를 찾아보세요...
                         
붉은여우 14-01-29 09:08
   
일제시대 인구 통계치를 보더라도 구한말에는 인구가 천만을 훨씬 넘어있었습니다.  1910년대에 1700만명 정도를 찍었었죠.
                         
디노 14-01-29 09:09
   
일본놈들이 자기들이 잘했다고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구한말 때 인구가 천 만명대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이천만명이 되거든요...
                         
붉은여우 14-01-29 09:10
   
인구통계가 정확히 실시된건  일제강점기 시대였고 조선은 인구 통계 정확히 작성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호구에서 빠져있는  숫자가 너무 많았죠.    인구조사를 너무 정확히 실시하면은  백성들을 괴롭게 한다는 식의 논리가 통하던 나라였는데 인구조사가 제대로 될리가 없죠.  노비나 천민 유랑민들까지 정확히 집계하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보편적인 인구증가율을 가지고 역산을 해봐도 임란 직전 600만명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인구가 600만명이었으면은 일본의 침략을 못막아내고  멸망했을 겁니다.
                         
디노 14-01-29 09:12
   
                         
디노 14-01-29 09:13
   
노비는 재산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명확하게 파악되고 있었어요...
                         
znxhtm 14-01-29 09:15
   
구한말 인구는 대략 1500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해방되고 약 3000만.
그래서 일본애들이 '우리가 너네 인구 2배로 만들어 줬다!' 뭐 그런 주장을 하죠.

임란 전의 인구는 약 1000만이 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디노님께서 어떤 자료를 보신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세금내역을 자료로 삼으셨다면 노비나 천민은 인구 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임란때 천민의 비율은 20%가 넘거든요.
                    
붉은여우 14-01-29 09:14
   
호구수가 전체 인구를 다 포함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자꾸 딴소리 하시는군요???  자연적인 인구증가율을 인정하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근대적인 통계에서 역산해 들어가봐도 600만은 절대로 안나옵니다.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이랑 같이 놓고 비교를 해봐도 그렇고요.
                         
디노 14-01-29 09:16
   
자료를 보여줘도 딴소리네요...조선은 전쟁이 많아서 자연증가율로 보면 안되요...글고 노비는 재산이라서 자손대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더 파악이 잘되고 있었어요...
                         
붉은여우 14-01-29 09:20
   
대부분의 학자들이 천만을 넘었을 걸로 추정하고 있구요. 근대적인 인구통계를 이용해서 역산을 해봐도 600만은 불가능합니다.  600만은 고려시대에나 가능한 수치에요.  호구수를 가지고 그게 인구의 전부다라고 주장하신다면  계속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겠죠.      그리고 실제로 인구가 600만이었으면 조선은 그냥 망했을 겁니다.  600만의 생산력으로 버텨낼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죠. 임진왜란은...
                    
붉은여우 14-01-29 09:16
   
http://online4kim.net/xe/19477  제시해주신 일본 자료에서 1600년대 말을 보면은 인구가 1700만을 넘긴 걸로 나오는데 동시대 조선 농업생산량을 고려해봐도  600만은 절대로 불가능하죠.    임진왜란 이전 경지면적은 조선이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습니다.  인구가 거의 세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건 불가능 합니다.
     
굿잡스 14-01-29 13:17
   
조선이 뭔 인구 과밀임?? ㅋㅋ 고려같은 경우 개경도 물령 50만 이상의 엄청한 대도시

였지만 조선시대로 가면서 도성 체재는 그보다 훨 널널해짐. 애초에 조선은 향촌자치형태임

지금의 안동하회마을등이고 이런 지방 향촌으로 들어가서 후학을 양성하는 식으로

도리어 도시인구가 분산되는 형태화 되었음.(그리고 조선은 15세기 경에 천만 정도

대한제국 시기에 오면 대략 2천만 내외가 됩니다. 이게 그렇다고 엄청 많아서 과밀 어쩌

고 식은 그렇군요. 지금 남북한이 합쳐 8천만 정도이니)
디노 14-01-29 08:50
   
온돌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금이 사는 집보다 높은 집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광택아 14-01-29 08:52
   
난방문제도 있고 조선시대때는 건축물 규모나 형태에 국가적으로 제한을 뒀습니다.
유학의 사상에 근거해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리고 크게 짓지 못하도록 규제를 했지요.
삼국시대때나 고려시대 건축물에는 복층건축물도 꽤 있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와 유교 사상때문에 그렇게 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랑기안 14-01-29 08:57
   
꼭 그런건 아닙니다. 큰돈을 번 임상옥이 임금이 주거하는 방보다 크게 집을 졌다고 곤장을 맞았지만, 큰집을 지었다고 죄가되는건 아니였습니다. 황희정승의 아들이 큰집을 지어 아버지에게 핀잔들은 사례도 보면 집을 크게졌다고 죄가 되진 않았습니다. 다만 청빈을 주로 강조하는터라 그다지 환영받지 않는 사회분위기였을뿐 군왕의 위엄에 흠이 되지 않는 어느정도 크기의 집까지는 죄가 아니였죠
znxhtm 14-01-29 08:55
   
고려시대 그림을 보면 다층으로 지어진 집에서
귀족이 화려한 연회를 여는 장면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엔 '왕보다 높은 곳에 있을 수 없다'란 이유로
다층 건물을 금지합니다.
붉은여우 14-01-29 08:55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조선의 산림자원 황폐화를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많은데  산림자원 황폐화는 연탄이라는 대체자원이  등장하고 산림녹화 사업이 성공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발전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목재로 집 짓는 것 까지 금지해가면서 산림자원을 보존한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직접 찾아서 읽지 않는 이상 그런 정보들을 알기가 어렵죠. 이미 옛날 일이니...
지해 14-01-29 10:55
   
우리나라가 겨울만 있는것도 아니고
무더운 여름이 있었는데
윗층일수록 시원할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러면 어째서 여름용 집을 안지였는지?
 간단한 얘기로 원두막이 멀리 보려는 것도 있지만
시원하고 비가와도 또 모기도 덜 덤비기에
높게 지은것 아닙니까.
푸우님 14-01-29 12:36
   
단순하게 나무가 없어서 못지었다?
단순하네요
붉은여우 14-01-29 13:06
   
쌀이 없으면 밥을 못먹고 나무가 없으면 집을 못 짓고 불도 못 때죠.  간단하지만 냉정한 현실이죠.
     
굿잡스 14-01-29 13:19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굿잡스 14-01-29 13:20
   
개성의] 여염집은 만 정(井)이나 되고 곡물은 백 전(廛)이 된다.

(중략)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펄럭이고 달 밝은 밤에 피리 소리 들린다.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도 밀집하여 서경

(西京, 평양)이 견줄 바가 아니다.

-명나라의 문헌, 조선부(朝鮮賦, 1490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집은 모두 기와로 덮었다. 외방(外方)도 그러하다.

오직 초야의 사람만이 모두 초가집이다.-김성일의 풍속고이(風俗考異, 159

0년)-
굿잡스 14-01-29 13:23
   
뭐 세종대왕시기의 풍성함이야 말할 필요는 없고

16세기 김성일의 풍속고이나 기타를 봐도 개성등에는 물산이 넘쳐나는 등 조선시대에도

상업은 중시한 농업만큼 나름 번창했음. 그리고 기록에도 보이듯 개성이나 평양 그리고 서

울 도성은 거의 모든 집이 기와로 덮여 있었다는 기록들 보면 알 수 있죠.


우리나라 한옥이 단층화 된 것은 점차 온돌이 대중화 되면서 나타난 현상은 맞음.

(우리나라 기와가 서토나 왜국같은 오늘날 보급형 기와와는 달리

암,수기와서리 상충의 무게가 상당한 편이라서 고층화시의 문제도 있긴 함)


그리고 경복궁의 초기 그림을 보면 다층 구조도 있고 임금이 이층 다락방에서 낮잠 자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기에 고려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고려시대 도시의 특색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다층 형태의 건물도 제법 있었음.
     
붉은여우 14-01-29 17:35
   
          
굿잡스 14-01-29 19:49
   
붉은 여우님아 벌거숭이 어쩌고 치면 그게 다 벌거숭이임 ?? 에구 님 링크로

해서 잡히는 기록들은 한번 제대로 보고 이런 단순 링크 다세요??(무슨 농사짓는다고

나무 밀어 벌거숭이 어쩌고 이런 기록들은 좀 보고 올리는 것임?)


예전에 내가 벽돌 관련해서 이런 글 올렸더니 뭔 액면 그대로 들고와서리 참..

(진짜 단순하게 조각 조각으로 입맛따라 그냥 자위적으로 해석해되니 쩝.)
               
붉은여우 14-01-30 09:43
   
붉은여우 14-01-30 0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