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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5-07 00:48
불교의 깨달음
 글쓴이 : 고지호
조회 : 2,352  

불교가 진리라면 그 진리는 당위가 되고 당위가 된다면 당연히 따르도록 강요 해야지 그걸 강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글을 밑의 글에서 읽었다.

위 문장을 한 번 자세히 보자. 

불교가 진리다..라는 문장부터 분해해 보자. 불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은 진리인가?

그럼 그전에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진리인지 아닌지 알 거 아닌가?

그 다음에야 그 진리는 당위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당위니까 강요해도 된다라는 문장의 성립 가능성이 나온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위 문장의 모든 명제는 전혀 연결이 안되는 문장들이다.

진리는 당위임을 뜻하는 가? 그리고 당위라면 그걸 타인에게 강요해야 하는 건가? 

문제는 위 문장을 쓴 사람이 자신의 말이 어떤 논리적 연계를 가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즉,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위는 마땅히 어떤 것이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진리는 세상의 이치, 혹은 세상의 실상을 보통 의미한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보통 죽는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진리치(T)다. 그럼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 죽어야 하는가? 웃기는 이야기다.

진리가 세상의 이치나 구성원리가 아니라고 해보자. 혹은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라고 해보자(아마 불교의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이 가장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 진리가 맞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강요해야 하는 가? 내가 생각 해보니 나는 게임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다. 그것은 나에게 진리다. 그러니 타인에게도 그 진리를 강요해야 할까?

이상한가? 이상할 거 없다. 만일 진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라면 그 행복이라는 것 역시 정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일반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어떤 방법, 그것이 진리라고 정의하지 않으면 위 문장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방법이 진리라고 설정한다고 해도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윤리적 문제가 남는다. 위 문장을 쓴 사람은 이런 논리적 사유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 불교의 진리가 무언지 한번 살펴보자. 

불교의 진리?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는 뭔가?

사성제와 팔정도다. 사성제란 인생이 결국 고통이라는 깨달음이고 팔정도란 고통을 종결 짓고 자유를 찾는 방법론이다. 불교의 자유란 무엇인가? 불교가 있던 시절 알려진 모크샤와 같은 개념의 자유와 다르게 어떤 조건도 없는 위없는 자유, 아뇩다라막샴보리다
(고타마가 실험해 본 결과 당시 브라만의 수도승이 집중을 통해 깨달은 선정은 법열을 가져다 주지만 선정의 순간이 깨어지는 순간, 즉 조건이 맞지 않으면 그  법열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보고 한계를 알았고 그는 그 이상의 자유를 얻고 싶었다고 말한다).

즉.. 위없는 자유가 무엇인지는 각자가 찾아가서 알아 보아야 할 거고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라는 것은 그 진자유를 위해 갈 수 있는 방법론의 제시일 뿐이다. 삶이 고통에 차있다는 깨달음을 불교의 진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니 결국은 팔정도가 핵심인 셈이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이 것은 마찬가지다. 소승불교는 그 방법론에서 정념과 정정진에 초점을 두고 가장 기본적인 호흡의 집중, 위빠사나 등의 초기 부파불교의 수행에 전념하여 항상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대승불교는 이를 보다 대중화시킬 수 있는 기도나 기타 철학적 사유를 더하여 교리적인 경향을 띄고 있을 뿐이다.

즉, 불교의 진리라는 것은 결국 고통을 이겨내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론의 제시다.

이 방법론이 옳다.. 그래서 나만 자유로울 수 없으니 너도 억지로 자유롭게 만들겠다!!! 이 말이 불교와 어울리는 말일까?

혹 맞다고 하자. 결국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데 깨닫기 싫다는 사람을 강요하면 그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의 진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일 뿐이다. 그 가능성을 추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결국 개인의 몫일 뿐이다. 사천왕이 겁주면 그가 갑자기 집중을 하게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세밀한 움직임까지 관찰하여 사마타를 얻고 위빠사나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까?

웃기는 이야기다. 결국 불교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나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불교연구가도 아니다. 다만 논리와 지식을 가지고 하는 말일 뿐이다. 아래 법륜스님의 이야기가 수준이 높고 훌륭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말을 하면서 법륜스님이 자신의 말과 마음의 움직임 말하고자 하는 동기,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느끼는 자신의 반응까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다면 그는 훌륭한 불교수행자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다.

결국 불교의 진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지 타인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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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원화이트 15-05-07 01:06
   
내 댓글 한줄 가져다가 개솔 장황하게 푸셨네..

사성제 팔정도도 다 개소리임..절라 뭐라도 있는 듯 3,000년간 썰풀어봤지만  불교는 답이 없음...

불교에게 묻는 근원적인 물음...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물으면 답해줄 넘이 없음..

결국 인간구원과 중생구제의 궁극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는 법방은 무엇인지를 물으면 답할 넘이 없음...

죄 짓지 말고 살아라..죄 지으면 업보를 받아서 내세에 그 업을 다 받는다..라고 하지만

결국은 다 사람마다 마음먹기에 따라 달린 일이고, 어떤 사람이 악행을 행한다고 했을 때 불교가 개입할 여지가 없음..
지가 죄를 짓고, 지가 내세에 업보를 받겠다는데? 뭐 어쩌라구..불교 믿고 죄안짓고 살았다고 부처가 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죄 안짓고 살 수도 없음...

개독들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황당한 썰이라도 풀지만, 불교는 불교의 가르침이 뭐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답이 없음...

그러니 고려때 500년간을 해처먹었어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거임..


그러면 불교가 하는 일은 뭔가? 절간의 땡중은 뭘할 수 있나?

사성제..인생이 고통이다가 무슨 구원의 법방임?..그냥 현상을 말한 것일 뿐....인생이 고통이라는 넘에게는 고통일 것이고 환희라는 넘에게는 환희일 것이니 다 맞는 소리도 아님...

팔정도가 방법론이라는 것도 다 개솔임...

내가 질문하나 하겠음..

1. 님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음?

2. 님이 부처가 되면 나같은 중생은 어찌 구제할 것임?

2.번은 석가가 지 생전에도 못했던 일이고, 석가 뒈진 후 3,000년이 넘도록 못한 일임

1번은 인류역사에서 인간의 몸으로 와서 부처가 된 넘이 석가 말고 몇 넘이나 있음? 두명만 이름을 대주면 참 고맙겠음..

석가 지도 못한 일이고, 인류역사에서 자기 한몸 말고는 없는 일인데 무슨 수로 요새 세상의 땡중들이 저를 구원하고 중생을 구제하겠음?

불교가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못하니 썰만 풀고 있는 것임...애초에 그럴 권능도 없는 반쪼가리 교리고....
     
고지호 15-05-07 01:20
   
결론은 님이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불교에게 묻는 근원적인 물음?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묻는다면 답해 줄 사람이 없다고요?
이미 답하지 않았나요? 팔정도를 따라 해 보세요. 그러먼 고통이 사라질 거고 자유가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싫어요? 그럼 안하면 됩니다. 불교는 원래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아요.

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미 자신이 다 답을 하고도 또 질문을 던집니다.

1. 어떻게 부처가 되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느냐? 말했잖아요? 팔정도를 실천하면 된다고.
팔정도가 어렵다? 그럼 간단하게 위빠사나라도 수련해 보세요. 쉬워요. 님이 일정정도 근기만 된다면 혼자서 위빠사나를 수련해도 마음이 자유로와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지혜수련입니다.

2. 내가 부처라면 님같은 중생을 어찌 구제하느냐고요? 왜 내가 님을 구제해야 하죠? 님은 불교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원래 불교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 뿐입니다. 그래서 고타마가 죽을 때 아난에게 남긴 말도 나를 믿거나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섬으로 삼고 빛으로 삼아 나아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인류역사에서 부처가 된 넘이 몇 넘이나 있냐고요? 이 질문 역시 황당하기 그지 없어요. 님이 뭔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게 뭔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원래 불교에서 부처, 혹은 붇다라는 것은 그냥 깨달은 사람입니다. 부처의 모든 제자들이 이미 아라만이었어요. 여기서 아라만은 이미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 하나 하나 다 말해야 할까요? 뿐만 아니라 이후 유명한 많은 선승들.. 달마조사에서부터 육조혜능에 이르기 까지 이들은 모두 부처라고 하면 됩니다.

님이 불교를 전혀 이해못하고 어디 대승불교나 밀교화되어 신격화된 부처상이나 들어서 알기에 이런 무지한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자.. 결정적으로.. .전 불교신자도 아니고 불교 전문가도 아닙니다. 그냥 이정도는 알아야 뭔가를 비판하고 비난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원화이트 15-05-07 01:23
   
님 썰 고마푸소...

깨달은 사람이 부처다....뭘 깨달아야 하는데요? 깨달음의 대상과 객체가 있을 것 아님?

뭘 깨달아야 부처인가요?

한글맞춤법을 깨달으면 부처인가요? 수학공식을 깨달으면 부처인가요?

그저 앵무새처럼 깨달은자가 부처라고 하는데, 뭘 깨달아야 되는지도 알지도 못하는 개 허접한 종교가 불교임..

그러니 썰이라고 하는 것임...

답을 한번 해보시지요...뭘 깨달아야 부처라고 하는건지....

이거 답변 못하면 님이 불교가 어떻고 한 소리 다 개소리되는 것임...한번 답해보시길..

인생이 고통이다를 깨달으면 부처인가? 부모에게 효도해야한다를 깨달으면 부처인가?

도대체 뭘 깨달아야 하는건지, 뭘 깨달으려고 해야 하는지 한번 답을 해보시길..


불교가 그 대답을 못하니 불경이 팔만개도 넘는 것임....

답을 아는 넘이면 팔만개를 답변이라고 내놓겠음?
               
고지호 15-05-07 01:32
   
ㅎㅎㅎ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답을 줄 수가 없어요.
불교의 깨달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 차려서 스스로 마음의 움직임으로 인한 고통에 빠지지 않는 경지에 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나중에 한문으로는 누진통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모두 관찰하여 더 이상 마음으로 인한 고통, 번뇌, 그리고 카르마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이를 깨달았다고 하고 있어요.

이게 맞는 말이냐고요? 직접 실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타마도 그랬죠. 직접 배워서 내 말이 틀리다면 인정하지 말아라. 책에서 맞다고 해서 믿지 말고 직접 행하고 실험해 보아라.
                    
더원화이트 15-05-07 01:32
   
말해도 알아듣질 못한다니..

님이 말을 해준 적이 있음? ㅋㅋ쿠 같잖지도 않네요...

님 참 대단한 고승이 납셨네요...석가 이래 최대로 높은 경지에 오르셨나 봄...말하지 않음으로서 말을 했다 하고......

님이 말해줄 깜냥이나 되고요?
          
고지호 15-05-07 01:27
   
위에 아라만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라한입니다. 수정이 안되네요....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깨달은 이를 지칭한 말로 후에 대승불교에서는 성문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고타마싯달타 부처가 제시한 방법론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불자들을 아라한, 성문 이라고 합니다.
               
더원화이트 15-05-07 01:30
   
그니깐 뭘 깨달아야 아라한이 되는거냐고 묻는 것임..

왜 동어반복을 하심?..깨달은 자가 부처라고 해서 그럼 뭘 깨달아야 하냐니깐 깨달은 자가 부처라고 하면 이게 말이겠음? 막걸리겠음?

법륜법문을 들어도 저거에 대해 말하는 꼴을 본적이 없음....그러면서 주뎅이만 살아서 깨달아야 하고 자비가 어떻고..다 헛소리지..

근원적인 질문에 근원적인 답을 못하면 약도 없는 것임...

님 생각에 법륜은 깨달았을 것 같음? ㅋ

님에게 불교를 말하라면 님 깜냥에 불가능할 것이고, 법륜이 깨달았는지 님이 알고 있으면 대답해주시기바람...

법륜이 안깨달았다면 걔나 나나 어차피 돌팔이고,

걔가 깨달았다면 그 근거는 뭔지 밝혀주시길...
     
얼렁뚱땅 15-05-07 11:41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말로 옮길 수 없다고 하고, 경전 조차도 먼저 공부한 선배들이 본인이 느낀점과 경험을 적어놓은 탈무드 정도로 취급합니다. 답할 수 없는 내용을 물어보시면 답이 안나올 수 밖에 없죠.

1번 2번 질문이 애초에 나올 수 없는 질문이라는거죠

그리고 불교는 애초에 세상을 바꾸겠다는 종교가 아닙니다.
고지호 15-05-07 01:38
   
더원/ 애초에 기초지식이 없으면 뭔가를 더 배울 수가 없습니다. 1+1을 알아야 뺄셈을 할 수 있고 덧셈 뺄셈을 알아야 곱셈을 이해하고 곱셉을 알아야 나눗셈을 할 수 있지 않나요?

누누히 이야기 하지만 전 불교신자도 아니고 불교를 별로 변호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이 뭔지를 알아야 불교를 비판할 거 아닙니까?

고타마 싯달타는 인간의 마음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움직임에 끌려 다닌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고타마가 처음 배운 것은 사마타 였어요. 흔히 선정이라는 방법인데, 어떤 것에 지극히 집중하면 마음이 편안해 지고 몸과 마음이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를 흔히 법열이라고 합니다. 이 법열의 경지가 최상으로 가면 브라만교에서 이야기 하는 모크샤에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모크샤의 경지란... 자신이 원할때는 언제라도 선정에 들어서 편한히 쉴 수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타마가 관찰해 보니, 이 모크샤는 선정이 깨어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일상으로 오는 순간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작동하여 감정이나 행위를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순간에도 마음을 조정하여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론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경지에 도달할 때 깨달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만일 정말 알고 싶다면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타인을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그로 인해 우월감을 맛보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뭔가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더원화이트 15-05-07 01:42
   
내가 기초지식이 없는지 있는지는 님 깜냥으로는 알턱이 없을테고.

그냥 묻는 질문 두개에 답을 하면 될 것이지,..뭘 사설이 이리 긴가요?

뭘깨달아야 부처인가요? 님처럼 불교는 사성제 팔정도  이런 지식쪼가리 외우면 깨우친 부처가 된 것인가요?

깨달아서 부처가 된 넘이 몇넘이나 있나요?
          
고지호 15-05-07 01:43
   
묻는 질문에 이미 답을 다 드렸습니다.
               
더원화이트 15-05-07 01:45
   
이게 요새 땡중들이 하는 짓이고, 석가 이래 3,000년간 불교가 해처먹은 짓임..

팔만경을 만들고 여기 다 있어...

이런 개소리 참 웃기지도 않음...그런 개소리로 3,000년을 해처먹었음..

번뇌가 없는 마음? 마음의 움직임으로 인한 고통? 누진통에 빠지지 않는 경지?

아무리 형이상학이라지만 저정도 개소리는 사기임..
                    
고지호 15-05-07 01:51
   
1. 어떻게 깨달음을 얻는가?
팔정도를 수행하든지, 간단하게 맛이라도 보려면 위빠사나라도 수련해 보세요.

2. 부처이 외에 깨달은 사람두명만 이름 대 봐라?
부처의 10대제자도 아라한이며 그 이외 많은 선승-달마조사에서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도 부처다.

3.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깨달음의 주체와 객체가 뭔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마음의 움직임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고 이를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경지가 아라한의 경지다.  이를 다른 말로 누진통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은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끌려 다닌다.
                         
더원화이트 15-05-07 01:54
   
개소리 그만 하심..

육조 혜능은 혜능이지 무슨 부처임..

깃발이 움직이네....
움직이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바람일세....
깃발도 바람도 아닌 그대들 마음이네...

이런 썰 풀면 부처임?

대대로 부처가 저리 많으면서 왜 불국토를 못만들었음? 바빠서?

이 양반아

수행해서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도 불교 썰에 의하면 번뇌고 욕심임...

그래서 무타념 무타상을 말하는건데 무타념 무타상이면 깨달을 수 있겠음? 상과 념이 없고 인식이 끊어진 상태인데?

타상과 타념이 없고 인식이 끊어진 자리에 다다르면 그걸 말할 수 있겠음? 느낄 수 있겠음? 불 수 있겠음? 그러니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겠음?
                         
고지호 15-05-07 02:31
   
더원/ 1. 부처에 대한 이해가 대승불교에서 곁들은 신비주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또 유마경 등의 후기 대승불교의 상대론적인 인식을 읽지도 못했습니다. 초기 불교에서 부처는 불국토를 건설하는 신비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고통을 끝낸 방법을 찾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후 후기 대승불교에에서는 중생의 눈에는 사바세계가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보살과 부처의 눈에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불국토가 이미 건설되어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즉, 세상에 대한 인식이 불국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지 이 세상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썰이 나옵니다. 썰을 푸시려면 여기까지 읽으셔야죠.

2. 육조혜능의 설화는 그저 설화 일 뿐입니다. 부처가 누구냐 한다면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부처라는 거지 어떤 이적이나 신비를 행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혜능이 깨달았다면 저런 말을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저런 말을 할 정도로 마음의 움직임과 인식에 대한 혜안을 얻었기 때문이겠죠.

3. 님이 전혀 불교를 모른다는 것은 아래 말에서도 알 수 있어요. 무타념 무타상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호흡이외의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호흡만 생각하라는 말로 쓰이는 관용어입니다. 상과 인식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님의 착각이고 오로지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라는 선의 방법론입니다. 위빠사나의 하나인 아나사파사티가 대승불교의 선으로 넘어오면서 나온 방법입니다. 모르면서 아무 용어나 막 쓰시면 안됩니다.

4. 타상과 타념? 여기서 타는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념과 상에 의지하지 말고 호흡에 의지한다는 의미를 엉뚱하게 사용하고 있네요. 막쓴다고 다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인식이 끊어진 자리? 그런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 날뛰던 인식이 조용하게 가라 앉을 때 스스로 마음의 자리가 드러나 인식 그 자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위빠사나, 혹은 선정의 목표입니다.

모르면 제대로 알고 이야기 하시는 게 좋습니다.
                         
미우 15-05-07 02:39
   
너무 힘빼지 마세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르니 자신의 생각을 얘기 해볼 수는 있으나 양해를 구할만한 격식도 없이
무슨 논쟁을 해보고 눈높이를 알아 본 것도 아닌 상대를, 일면식도 없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품평할 수준이면 이미 인터넷 따위 들어와 타이핑 같은 거 치고 있을 존재가 아니라야 합니다.
                         
고지호 15-05-07 02:43
   
미우/ ㅎㅎ 네 감사합니다. 잠이 안와서 그저 타이핑 치고 놀고 있습니다. 나름 예전 읽은 책들 내용도 한번 정리 해보고요. 재미있네요.
별 내용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읽는 분들이 이런 내용도 있구나.. 하고 이해 한다면 그 또한 작은 보람 아닐까 생각 해 봅니다.
좋은 새벽 되시기 바랍니다.
은단 15-05-07 01:43
   
잘 읽었습니다
헬로가생 15-05-07 01:57
   
굿
아트모아 15-05-07 03:27
   
글속에서 그사람의 인격이 어느 정도는 보입니다.

무언가를 논할 자격도 안되는 인간들을 이곳 이슈방에서 많이 보는군요.

애써 외면하려 노력하지만 저역시 수양이 덜된  인간이라 개소리 지껄이는 군상들을 보면

저놈들은 실제로 보면 대체 어찌 생겨 쳐먹은 인간들일지 너무 너무 궁금해 집니다

털끝보다 작은 지식으로 어찌 저리 뻔뻔스레 경박스러울수 있는지.....쯧쯧
오순이 15-05-07 07:43
   
더원하이트님 말이 공격적으로 말해서 그러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근 백년 동안 깨달은 중이 어디 있으며 그것을 어찌 증명하며
깨달음이란게 실체가 아닌 개인의 마음이라면 그것이 진짜라고 단언 할 수 있는가?
내가 깨달음에 도달하고 남에게 알려줄려고 해도 수십년 공부해서 5천만 인구중에
한 두명만 깨달음에 도달한다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요?
내가 수행하는 것은 나를 위함인가 남을 위함인가 아니면 둘다 인가..
남을 위함이라고 하면 의미가 없다 깨달아도 줄 수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드네요.
     
얼렁뚱땅 15-05-07 11:27
   
증명 안되고 단언 못합니다. 증명 해야되고 단언 해야되는게 아니죠.

노벨상을 받아야 공부한게 아닙니다, 중학교 겨우 진학할만큼만 공부를 해도 안한거보단 낫고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알아가려는 시도가 의미 없다고 할 순 없죠.
우왕 15-05-07 08:39
   
물리학이나 깨달음과 관련되면 유독 허세진 사람들이 많아
에보 15-05-07 08:55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이 닥쳐온 순간에야 깨닫는 것들을
살아가면서 미리 깨닫는게 불교.
웅캬캬캬 15-05-07 09:28
   
불교는 학문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이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수학의 10대 난제같이 문제와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검증하기 위해 수많은 수학자들이 매달려있듯이

많은 출가인들이 해탈이라는 답을 놓고 매달려 있는 겁니다.
백수광부 15-05-07 11:25
   
붓다 자신도 깨달은 후에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수행법대로 죽기전까지 계속 수행했다던데 어딜가도 불교는 깨달음이 목표인 종교라는 말밖에 없어요.. 생각해보면 그 깨달음이란것의 내용도 붓다가 평생을 돌아다니며 행한 설법으로 다 드러냈고, 굳이 깨달을게 있다면 고와 고의 원인에 대한 자각이겠죠.. 그 자각과 붓다의 주장이 일치하고 붓다의 해법에 동의한다면 이후로는 부단한 수행의 과정뿐입니다. 깨달음은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에요..

견성이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 집어치우고 불교 수행체계를 살펴보면 간명하죠..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등등 온갖 교리가 동일한 원칙에 따라 구성되어있습니다. 감각경험과 신구의로 행해지는 행위들이 자기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주 단순하기 짝이없는 원칙이에요.. 그래서 수행체계도 선한 행위로 심적성향을 순화시키고 감각적 지각에 휘둘리지 않게 항상 의식을 집중시켜라.. 단순하게 말하면 그게 답니다. 수행의 초기부터 끝까지 모든 존재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비관을 항상 기초로 깔고 가고, 계율에서 도덕적 행위를 하기를 요구하고, 선정을 통해 의식을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그 집중된 의식을 바탕으로 세상과 자기자신을 살피라고 하는건 이런 이유 때문이죠..
피보이 15-05-07 19:05
   
불교인들이 저보다 불교의 핵심을 잘설명 못하는듯 -.-
제가 동국대나와서 불교학과 아는형에게 물었습니다..(현재 교수가 되셨구요)
형 극락이 뭐고 깨달음이 뭐야..이정도 질문이었던것 같네요.
그러자 그형이..

불교에서 깨달음으로 부처가되는게 목적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모든사람이 서로 자비로 대하는 세상 또는 그걸위해 공부하는 과정(깨달음을위한수련같음)이 더중요하고 그자체가 극락을 현실에서 이루는것...
부처란 깨달음의 결과일뿐 부처자체가 중요한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위해 서로가 공부하고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한것이다...그러다보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고 곧 극락이다....
또 자비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는데 함께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게 자비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대학다닐때 아주 인상깊게 들은 얘기라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자비란 말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구요..
제가 잘몰라 설명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아시겠지요..ㅎㅎ.
괴개 15-05-07 21:13
   
제가 좋아하는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하길 길을 길이라고 말하면 길이 아니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깨달음이 아니죠.

노자가 길을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했듯, 부처도 깨달음을 말로 설명 못합니다.
그걸 모르면 모르는대로 사는게 맞는 것이고, 굳이 길이나 깨달음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사람은 필요한대로 알게될테고, 필요없는 사람은 몰라도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필요없는 사람에게 길이 없다거나 깨달음이 없는게 아닙니다.
그걸 길이나 깨달음이라고 일컫는게 아닐 뿐이죠.
인류애 15-05-07 21:32
   
진리는 궁극의 법칙이며 최고의 보편타당함이다.
보편타당의 법칙을 어기는 자는 망할 것이며
보편타당의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는
어망을 벗어난 물고기와 같이
대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불법을 시인하고 따르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법을 깨닫고
바르게 법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고
궁극의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깨달음이
현시대 한국 땅에도 있습니다.

어설픈 확신으로
망언을 늘어 놓는다면
그또한 인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룰루정수기 15-05-08 12:31
   
전 불교에대해서 잘 알지못하지만 불교 괜찮은 종교아닌가요? 대승보다는 소승불교쪽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스스로의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종교인데...
     
괴개 15-05-08 16:14
   
소승과 대승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다만 그 출발점이 약간 다를 뿐이죠.
예를들자면,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세상을 고통으로 본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승은 고통에서 벗어나면 깨달았다고 보는겁니다.
반대로, 고통 가득한 세상에는 실은 우리가 보지못하는 가려진 즐거움이 가득하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은 즐거워지면 깨달았다고 보는겁니다.
하나는 현재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차이가 있죠.
대승이 다른 사람과 같이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 달리 즐거움은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