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진리라면 그 진리는 당위가 되고 당위가 된다면 당연히 따르도록 강요 해야지 그걸 강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글을 밑의 글에서 읽었다.
위 문장을 한 번 자세히 보자.
불교가 진리다..라는 문장부터 분해해 보자. 불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은 진리인가?
그럼 그전에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진리인지 아닌지 알 거 아닌가?
그 다음에야 그 진리는 당위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당위니까 강요해도 된다라는 문장의 성립 가능성이 나온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위 문장의 모든 명제는 전혀 연결이 안되는 문장들이다.
진리는 당위임을 뜻하는 가? 그리고 당위라면 그걸 타인에게 강요해야 하는 건가?
문제는 위 문장을 쓴 사람이 자신의 말이 어떤 논리적 연계를 가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즉,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위는 마땅히 어떤 것이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진리는 세상의 이치, 혹은 세상의 실상을 보통 의미한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보통 죽는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진리치(T)다. 그럼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 죽어야 하는가? 웃기는 이야기다.
진리가 세상의 이치나 구성원리가 아니라고 해보자. 혹은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라고 해보자(아마 불교의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이 가장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 진리가 맞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강요해야 하는 가? 내가 생각 해보니 나는 게임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다. 그것은 나에게 진리다. 그러니 타인에게도 그 진리를 강요해야 할까?
이상한가? 이상할 거 없다. 만일 진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라면 그 행복이라는 것 역시 정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일반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어떤 방법, 그것이 진리라고 정의하지 않으면 위 문장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방법이 진리라고 설정한다고 해도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윤리적 문제가 남는다. 위 문장을 쓴 사람은 이런 논리적 사유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 불교의 진리가 무언지 한번 살펴보자.
불교의 진리?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는 뭔가?
사성제와 팔정도다. 사성제란 인생이 결국 고통이라는 깨달음이고 팔정도란 고통을 종결 짓고 자유를 찾는 방법론이다. 불교의 자유란 무엇인가? 불교가 있던 시절 알려진 모크샤와 같은 개념의 자유와 다르게 어떤 조건도 없는 위없는 자유, 아뇩다라막샴보리다
(고타마가 실험해 본 결과 당시 브라만의 수도승이 집중을 통해 깨달은 선정은 법열을 가져다 주지만 선정의 순간이 깨어지는 순간, 즉 조건이 맞지 않으면 그 법열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보고 한계를 알았고 그는 그 이상의 자유를 얻고 싶었다고 말한다).
즉.. 위없는 자유가 무엇인지는 각자가 찾아가서 알아 보아야 할 거고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라는 것은 그 진자유를 위해 갈 수 있는 방법론의 제시일 뿐이다. 삶이 고통에 차있다는 깨달음을 불교의 진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니 결국은 팔정도가 핵심인 셈이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이 것은 마찬가지다. 소승불교는 그 방법론에서 정념과 정정진에 초점을 두고 가장 기본적인 호흡의 집중, 위빠사나 등의 초기 부파불교의 수행에 전념하여 항상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대승불교는 이를 보다 대중화시킬 수 있는 기도나 기타 철학적 사유를 더하여 교리적인 경향을 띄고 있을 뿐이다.
즉, 불교의 진리라는 것은 결국 고통을 이겨내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론의 제시다.
이 방법론이 옳다.. 그래서 나만 자유로울 수 없으니 너도 억지로 자유롭게 만들겠다!!! 이 말이 불교와 어울리는 말일까?
혹 맞다고 하자. 결국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데 깨닫기 싫다는 사람을 강요하면 그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의 진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일 뿐이다. 그 가능성을 추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결국 개인의 몫일 뿐이다. 사천왕이 겁주면 그가 갑자기 집중을 하게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세밀한 움직임까지 관찰하여 사마타를 얻고 위빠사나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까?
웃기는 이야기다. 결국 불교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나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불교연구가도 아니다. 다만 논리와 지식을 가지고 하는 말일 뿐이다. 아래 법륜스님의 이야기가 수준이 높고 훌륭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말을 하면서 법륜스님이 자신의 말과 마음의 움직임 말하고자 하는 동기,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느끼는 자신의 반응까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다면 그는 훌륭한 불교수행자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다.
결국 불교의 진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지 타인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